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호

경제사 통념 뒤집기

  • 정희용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소 이사

    입력2008-12-09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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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발도상국들에 권고되고 있는 이 같은 정책이나 제도가 선진국들이 과거 개발을 모색하고 있던 당시에 채택했던 정책이나 제도였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아주 피상적으로만 훑어보아도 이를 반증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정통적 견해에 상반되는 이러한 사례들을 고려할 때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성공 비결을 감추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경제사 통념 뒤집기

    <b>사다리 걷어차기</b><br>장하준 지음 부키<br>원제 : Kicking Away The Ladder

    지구촌을 휩쓴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가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유럽에서 처음 출간된 2002년 무렵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작은 정부, 규제 완화, 민영화, 자유무역 등 신자유주의가 앞세운 규범을 이론적으로 반박하기가 녹록하지 않았다.

    경제 제도와 정책을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혁신하지 않으면 세계화 추세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자본주의 경험이 오랜 유럽 국가들부터 막 자본주의에 편입된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까지 하나같이 그랬다.

    전통적인 진보 진영은 이러한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내수 경제 침체를 불러오며 후진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게임을 강요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소수의 견해로 치부됐다. ‘그래서 어쩔 거냐. 다소 문제점이 있다 한들 국제적 기준이 그러하고 선진국이 모두 그 같은 제도와 정책을 쓰고 있는데’라는 대세론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이러한 대세론에 근본적 의문을 던지며 등장했다.

    과연 선진국들이 지금 개발도상국들에 권고하는 정책과 제도를 통해 성장했을까. 이것은 매우 신선하고 도발적인 문제 제기였다. 저자는 이를 위해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추적한다. 지금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에도 현재의 제도와 정책을 썼는지,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선진국 따라잡기에 성공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커다란 효과를 거둔다. 통념과 달리 선진국은 발전 과정에서 요즘 그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내세우는 제도나 정책을 거의 채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관세와 보조금 등의 방법으로 자국의 유치산업을 보호했다. 때로는 사유재산권 침해까지 동반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으로 산업 육성 정책을 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의 발전 기틀을 잡은 것이다.



    ▼ Abstract

    ‘사다리 걷어차기’는 제도와 정책 중심으로 선진국의 경제 발전 역사를 다뤘다.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제1부에서는 개발도상국 시절 선진국들의 따라잡기 전략을 추적한다.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일본 및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이 분석 대상이다.

    예컨대 16세기 이전의 영국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기술을 수입하는 처지였다. 이에 헨리 7세, 엘리자베스 1세 등 튜더 왕조는 치밀한 보호 정책으로 영국의 모직 산업을 발전시킨다. 외국의 숙련 직물 기술자를 빼오고, 필요에 따라 양 원모의 관세를 인상하고 수출을 금지했다.

    또 높은 부가가치를 올리기 위해 부분 공정만 마친 모직물 수출을 금지하는 법규까지 제정했다. 18세기 영국 수출 소득의 반 이상을 차지한 모직업의 발전이 없었다면 영국의 산업혁명은 힘들었을 것이다. 흔히 영국을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가장 가까운 자유방임주의의 원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런 상식과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적극적인 정책을 통해 선진국이 된 나라는 이제 후발국의 추적을 따돌리고 격차를 벌리기 위한 정책에 부심한다. 이 책 제목이 의미하는 그대로 ‘사다리 걷어차기’ 단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자신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를 후발 및 경쟁 국가들에는 결코 허락하지 않으려는 주도면밀한 정책이 경제사 곳곳에서 확인된다.

    경제사 통념 뒤집기

    11년 전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를 뒤흔들었다. 1997년 12월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운데)가 IMF와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됐음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이경식 당시 한국은행 총재, 오른쪽은 미셸 캉드쉬 IMF 총재.

    2부는 이러한 과정으로 굳어진 상식과 역사의 괴리를 좇는 내용을 담았다. 오늘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제반 제도를 하나하나 분석했다. 민주주의 제도, 관료제와 사법권, 기업 지배 구조, 지적재산권, 금융, 사회 복지 등의 역사를 살피면서, 선진국도 시행착오를 거쳐 이런 제도를 정착시켰다는 사실을 밝힌다. 선진국은 국제기구와 통상의 이름으로 개발도상국에 제도 변경을 요구한다. 저자는 그 요구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선진국 중심적인지를 묻는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당시 불과 몇 년 사이에 장구한 시간을 거쳐 축적된 제도를 일거에 강요당한 경험이 있다. 오죽하면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가 이 당시의 화두였겠는가.

    3부에서는 책 첫머리에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와 역사적 고찰의 결론을 담았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유행하는 제도와 경제 발전의 관계를 다룬 주요 담론에는 후발국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요소가 내포돼 있다. 이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 1960~1980년 개발도상국의 1인당 평균 성장률은 연 3%수준이었지만, 선진국이 말하는 바람직한 정책이 활용된 1980~1999년에는 오히려 연 1.5% 수준으로 성장률이 감소했다.

    ▼ About the author

    ‘사다리 걷어차기’의 저자 장하준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 뮈르달 상을 받은 데 이어 2005년 레온티에프 상(Leontief Prize)을 거머쥐었다. 이렇듯 세계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국내 대학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우리 대학의 고질적인 병폐와, 저자의 전공 분야인 개발경제학이 신고전학파가 득세하는 우리 학계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분야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책이 유럽에서 ‘Kicking Away The Ladder’로 먼저 출간되고, 2년 뒤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 이후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 조정’(장진호 옮김, 창작과비평사), ‘쾌도난마 한국 경제’(장하준·정승일 지음, 부키) 등의 책을 냈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한국 경제론을 개진하면서, 신자유주의에 기초해 점점 우측으로 기울기 시작한 한국의 경제 정책에 뼈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Impact of the book

    이 책은 선진국의 성장 신화 속에 숨겨진 은밀한 역사를 들춰냈다.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설교’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훌륭하게 입증함으로써 2003년 11월 저자는 이 책으로 뮈르달 상을 받았다. 뮈르달 상은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1898~1987)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 신고전학파적 접근 방식에 대안이 되는 연구 결과 중 매년 가장 뛰어난 작품에 주어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추종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고했다. 신자유주의의 폐단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지금 이런 지적은 국내 학계와 시민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 Impression of the book

    노무현 정부는 아쉽게도 저자의 충고를 제대로 고민하지 않았다. 이로써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을 통한 금융화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신자유주의, 영미식 자본주의로 한국 경제는 줄달음쳤다. 이런 경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결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최근 한국 경제는 전세계적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몇 년 전 장하준 교수의 경고가 일정 부분이라도 정부 정책에 반영되었다면 오늘의 위기는 덜했을지 모른다.

    ‘사다리 걷어차기’는 자유시장론의 원조인 애덤 스미스와 적극적인 개입주의를 취한 리스트의 중간에서 양비론을 펼치지 않는다. 처음부터 리스트의 손을 번쩍 들어주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무역, 재산권의 적극적 보호, 작은 정부 등 신자유주의적 제도와 정책이 경제 발전에 어떤 긍정적인 기능을 했느냐는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친화적인 독자는 이런 점이 불만일 수 있으나 이 책은 워싱턴 컨센서스류의 통념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책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한 쪽에 치우친 주장이 아닌 과감함으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용어해설 | 워싱턴 컨센서스

    미국식 시장경제 확산 전략?


    1990년을 전후로 등장한 미국의 경제체제 확산 전략이다. 국가적 위기 발생을 제3세계 구조조정의 전제로 삼아 미국식 시장경제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을 꾀하는 것으로, 1990년대 미 행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이 모여있는 워싱턴에서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 이뤄진 합의다.

    미국 정치경제학자인 존 윌리엄슨이 1989년 자신의 저서에서 제시한 남미 등 개발도상국에 대한 개혁 처방을 ‘워싱턴 컨센서스’로 명명한 데서 유래했다. 개발도상국과 제3세계 국가들이 시행해야 할 구조조정 조치들을 담고 있는데, 정부 예산 삭감,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기간산업 민영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Tips for further study

    경제사 통념 뒤집기
    이 책은 사회·경제 제도와 경제 발전의 관계를 역사를 통해 살핀 일종의 경제사를 담았다. 반면 저자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순희 옮김, 부키·사진)과 ‘쾌도난마 한국 경제’(장하준·정승일 지음, 부키)는 오늘의 문제를 진단한다. 두 책은 모두 21세기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대중적 글쓰기의 미덕을 갖춰서 경제학 서적을 기피하는 이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읽힌다.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경제학적 공과에 대한 분석을 더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국가의 역할’(황해선 옮김, 부키)을 추천한다. 논문에 가까운 구성이라 위의 책보다는 딱딱하다. 다소 시니컬하게 “그래,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현실이 못마땅하다면 너의 대안이 뭐지”라고 묻는 독자라면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부키)가 준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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