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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 | 칙서 실종 사건

사관의 논평에는 사심이 없었을까 | 나라가 약하면 굴욕을 당한다

  • 허윤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 | 칙서 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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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약하면 굴욕을 당한다 '칙서 실종 사건'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예나 지금이나 외교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중국, 일본, 북방 유목민족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특히나 외교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조 12년(1736) 3월 15일, 영조는 원자(元子)를 세자로 책봉했다. 이때 책봉된 세자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세자다. 다음 해 7월 25일, 세자 책봉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서명균을 정사(正使)로 하는 주청사(奏請使)가 청나라로 떠난다.

“완전히 착각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그리고 영조 14년(1738) 1월 17일, 청나라의 칙사가 세자의 책봉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칙서를 가지고 조선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졌다. 조정에서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부담스러운 것은 사신 접대를 위해 치러야 할 갖가지 비용 때문이었고, 기쁜 것은 주청사를 보낸 지 6개월 만에, 기대했던 것보다 책봉 승인을 빨리 받게 됐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비상 체제에 돌입해 칙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한편 하전(賀箋), 즉 세자의 책봉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라고 전국에 공문을 보내는 등 책봉 관련 의식 절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김빠지는 소식이 전해졌다.

예조 판서 송진명: 이번 칙사의 행차는 세자를 책봉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잘못 알고 팔도에 공문을 보내 하전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이미 온 것도 더러 있습니다.

영조: 완전히 착각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송진명: 잘못 전달한 역관은 의금부로 잡아다 처벌해야 합니다. 또한 칙사가 무슨 목적으로 오는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변경의 신하도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올라온 하전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돌려보내면 괜히 웃음거리만 될 것이니 일단 받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조실록 14년 2월 7일〉

알고 보니 이때의 칙사는 세자 책봉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2년 전에 즉위한 청나라 건륭제가 자신의 생모를 황태후로 높이고, 부인을 황후로 책봉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보낸 칙사였다. 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라고 공문까지 돌린 조정으로서는 몹시 민망하고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사실을 알게 돼 다행이었고, 칙사가 오는 것은 그것대로 사실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헛고생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말을 잘못 전한 역관과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의주 부윤을 처벌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됐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 | 칙서 실종 사건

[일러스트 이부록]



영의정 이광좌: 원접사(遠接使)가 이조판서 조현명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우의정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였는데, 매우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라 가지고 왔습니다.

영조: 무슨 편지인가?

우의정 송인명: 대개 칙사가 의주에 도착하면, 우리 쪽 사람이 으레 밤을 틈타 몰래 칙서를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칙서가 없이 빈 상자만 있었다고 합니다.

영조: (편지를 가져와 읽은 후) 이는 참으로 전에 없던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송인명: 혹시 저들 나라에서 앙심을 품은 자가 있어서 두 칙사에게 문제를 일으키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닐지요.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송진명: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을 속이려고 일부러 다른 곳에 감추어두었다면 어차피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권력 다툼을 하느라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면, 저들 또한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어 분명 우리나라 탓으로 돌릴 것이니, 장차 큰 사달이 날 것입니다.

이광좌: 이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일이 아니니,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해야 합니다. 어찌 우리가 먼저 동요하겠습니까. 만일 저들이 칙서가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고 동요한다면, 우리도 함께 놀라고 동요하며 위로하면 그뿐입니다. 혹시 그들이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찾아내라고 한다면, 우리는 ‘칙서를 받아서 넣고 잠그는 것을 모두 당신들이 주관했으니, 어찌 우리가 잃어버릴 리 있겠는가’라고 해야 합니다.

영조: 내 생각도 영의정의 말과 똑같다.

송인명: 칙사가 우리나라 경내로 들어온 직후에 칙서를 가진 사람을 일부러 물에 빠뜨려 물에 약간 젖게 하고, 이를 핑계로 상자를 열어보자고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영조: 이는 임금 앞에서 할 말이 아니구나. 〈영조실록 14년 2월 7일〉



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 | 칙서 실종 사건

1725년 청나라 사신이 그린 봉사도(奉使圖). 조선 왕실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 주영하 교수]



사라진 칙서,‘냉가슴’ 조정
칙서가 사라졌다. 칙사가 의주에 도착하면 대개 밤에 몰래 칙서를 훔쳐봤던 모양이다. 칙서 내용을 미리 조정에 보고해 대비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평소대로 했는데, 문제는 상자 안에 칙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의주로 마중 나간 원접사가 놀라서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매우 당황하면서 사건의 전말을 추리하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논의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청나라가 아무리 기강이 없다고 해도, 어찌 칙서를 잃어버릴 리 있겠으며, 또 어찌 일부러 감추어두고 우리에게 뇌물을 요구할 리가 있겠는가. 설령 도중에 잃어버렸다 해도 그 책임은 저들에게 있고, 몰래 숨겨놓고 뇌물을 요구한다 해도 우리나라는 할 말이 있다. 그런데 칙서가 없어졌다는 보고가 있자 온 조정이 불안해하고, 심지어 물에 젖게 한 뒤 열어보도록 청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묘당(廟堂)에서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이 이런 식이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영조실록 14년 2월 7일 〉

원래 칙서는 사신이 서울에 도착해 조선의 임금에게 전달하기 전까지는 청나라 측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없어졌다 해도 조선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칙사들의 횡포를 오랫동안 겪어온 터라 조정은 동요하고 있었다. 상자를 일부러 물에 빠뜨려 확인해보자는 구차한 방법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임금과 중신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칙사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칙서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한동안 조정을 바짝 긴장하게 한 이 사건의 결말은 결국 어떠했을까.

칙사가 들어왔다. 주상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사를 영접했다. 돌아와서 인정전에 나아가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영접하여 다례(茶禮)를 행하고, 그들의 하인들을 불러 인정전 밖에서 술을 하사했다. 지난번에 칙서를 분실했다고 한 것은, 칙사가 가죽으로 만든 상자 속에 보관해두고 있다가 파주에 도착한 뒤에야 내놓았기 때문에 역관들이 잃어버렸다고 오인한 데서 생긴 일이었다.
〈영조실록 14년 2월 19일〉

칙서는 칙사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지만, 노심초사했을 임금과 중신들은 허탈함에 다리에 힘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몰래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고민할 일도 없었겠지만,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하는 조선의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칙사는 왜 평소와 달리 칙서를 상자에서 꺼내 본인이 직접 가지고 있었을까. 어쩌면 조선에서 미리 칙서를 훔쳐보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닐까. 이유야 어쨌든, 저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한 나라의 조정을 들쑤셔놓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며 시작된 이 사건은 약소국의 설움과 외교의 어려움을 잘 보여 주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신동아 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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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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