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로 방문자 수 ‘다음’ 이겼지만 비전 없어 곤두박질
- 매입 대금 못받았는데 3년 만에 부과된 세금 24억 원
- 정현철 씨(아이러브스쿨 지분 매입자) 9년 만에 귀국했지만 여전히 ‘기소 중지’
- 대부분 벤처 1세대 창업 사이트에서 쫓겨나거나 재기 못해
- “아이러브스쿨 성공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것”
- “2001년 이후 헤게모니 잡는 아이디어 없다, 한국은 인터넷 소국”
최근 11년간, 그의 인생은 끝을 모르고 곤두박질쳤다. 사기, 신용불량, 세금연체, 연이은 사업 실패, 이혼, 그리고 건강 악화까지. 3월 2일 서울 구로구 한 법률사무소에서 만난 김 씨는 “호접몽(胡蝶夢)이라는 말 아세요?”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제가 꿈을 꾼 건지, 시대가 꿈을 꾼 건지 모르겠습니다. 목표 없이 시작한 사업이 갑자기 커버리고 그 뒤만 쫓아다니다보니 결국 저는 20억대 채무자가 돼버렸어요. 그 모든 일이 아득하고 부질없게 느껴져요.”
1999년 가을, 김 씨는 카이스트 경영정보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그때 형용준, 정태석 씨 등 연구실 옆자리 친구들이 벤처 ‘싸이월드’를 만들었다. 김 씨는 ‘사람을 모으려면 학연이 최고인데…’ 생각하다, ‘그렇다면 내가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다. 당시 같은 연구실에 있던 이충석, 최병구 씨와 함께 50만 원씩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최 씨는 가족의 반대로 사업에서 발을 뺐고 이후 창업 과정에서 삼성전자 출신 임준규, 성기범 씨가 합류했다.
“사람 모으려면 학연이 낫다” 가볍게 시작
회원이 점차 늘어가자 서버 확충이 시급했다. KTB와 금양에서 투자 의향을 밝혔다. 당시 아이러브스쿨 회원은 1만 명. 김 씨는 두 회사에 “10억 투자하면 지분 40%를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금양의 투자를 받았다. 금양은 발포제 및 관련 제품을 주로 만드는 화학공업업체로 1955년 부산에 설립된 중소기업이다.
아이러브스쿨은 ‘친구 찾기 열풍’을 선도하며 회원 수가 급격히 늘어갔다. 2000년 5월 25만 명을 돌파했다. 이후 한 달에 100만 명꼴로 회원 수가 늘었고 금세 회원 수 500만 명을 넘어섰다. 2000년 10월에는 세계 인터넷 사이트 방문자 순위를 매기는 ‘알렉사’ 사이트에서 한국 2위(1위는 야후코리아)까지 올랐다. 토종 한국 사이트로서는 늘 1위였던 ‘다음’이 처음으로 1위 자리를 빼앗긴 것.
야후코리아가 아이러브스쿨을 500억 원에 인수하려 했고, 초기에는 추가 투자를 거절했던 금양도 “500억 원에 인수하고, 경영권까지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지분 40%를 가진 금양 측의 거절로 야후코리아 인수는 실패했고, 창업주들은 금양에 회사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2000년 9월 창업주 4명은 당시 금양 대표이사 정현철 씨와 계약을 맺었다. 아이러브스쿨에 대한 금양의 지분을 51%로 늘려 경영권을 확보한 뒤, 정 씨는 창업주들의 보유 주식을 개인적으로 매수하겠다고 밝혔다. 정 씨는 창업주 4명의 지분 32%를 개인적으로 매수했고, 매수대금 약 160억 원은 2001년 1월과 3월에 지급하겠다고 했다. 지급 기일이 됐지만 정 씨는 “시장 상황이 어렵다”며 지급 기한을 1년 늦춰줄 것을 요청했다.
2001년 11월 1일 정 씨는 본인 및 금양 보유 아이러브스쿨 지분 전량을 서울이동통신에 매각하고 그날 오후 홍콩으로 몰래 출국했다. 김 씨를 제외한 창업주 3명은 담보로 받아놓은 금양 측 어음 덕분에 50억 원을 변제받았지만, 김 씨는 담보 없이 계약서 한 장 달랑 가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당시 사업 경험이 없어 어수룩했고 ‘사업에서 빨리 손 털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코스닥 상장사 사장이자 대주주인 정 씨가 설마 내 돈을 안 갚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선 지급받은 20억 원을 제외하고 매매대금 73억 원과 정 씨에게 빌려준 10억 원, 총 83억 원을 떼이게 됐다. 민·형사상 소송을 했지만 정 씨는 이미 행방불명 상태. 형사 소송은 기소중지됐다. 서울중앙지법은 2008년 민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고 정 씨가 김 씨에게 원금 100억 원과 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3년 만에 부과된 세금 24억 원
아이러브스쿨을 떠난 김 씨는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집으로 들어갔다.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후회할 일을 안 하려면 아무것도 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이는 두 살과 네 살. 직장인 아내 대신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다. 일은 없었지만 배짱은 두둑했다. 선 지급받은 20억 원 덕분이었다. 그 돈으로 10억 원대 아파트를 구입했고, 5억 원은 직원들에게 분배했으며 남은 5억 원으로 부모님과 자신의 차를 바꿨다. 그러고도 현금이 남아 있었다. “조만간 현금 80억 원이 더 들어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정 씨의 도주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더 큰 문제는 3년 후 발생했다. 2004년 세금부과 예비통지서가 날아왔다. 김 씨가 정 씨에게 주식을 양도했기 때문에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것. 김 씨는 돈을 못 받았기 때문에 세금을 낼 수도 없고 낼 필요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자문한 변호사 역시 “세금은 실질과세원칙이 있기 때문에 대금을 못 받았으면 세금을 안 내도 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국세청에서는 기존 세금 9억 원에 미신고가산세(50%), 연이율(25%) 등을 붙여 24억 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 국세청에 소명자료를 냈나요?
“네, 그런데 국세청에서는 ‘제가 받을 돈을 못 받았을 뿐이지 명의를 넘긴 건 확실하기 때문에 세금 관계에서 채권 채무관계는 유효하다’며 세금을 내라고 하더라고요.”
아이러브스쿨 사이트.
“사실 정 씨가 도망친 이후에도 ‘어쩌면 돈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 씨와 쓴 계약서에 ‘계약이 파기될 경우 주식을 돌려받는다’는 조항이 있어요. 주식을 돌려받으면 세금을 안 내도 되니까.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으니 그냥 기다린 거죠.”
▼ 2001년 주식거래 직후 국세청에 자진신고를 했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당시만 해도 세금 9억 원을 낼 여력이 있었을 텐데요?
“네, 당시 세금을 내려면 낼 수 있었어요. 제가 사고 나서 집값이 폭락했지만 모든 재산을 긁어모으면 9억 원을 만들 수 있었죠. 근데 그럼 우리 가족은 당장 갈 곳이 없잖아요. 아비로서 그건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죠.”
2004년 국세청의 통보를 받고 그는 다시 변호사를 찾았다. 그때 변호사들은 “왜 세금을 안 냈느냐, 지금이라도 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미 24억 원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 생각한 방법은 위장이혼이었다.
“집, 차, 주식, 상가 등 당시 재산 모두 잃을 순 없잖아요. 일단 아내와 서류상 이혼을 하고 제 재산 모두를 아내에게 위자료로 줬어요. 원래 집은 아내 명의였고요. 근데 제가 어수룩했던 게 세금 부과 이후 위자료를 준 것에 대해 국세청에서 저를 사해행위로 고소했어요.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목적으로 위자료를 줬다’면서요. 결국 아내에게 넘긴 상가, 주식 등이 다 국세청에 압류됐는데 그게 총 4억5000만원 정도 됩니다.”
그는 아내와 두 아이를 뉴질랜드로 보냈다. “1년 반만 있다 와라. 꼭 성공해서 빚 다 갚아놓겠다”고 단언했다. 2005년 ‘아이티아’라는 벤처회사를 세웠다. 아파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공동구매 사이트였다. 그의 돈 3억 원과 투자 목적으로 끌어 모은 돈 2억5000만 원을 투자했다. 그는 “그래도 아이러브스쿨 창업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내가 사업을 재개한다면 사람들이 쳐다는 봐줄 줄 알았다”고 말했다. 현실은 냉혹했다. 끝내 추가 투자는 받지 못했다.
“4년 만에 시장에 나오니까 투자가 안 되는 거예요. ‘누가 요즘 인터넷 투자합니까’하고 오히려 반문하더군요. 결국 사업은 실패하고 아이들과 아내는 돌아왔어요. 8개월 남짓 가족과 함께 살다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아내와 자식들, 다 같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미 서류상 이혼한 상태니 별도의 절차도 없었습니다. 아이들과는 2년째 연락을 안 하고 있어요.”
더는 살 이유가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그에게, 한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보다 네 살 연하의, 아이티아 동업자였다.
“그 사람, 처음에는 사업을 포기 안 했어요. 투자를 못 받는데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니 나 혼자라도 해보겠다’며 뛰어다니더라고요. 나중엔 저를 포기 안 하더군요. 제가 인간답게 살 때까지 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요. 자기도 사업 실패로 모든 걸 잃었으면서 ‘희망을 잃지 말라’고 끊임없이 저를 살렸어요. 만약 그때 그녀가 없었다면 전 정말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2007년 두 사람은 살림을 합쳤다. 김 씨가 신용불량자이기 때문에 혼인신고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아이의 아비로서 역할을 못했다”는 죄책감에 아이도 낳지 않기로 했다. 이후 번역, 광고 중개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2008년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지만 또다시 실패. 2011년 한국에 돌아온 김 씨가 평형기관 이상으로 쓰러졌을 때 아내는 김 씨 곁을 늘 지켰다.
요즘 김 씨는 아내와 휴대전화 한 대를 나눠 쓴다. 아내와 24시간 붙어 있기 때문에 전화를 따로 가질 필요가 없다. 김 씨는 인터뷰 바로 전 주에 아내와 3박4일 강원도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회는 비싸서 고민 끝에 3만 원짜리 문어 한 마리 사 먹고, 호텔도 아닌 민박집에서 묵었다. 아내 이야기를 하는 김 씨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2년 전 정 씨 돌아왔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벤처 육성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당시 정부 지원에 힘입어 2000년 전후로 ‘벤처 광풍’이 불었다.
성공한 IT CEO에서 사업에 실패한 낭인으로.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건 금양의 사장이던 정 씨다. 정 씨는 2010년 11월 마침내 도주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귀국 직후 4박5일간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되지 않았다. 기자는 정 씨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김 씨 역시 정 씨의 현황을 몰랐다. “정 씨를 원망하는가?”라고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전 제 실패가 단순히 정 씨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도화선이 된 건 맞지만, 당시 사회 환경이 그랬고 저도 무지했습니다. 박수를 한 손으로 칠 수 없듯 당시 모든 환경이 맞아떨어져서 그런 거죠. 정 씨 개인적으로도 저한테는 ‘인생을 망친 나쁜 놈’이지만 자기 가족에게는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겠죠. 그 사람 나름으로는 2001년 해외로 도주하고 2010년 감옥 안 가는 게 최선이었겠죠.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지켰으니 그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 아닙니까?”
김 씨는 “다만 2010년 정 씨 귀국 이후 사법처리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 씨가 귀국했지만 여전히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담당 검사가 바뀌고 현재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담당 서성호 검사)에서 수사 중이지만 김 씨는 “1년 반 동안 검찰에서 ‘수사 중입니다. 사건이 오래돼 판단 내리기 쉽지 않습니다’라는 답변만 듣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정 씨가 부정하게 외국으로 도망쳤고 9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전 이미 2008년 민사소송에서 승소했고 그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데 현재까지 아무 결론이 없습니다. 저는 정 씨만 돌아오면 합의가 되거나 정 씨가 형사적으로 처벌을 받아 제게 부과된 세금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근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데 그중 하나가 검사장, 지검장 등 고위 사법관을 선출직으로 바꿔야 한다는 캠페인이다.
“현재 판·검사 인사권을 쥔 사람은 소수의 권력자입니다. 자기 목줄 잡고 있는 사람들이니 결국 권력자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죠. 그런 판·검사장을 국민이 뽑으면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겠습니까?”
“그릇에 물이 넘치니 그릇이 깨졌다”
아무리 벤처 광풍이었다지만 어떻게 아이러브스쿨은 출시 1년도 안 돼 회원 500만 명을 모을 수 있었을까? 김 씨는 냉정한 얼굴로 “아이러브스쿨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명확한 계획이 없었어요. 당시 박사과정 1년 차였는데 부모님은 제가 졸업하면 당연히 교수가 될 줄 아셨지만 현실은 쉽지 않잖아요. 그때 창업이 돌파구로 보였어요. 단순히 ‘인터넷에서 사람을 모으면 광고가 붙고, 그러면 돈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뿐이었죠. 사업에 목표가 없었어요. 그냥 돈 많이 버는 게 목표였죠.”
‘얼떨결에’ 만든 사이트가 대박을 치니 신이 났다. 수많은 언론에서 취재를 요청했다. 돈이 쏟아졌고 모두가 부러워했다. 김 씨는 “당시 언론에서 취재를 오면 마치 연예인이 된 것처럼 능숙하게 포즈 취하고 허세를 떨며 이야기했다”고 회상했다.
“2000년에 한 달 생활비가 2000만 원이 넘었어요. 1주일에 3번 이상 술 먹는데 무조건 룸살롱 가고, 무조건 현금으로 계산하고요. 2000년 1년 동안 술값으로 쓴 돈만 1억은 넘을 거예요. 옷도 늘 알마니 같은 명품 브랜드에서 맞춤 양복으로 입었죠. 당시 총선 때 ‘비례대표 주겠다’는 정당도 있었어요. 구름 위를 붕 떠다녔죠.”
그는 가장 큰 실패 원인으로 “실패만 대비한 채 성공을 대비하지 못한 것”이라고 자탄했다.
“저는 늘 실패만 대비했어요. ‘여기서 실패하면 학교로 돌아가야지. 이 서비스 실패하면 다음엔 뭘 해야지.’ 그런데 잘 되면 어떻게 할 건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막연히 ‘잘되면 좋은 거 아닌가’ 하고 넘어갔죠. 그런데 그때 배웠어요. 컵에 물이 너무 많이 담기면 그냥 물이 넘칠 것 같은데, 사람의 경우는 컵이 깨져버리더라고요. 제 그릇이 담을 수 없는 압박이 오니까 저라는 인간이 그냥 깨져버렸어요. 다시 ‘인간 김영삼’을 정립하는 데만 3년 이상 걸린 것 같아요.”
▼ 회원 수가 많으니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아뇨, 그냥 아이러브스쿨의 인기를 좇아가기만도 바빴어요. 회원 수에 걸맞은 서버를 확충하려면 돈을 투자받아야하니까 돈 받으러 쫓아다니다 그냥 끝나버렸어요. 회원들은 점차 ‘아이러브스쿨 너무 느리다’ ‘리뉴얼이 부족하다’ 불평하면서 결국 싸이월드, 프리첼 같은 사이트로 옮겨갔어요. 불안했죠.”
투자받은 돈이 있으니, 수익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도 거셌다.
“처음부터 비전이나 수익에 대한 고민 없이 막연하게 시작한 사업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회원 가입 때부터 구체적인 학교, 회사를 기입하게 해 ‘우리 회사에서 동문 찾기’ 서비스를 유료로 제공했으면 엄청난 돈을 벌었을 텐데 초기에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아쉽죠.”
대기업 “50억에 넘겨라”
당시 IMF 외환위기 이후 침체돼 있던 경제에 벤처는 새로운 활력소였다. 수많은 ‘눈먼 돈’이 흘러들었고 선진화된 미국식 금융기법이 도입됐다. 김 씨는 당시 정부, 기업의 대처가 ‘지속 가능한 벤처’를 키우기에는 걸맞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2000년 초 아이러브스쿨이 점차 인기를 끌어가자 삼성, 효성, LG 등 대기업에서 ‘아이러브스쿨을 50억 원에 인수하겠다’고 제시했다”고 말했다.
“당시 야후코리아에서는 아이러브스쿨에 인수대금으로 300억 원, 후에는 500억 원을 제의했어요. 국내 기업들은 인터넷 사업에 투자할 때도 기존 대주주와 지분 싸움에서 이길 정도로만 지분을 확보해요. 회사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인수 뒤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지에 대한 비전은 없죠.”
“이들이 마음 놓고 거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눈을 가려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애꿎은 창업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벤처 성장의 열매는 누리지 못했죠.”
“이젠 인터넷 강국 아닌 소국”
야인(野人)으로 돌아간 김 씨는 요즘 인터넷 산업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 김 씨가 아이러브스쿨 경영권을 내놓은 2001년부터 ‘벤처 거품론’이 일어났다. 넘쳐났던 벤처 투자가 싹 사라졌고 수많은 벤처가 도산했다. 최근 모바일 열풍을 타고 ‘벤처 르네상스’가 왔다고 하지만 그 투자 규모는 전성기 때의 절반도 안 된다. 김 씨는 “벤처 광풍은 사실이나 그 덕에 인터넷 산업이 큰 것을 부정할 수 있나? 급속한 성장 뒤에는 다 후유증이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만한 광풍 없이 어떻게 전국에 광통신망이 다 깔릴 정도로 인프라가 좋아졌겠습니까? 광풍이 불었다면 그 결과를 이용해서 인터넷 산업을 더 키워야 하는데 이후 정부는 인터넷 산업 키우는 데 충분한 투자를 안 했습니다. 2000년, 2001년만 해도 해외에 없는 우리만의 아이디어가 많았습니다. 아이러브스쿨과 싸이월드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 SNS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한국에서 세계 인터넷 산업을 이끌 수 있는 아이디어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보다는 해외에서 성공한 모델을 가져와서 베끼는 수준이지 헤게모니를 바꿀 서비스는 못 만들고 있습니다. 투자가 안 되고 인재를 못 키우기 때문입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누가 그런 말 합니까? 이젠 ‘인터넷 소국’이고 ‘후진국’입니다.”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동문 찾기 붐이 일었다.
“NHN이 2004년 중국에 진출하면서 ‘한국 인터넷 산업은 성장 단계에서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NHN 매출은 3000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한 ‘산업’의 ‘리딩 컴퍼니’가 고작 매출이 3000억 원이면서 ‘성숙’을 논하는 게 말이 되나요? 1위 업체면 1위 업체답게 산업을 키우기 위해 책임감을 가져야죠. 최근 NHN과 다음, 네이트 등 인터넷 산업을 이끄는 회사들 행태를 보면 삼성, LG 등 기성 대기업과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서비스가 있으면 헐값에 인수하고, 독과점하고….”
“투자하면 무조건 회수해야 한다”는 식의 벤처 투자문화도 벤처 산업 부활에 찬물을 끼얹는 요소다. 김 씨는 “그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고 잘라 말했다.
“페이스북의 경우 2005년 미국의 2개 학교, 영국의 2개 학교 총 4개 학교에서 서비스가 진행되던 당시에도 4000억 달러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가능성만 보고 투자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수익성이 없으면 투자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한국형 마크 주커버그를 찾는 건 어불성설이죠.”
김 씨는 “페이스북, 유튜브 등 현재 인터넷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서비스 대부분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아이폰이다. 한국이 최초의 모바일 인터넷 폰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
“2000년에 우리나라도 아이폰처럼 모바일을 이용한 ‘웹 휴대폰’을 만들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SK, LG, KT 등 통신사업자들이 통신사 간 경계를 풀어주지 않았어요. 만약 내가 A통신사 가입자면 무조건 모바일에서 A통신사 사이트를 통해 다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게 한 거예요. 통신비용도 과도하게 부과하고요. 그래선 모바일 인터넷을 사용 안 하죠. 통신사 횡포고 독과점인데 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제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때 통신사 경계망이 풀렸으면 우리나라에서 아이폰을 먼저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2007년 미국에서 아이폰, 아이패드가 출시되자 한국 오피니언 리더 사이에서 ‘애플 열풍’이 불었어요. 마치 페이스북 하고 아이패드 쓰는 게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특권인 것처럼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아이패드를 못 만들었나?’ 하며 울분을 토해야 할 사람들이 그냥 애플에 빠져 있는 거예요. 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조선의 관료들이 생각나더군요.”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인터넷 시장에서 강점이 있다. 2011년 7월 기준 한국의 초고속 무선 인터넷 보급률은 89.8%.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높다. 일본은 76.7%, 미국은 53.5%에 불과하다. 김 씨는 “향후 세계적으로 무선 인터넷 보급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서 어떤 서비스가 성공할 수 있을지 지금 우리나라에서 실험해보는 게 가장 좋다”며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국을 다시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어놔야 한다”고 말했다.
세 번의 인터넷 사업과 실패. 하지만 김 씨는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새로 구상하는 인터넷 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많아요. 그런데 아이러브스쿨 실패 이후, 뭐든지 논문을 쓸 정도로 공부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아요. 그리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라는 흔한 말을, 이제는 정말 가슴으로 이해합니다. 2001년 이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지만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남은 생도 후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어요. 이제 20억 원의 미납 세금, 신용불량자라는 꼬리표 모든 게 다 제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암 덩어리를 안고 꾸역꾸역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답이 나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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