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9월,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OJ 심슨 사건’ 재판정에 출두한 심슨(오른쪽)과 그 변호인단. ‘드림팀’ 변호인단은 인종차별을 재판의 쟁점으로 삼아 무죄평결을 이끌어냈다.
세컨드 샷에 나선 몬터규는 마침 코스 관리작업을 하고 있던 직원으로부터 삽을 빌려 핀에서 2m도 안 되는 지점에 갖다붙였다. 그런 다음 흙고르개를 집어들고 당구 흉내를 내어 버디를 잡아냄으로써, 파를 기록한 크로스비를 물리쳤다. 다음날 조간신문에는 ‘크로스비, 배트와 삽과 흙고르개에 참패’라는 제목의 기사가 사진까지 곁들여져 일제히 실렸다.
“그는 절대로 범죄자가 아니다”
이날 아침 뉴욕 주 웨스트코스 경찰서에서는 두 경찰관이 문제의 신문기사를 읽었다. 우연히 몬터규의 사진을 본 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내, 수배사진 속 인물과 너무나도 닮지 않았나?”
“꼭 닮았네그려. 당장 사건이 벌어진 에섹스카운티 경찰서에 알리세!”
전화를 받은 시카고의 카운티서 보안관은 오랫동안 추적해오던 강도살인미수범 레반 무어와 닮은 남자가 발견됐다는 소리에 크게 기뻐하며 바로 지문, 사진, 필적을 뉴욕으로 보냈다. 며칠 뒤 여느 때와 같이 크로스비 등과 함께 플레이를 한 몬터규는, 홀인원과 두 개의 이글을 잡아내어 66이라는 코스레코드를 작성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오자마자 수사관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레반 무어 맞죠?”
경찰의 질문에 그는 의외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악수를 청했다.
‘몬터규, 과거의 강도사건으로 체포되다!’라는 쇼킹한 뉴스가 보도된 후 한 달 사이에 최소한 66인의 저명한 영화배우, 감독, 작가가 주지사에게 몬터규 체포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빙 크로스비가 주선해준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몬터규는 1937년 8월20일 자발적으로 검사국에 출두했다. 그가 출두하는 도중 시카고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군중이 나와 성원을 보냈다. 할리우드의 대스타들이 매스컴에 나와 한입으로 “그는 절대로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변호함으로써 그를 ‘비극의 왕자’로 만들어준 셈이었다. 곧바로 진행된 범죄사실의 인부(認否)절차에서 그는 존 몬터규가 가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체포 이유에 대해서는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주부터 시작된 재판의 모두(冒頭)에서 검사는, 7년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의 전모를 아래와 같이 배심원들에게 설명했다.
1930년 8월5일 이른 아침, 조이에 있는 조그마한 잡화점에 4명의 무장강도가 들이닥쳤다. 가게주인 여자와 네 명의 자녀를 묶고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만든 뒤 가게에 있던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살던 아이들의 의붓아버지 매트코프가 묘한 기분으로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네 명 가운데 주모자 격인 레반 무어가 권총의 개머리판과 가죽곤봉으로 그를 가차 없이 두들겨 팬 뒤에 현금 800달러를 강탈했다. 일당은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달아났다.
피해자는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지만 그 후로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도주하던 두 대의 차 가운데 순찰차에 쫓기던 한 대가 뒤집어지면서 범인 가운데 존 셀리가 사망했고 윌리엄 마틴이 체포됐다. 두 사람은 캐나다로부터 술을 밀수입했다는 금주법 위반혐의 용의자로 수배 중이었다. 게다가 뒤집어진 차 안에서 레반 무어 명의의 운전면허증, 보스턴백, 그의 주소가 적힌 편지, 버팔로 야구팀에서의 그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신문기사 스크랩, 17개의 골프클럽 등이 발견됐다. 여기에 체포된 마틴의 진술이 덧붙여지면서 무어는 지명수배된 것이었다.
심리가 진행됨에 따라 수수께끼 같은 몬터규의 정체가 점차 밝혀지기 시작했다. 신문들은 관련기사를 매일같이 대서특필했다. 어떤 기자들은 용의자인 레반 무어의 성장과정을 취재해 흥미진진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