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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기자의 ‘사람 속으로’

팬택 박병엽 부회장이 넥타이 풀고 털어 놓은 야전 인생 44년

“돈보다 情, 甲보다 乙, 인재보다 사람”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팬택 박병엽 부회장이 넥타이 풀고 털어 놓은 야전 인생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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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도 없고 학벌도 없었다. 그래도 1등이 하고 싶었다. 스물아홉 살, 직장을 뛰쳐나와 14년을 하루같이 내달렸다. 이제 팬택계열은 매출 3조원, 세계 7위의 휴대전화 생산업체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책임감은 날로 커져만 간다. 회사를 키우고 직원들과 행복을 나누고, ‘없는 놈’도 열심히만 살면 대한민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라는 걸 어쩌면 그는 만인 앞에 제대로 증명해 뵈고 싶은가 보다.
팬택 박병엽 부회장이 넥타이 풀고 털어 놓은 야전 인생 44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유혹하는 자와 당하는 자. 진정한 유혹자는 타고난다. 물론 어떤 사회건, 매력도 재능도 없으면서 타인을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의 인간들은 존재한다. 가짜 유혹자는 얄팍한 권력과 싸구려 속임수로 상대를 능욕하다, 급기야는 제가 친 덫에 빠져 종종 자멸의 길을 걷는다.

반면 진정한 유혹자는 자신을 잘 안다. 명석하고 주도 면밀하다. 솔직하고 겸손하다. 고개 숙이고 있어도 빛이 난다. 그가 쓰는 유혹의 기술은 ‘아트(Art)’에 가깝다. 대상이 된 이들은 굴욕감은커녕 행복을 느낀다. 기꺼이 그의 사람이 돼 영욕을 함께한다. 유혹자는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활력과 열정을 선사한다.

위대한 유혹자는 종종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기업인이 된다. 바꿔 말해 위대한 기업인, 정치가, 지휘관은 위대한 유혹자다.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며 넘기 힘든 벽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타고난 유혹자’의 냄새가 나면 나는 못 견디게 싸움이 걸고 싶어진다.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그 또는 그녀는 붙어볼 만한 상대다.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직관, 외교술, 인간적 매력

팬택계열 박병엽 부회장(朴炳燁·43) 또한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는 빈한한 집안, 지방대 출신이란 어려움을 뚫고 거부(巨富)를 쌓아 고전적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1991년 종자돈 4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를 14년 만에 연 매출 3조원, 세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7위의 대기업으로 일궈냈다. 계층의 대물림이 대세가 된 지금, 그의 성공기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고 드라마틱하다.



박 부회장을 아는 이들은 그를 “무서울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평한다. ‘친화력’은 수많은 매체들이 반복·확대·재생산해온 ‘박병엽 신화’의 키워드다. 누구든 맘만 먹으면 곧 ‘형’ ‘동생’을 만들어버린다거나, 전문 경영인부터 핵심 기술인력까지 ‘인재 모시기’에 탁월하다거나, “나이와 경력이 일천한 만큼 ‘회장’ 아닌 ‘부회장’ 직함이면 족하다”는 자기 포지셔닝이나, ‘감성경영’이란 용어로 불리는 특유의 용병술까지. 그러나 ‘친화력’은 성공한 기업인을 묘사할 때 항용 동원되는 용어는 아니다. 이것이 그가 특별한 기업인으로 일컬어지는 두 번째 이유다.

로버트 그린은 저서 ‘유혹의 기술’에서 ‘유혹자의 9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강력한 친화력은 그중 ‘차머(The Charmer)’의 특징이다. ‘능란한 외교가형’으로 정의되는 차머의 예로는 독일 출신의 러시아 여제 에카테리나 2세, 중국 국공합작의 주역 저우언라이(周恩來), 빅토리아 여왕의 친구이자 정치적 파트너였던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 경 등이 있다. 이들은 거부할 수 없는 인간적 매력, 달릴 때와 멈출 때를 아는 천부적 직관, 탁월한 외교술과 위기관리 능력, 상대(개인 혹은 대중)의 아픔에 절절히 동참할 줄 아는 겸손하고 열린 자세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본 박 부회장은 ‘차머’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조직의 리더요 협상의 달인이었다.

사실 팬택계열만한 규모의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를 몇 시간씩 맞대면하고 앉아, 고교 시절 성적은 어땠고 사회에서의 평판은 어떻고 하는 식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업은 조직이다. CEO는 조직의 철저한 보호와 관리를 받는다. 홍보 담당자는 백이면 백, 서면 인터뷰니 ‘미리 보낸 질문지 외 내용은 언급 불가’니 하는 조건을 단다. 이는 CEO들이 직접 내린 지침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관리의 명수다. 약육강식의 비즈니스판에서 수만분의 일의 기회를 낚아챈 사람들이다. 쓸데없는 말이 나느니, 차라리 어떤 주목도 받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개 오너 경영인이다. 관행화한 시스템보다는 자신의 판단대로 회사를 이끌어간다. 일에서건 언변과 논리에 있어서건 분명한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잘 무장된 인터뷰어가 예기치 않은 도발을 해오면 당황하기보다는 강한 흥미를 느끼며 곧 게임에 돌입한다. 아울러 적절한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 발언)’ 활용으로 솔직함과 신중함을 과시한다. 박 부회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쪽 팔려서’ 못 맨 가죽가방

정력적인 인물로 알려진 그는, 그러나 첫 대면한 그날 몹시 지쳐 있었다. 낯빛은 어두웠고 신경은 날카로웠다. 직원 하나가 구치소에 있다 했다. 그도 그지만 가족들이 몹시 걱정된다고 했다. 연구인력 이직으로 인한 LG전자와의 해묵은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 그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편으로는 ‘동생’ 중 하나인 모 신문사 기자를 언급하며 임원에게 “해외 연수 간다고 전화 왔더만 걔가 뭘 알겠냐”며 “지사 통해 집 찾는 것 좀 도와주라”고 당부했다.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 받고, “나 사진 찍는 거 싫어한다”며 어색한 포즈를 취하는 사이사이 오고 간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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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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