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시아나그룹을 창립한 고(故) 박인천 창업주는 슬하에 5남3녀를 뒀다. 박세창 부사장의 아버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3남,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4남이다. 금호가의 3세 중 아들은 장손 박재영 씨(46·박인천 창업주의 장남인 故 박성용 2대 회장의 맏아들)와 박 부사장, 38세 동갑인 박철완(차남 박정구 3대 회장의 아들)·박준경(4남 박찬구 회장의 아들) 금호석유화학 상무다.
장손 박재영 씨가 2009년 금호 계열사 지분을 모두 팔고 미국으로 건너가 박 부사장은 그룹 3세의 맏형이 됐다. 부친 박삼구 회장이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만큼 재계 서열 25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유력 후계자이기도 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한때 두산그룹처럼 박삼구·찬구 회장의 ‘형제 경영’이 이뤄졌지만, 인수합병을 둘러싼 갈등으로 현재는 금호아시아나(금호산업, 금호타이어, 아시아나항공)와 금호석유화학으로 ‘사실상’ 계열분리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그룹은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박세창 부사장에게 지난 5년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룹 전략경영본부에서 2010년 워크아웃에 돌입한 금호타이어의 영업본부장(상무)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회사를 살려내야 하는 지상명령을 실천할 구심점이 돼야 했다.
비싼 수업료
2009년 12월 채권단 관리를 선언하고 이듬해 금호타이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개시 결정이 내려졌지만, 채권단을 설득하지 못하면 워크아웃은 물 건너 갈 수도 있던 상황. 회사를 어떻게 살릴지를 설명하면서 그는 “할아버지의 피와 땀이 서린 금호타이어를 반드시 살려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당시 제시한 조건은 ‘90% 원금보장, 10% 출자전환’. 보기 드문 ‘원금보장’ 약속과 “목숨 걸고 살려내겠다”는 36세 청년의 진정성에 채권단은 “일단 믿어보자”며 도장을 찍었다. 박 부사장은 2010년 워크아웃에 돌입하던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채권단은 ‘우리도 이만큼 희생할 테니 너희는 경영으로 보답하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할 수밖에 없었다. 채권단 분들도 고생 많으셨지만, 돌이켜 보면 워크아웃 졸업을 위해 우린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금호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6조6000억 원)과 2008년 대한통운(4조1040억 원)을 인수하며 한때 재계 7위(자산규모 24조3000억 원)로 뛰어올랐지만, 인수금융과 대우건설 풋백옵션에 발목이 잡혔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유동성 위기이자, 인수합병(M·A) 주도 기업에 종종 따라붙는 이른바 ‘승자의 저주’였다. 결국 2009년 12월 경영정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는 워크아웃에 돌입했고,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은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유동성 위기를 부른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은 다시 매각됐다.
채권단의 동의를 받은 만큼 박 부사장뿐 아니라 모든 임직원은 신발끈을 동여매야 했다. 2009년 당시 회사는 매출액 1조8900억 원, 영업이익 -2135억 원, 당기순이익 -7762억 원, 부채비율이 3636%였다. 워크아웃 시기도 정해져 있어 전력투구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회사의 역량을 모두 투입하는 ‘공격 경영’ 속에, 박 부사장은 먼저 영업 대리점주의 어려움과 요청 사항을 직접 듣고 문제를 푸는 ‘현장 스킨십’을 통해 ‘무조건’ 매출과 영업이익을 끌어올려야 했다.
격납고 PT, 경기장 PT
그는 2011년 특화유통점 ‘타이어 프로’를 앞세워 전국을 돌면서 대리점 정책 설명회를 열었고, 2012년에는 국내외를 총괄하는 영업부사장이 돼 북미, 유럽, 중국 등 국내외 업무를 직접 챙겼다. 당시만 해도 신제품 설명회 프레젠테이션(PT)은 연구소나 제품 관련 부서가 주로 맡았지만, 박 부사장은 신제품이 나오면 직접 PT에 나서 업계의 관심을 끌었다. 재계 관계자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박 부사장이 직접 PT를 한 것은 오너 일가가 신제품의 품질을 책임진다는 의미도 있었고, 임직원의 본보기가 되는 효과도 있었다. 2012년 신제품 PT는 인천국제공항 격납고에서 했는데, 젊은 나이(38세)에 부담이 컸을 텐데도 진지하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PT를 했다. 그때는 허리띠 졸라매고 워크아웃 졸업하려고 애쓰던 때라 신제품 출시로 영업이익 수직 상승을 고대했다. 직원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응원한 기억이 난다.”
그해 설명회장에서 박 부사장은 신제품 ‘에코윙 S’를 소개한 뒤 “금호타이어 품질은 최고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며 ‘최고품질’ 선언을 한다.
2013년 금호타이어 신제품 설명회에서 박세창 부사장이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안으로는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박 부사장은 그해에 ‘혁신활동’ 깃발을 들어 올렸다. 원가혁신, 영업혁신 등 개선을 넘어 새로운 발상으로 혁신을 하자는 운동이었다. 에너지 절약, 경량화 상품 개발, 저원가 제품 개발 등 범위도 전방위적이었다. 그가 나서서 외부 자문을 구하거나 전문 업체를 소개했는데, 금호타이어의 이 같은 혁신활동은 2013년 한국, 2014년 중국, 2015년 베트남 공장 등으로 확대 적용되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함께한 금호타이어 임원의 회고는 이렇다.
“혁신활동 성과보고회와 성과 포상은 박 부사장이 직접 챙겼다. 국내외 사업장을 찾아 직원을 격려하고 식사 자리를 마련하면서 전반적인 원가 요소를 낮추는 혁신활동을 장려했다. 그 때 알았지만, 박 부사장은 기억력이 뛰어나더라. 보고를 하면 자신의 태블릿PC를 꺼내 2년 전 자료를 찾아내고는 비교하더라. 즉흥적 판단은 없었고, 혼자 생각하다가도 모르는 게 있으면 직원을 불러 하나씩 물어봤다. 무척 꼼꼼하고 치밀한 업무 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던가. 박 부사장은 “반드시 살려내겠다”고 한 채권단과의 약속을 5년 만에 지켰다. 지난해 12월 ‘자체 신용으로 정상적 자금조달’ ‘주요 경영목표 2년 연속 달성’ ‘부채비율 200% 이하’ 등 채권단이 제시한 대부분을 충족시키면서 워크아웃을 졸업한 것이다. 2009년 말 3636%이던 부채비율은 2014년 말 141%(본사 기준)로 대폭 감소했고, 자기자본비율도 2009년 2.7%에서 41.4%로 뛰어올랐다. 매출은 3조4365억 원, 영업이익은 3585억 원(영업이익률 10.4%)을 기록했다. 그러나 박 부사장은 “기쁨은 컸어도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기에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룹 명운이 걸린 해
“워크아웃은 졸업했지만, 실제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어서 ‘보람 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었다. 나는 2005년부터 그룹의 황금기와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담금질당했다. 우스갯소리로 수업료 많이 내고 많은 걸 배운 건 보람 있었다. 임직원이 일치단결했고, 직원이 고생하는 걸 곁에서 지켜봤다. 솔직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도 컸다.”
그는 지난해부터 금호타이어 기획·관리 총괄(부사장)로서 해외 투자 사업도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뜻밖의 일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지난 4월 박 부사장은 이한섭 영업총괄 부사장과 함께 금호타이어 대표이사로 선임됐지만, 주주협의회가 ‘사전 협의’라는 절차상 문제를 제기하면서 3일 만에 사임했다. 상당수 언론매체는 “오너 3세의 경영 참여가 차질을 빚게 됐다”고 분석했지만, 박 부사장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단순 실수였다. 지금 회사는 사느냐 죽느냐의 순간이다. 경영권 승계를 논할 때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처럼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올해가 그룹 명운이 걸린 해이기도 하다. 그룹 핵심인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 지분 30.08%를 가진 최대주주인 만큼 금호산업의 경영권 지분 향방에 따라 아시아나항공과 10여 곳의 자회사가 영향을 받는다. 5월 7일 금호산업 채권금융기관 운영위원회가 박삼구 회장과 수의계약 형태로 금호산업을 매각하는 안건을 상정하면서 한숨 돌렸지만, 박 부사장은 아버지와 함께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회사를 되찾아야 한다. 자금 마련 등 풀어야 할 숙제도 많고, 그룹의 모기업인 금호고속 재인수에도 나서야 한다.
따라서 그에겐 또 다른 ‘담금질’이 기다리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아버지와 함께 박 부사장 특유의 ‘겸손하고 소탈한 리더십’으로 문제를 풀어갈 것”이라고 예상한다.
“박 부사장은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깍듯이 인사하고, 직원들에게도 항상 높임말을 쓴다. 사무실도 직원이 근무하는 공간 옆에 조그맣게 마련돼 있다. 201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신제품 설명회를 마치고 귀국할 때는 혼자 백팩을 메고 이코노미석에 앉아 왔다.”
그에 따르면, 박 부사장은 당시 행사에 참석한 대리점주를 일일이 찾아 “대리점 사장님들은 회사가 어려울 때 함께해줬고, 우리 제품을 팔아주는 고마운 분들”이라며 인사했고, 행사를 준비한 실무진에게는 “신제품 행사장에서 내가 주목받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겸손과 소탈함을 앞세운 스킨십 경영은 박 부사장의 강력한 전략무기라 할 수 있다.
“‘하라면 해’ 시대는 지났다”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는 금호가의 혼사 관례와 달리, 중학교 동창생인 아내 김현정 씨와 7년 연애 끝에 결혼한 것도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는 평. 워크아웃을 졸업했지만, 요즘도 그는 전국의 대리점 개업식이나 간담회, 직원 대소사에 직접 참석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번개’를 쳐 직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스킨십을 한다. 매월 그달에 생일이 있는 직원들과 식사를 하며 격려하는 것도, 매년 1박2일 워크숍을 열어 조직문화 개선에 대해 밤샘 토론을 하는 것도 조용히 조직문화를 바꾸려는 박 부사장의 흔적이라고 직원들은 입을 모은다.
“박 부사장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조직문화를 챙긴다. 그는 ‘쉴 때는 쉬고, 회의는 결론이 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고를 하다보면 임직원들이 성과를 포장해서 내기도 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꿰뚫어봤는지 ‘보고나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무엇을 했고, 어떤 성과를 냈는지가 중요하다’며 다독인다. 진심 어린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조직의 문화를 조용히 바꿔가고 있다.”
이는 박 부사장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요즘 내 머릿속에는 조직문화 개선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임직원의 시각을 일치시켜야 하는 게 내 숙제”라며 “‘하라면 해’ 시대는 이미 지났다. 천천히 준비해서 신바람 나는 조직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과 하나로 어울려 ‘신바람’을 내려는 그의 생각은 우리네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의 타고난 천성이기도 하다는 게 친구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박 부사장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가 ‘재벌 3세’라는 것도 뒤늦게 안 친구가 많다. 그는 농구, 야구 등 구기 종목과 스케이트와 스키를 즐겼는데, 스케이트와 스키 실력은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대학 시절에도 친구들과 어울리면 소주 한두 병은 거뜬히 마셨다.”
‘이과 적성 99%’
박 부사장은 학창 시절 적성검사를 하면 이과 적성이 99%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휘문고 졸업 후 연세대 생물학과로 진학했고, 대학 졸업 후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니다가 2002년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 MIT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은 뒤 회사로 복귀했다.
금호가 3세의 맏형이자 그룹의 냉탕 온탕을 거듭 오간 보기 드문 젊은 경영인. 소탈함과 겸손의 리더십으로 조용히 조직문화 개선 작전을 펼치는 그가 앞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 재건에 어떻게 기여할지 시선이 쏠린다. 1960년 광주의 작은 공장에서 하루 20개의 타이어를 생산하던 회사에서 국내외 8개 공장이 하루 18만 개의 타이어를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금호타이어의 앞날도 함께 지켜볼 일이다.
■ 인터뷰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 단독 인터뷰
“신바람 일으키는 따뜻한 경영자 되고 싶다”
● 쌍방향 커뮤니케이션…과거 조직으론 미래 없어● 경영권 승계 운운은 배부른 얘기● ‘능력’보다 ‘겸손’ 보여주는 게 더 쉽다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은 ‘신동아’와 한 단독 인터뷰에서 “그룹의 황금기와 침체기를 모두 겪으면서 임직원들과 동고동락한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며 “앞으로는 일하고 싶은 조직문화로 바꾸고, 따뜻한 경영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약속’대로 워크아웃을 졸업했는데.
“참 힘들었다. 누구나 다 힘들었지만 직원들이 고통 받는 걸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채권단과 한 약속은 지켰지만 실제로는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다. 돌이켜보면 2005년부터 그룹의 황금기와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수없이 담금질을 당했다. 수업료 많이 내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 끝난 게 아니다? 금호산업 인수전을 염두에 둔 말인가.
“회장님(아버지 박삼구 회장) 말씀대로 순리대로 잘 갈 거라고 생각하지만, 섣불리 예단하긴 어렵다. 현재로서는 논의 과정이니까. 모든 게 잘 됐으면 좋겠다. 다만 워크아웃 졸업이 가만히 있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감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4년간 임금 동결해가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요즘 새삼 가슴에 새기는 말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待天命의 시기
▼ 요즘은 대천명하는 시기인가.
“그렇다.”
▼ ‘담금질’이라고 했는데, 과거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와 이른바 ‘형제의 난’ 등으로 위기관리 능력을 키운 측면도 있겠다.
“딱 부러지게 ‘이건 좋았다’ ‘저건 나빴다’고 말씀드릴 순 없다. 다만 앞으로 어떤 문제든 더 고민하고 합심해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거창하게 ‘선제적 위기대응’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 최근 금호타이어 대표 선임 과정이 문제가 됐는데.
“제3자나 언론에서 보면 참 재밌는 얘기일 수 있을 거 같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너무 작은 에피소드였다. 공교롭게도 (금호산업 인수 등) 타이밍 때문에 가십거리가 됐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다.”
▼ 경영권 승계에 차질을 예상하는 분석이 나왔다.
“나는 아들이고, 승계를 한다 안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지금 승계를 논하고 말고 하는 그런 위치가 아니라는 거다. 사느냐 죽느냐의 얘기지, 이것(경영권)을 주냐 안주냐는 건 의미가 없다. 배부른 얘기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게끔 일이 벌어지니까 그런 거다. 전라도 말로 ‘환장할’ 일이다(웃음).”
▼ 직원들과 스킨십을 강조하는 것 같다. 대리점 개업식이나 직원 대소사를 직접 챙긴다는데.
“시간이 되면 대리점 개업식에 가고, 비행기 이코노미석도 탄다. 그건 대단한 일도 아니고, 내가 챙겨야 할 분들은 챙기는, 그저 내 소임일 뿐이다. 요즘은 업무 성과를 높이기 위해 조직문화를 많이 강조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 박삼구 그룹 회장과의 즐거운 한때.
“서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는 조직문화를 일구자고 얘길 한다. 요즘 경영에 관한 내 머릿속의 많은 부분을 조직문화가 차지한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이렇게 하는데 직원들은 그만큼 평가하고 있을까…. 좋은 회사일수록 회사나 직원이 보는 시각이 일치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임원들이나 바로 밑 (간부)직원들은 ‘회사가 이렇게 잘해준다’고 말하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완전 반대 얘길 한다. 어떻게든 임직원 시각을 일치시켜야 하는데, 내가 봤을 땐 그런 면에서 아직 우리 회사는 걸음마 단계다.”
“조직문화 바꿔야 가치 창조”
故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회장(할아버지)과 故 이순정 여사(할머니)와 함께 찍은 돌 사진.
“아직 시간이 많다.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그런 것들을 다듬고 있다. 몇 가지는 실험적으로 얘기해보고….”
▼ 그래서 직원들과 ‘번개’를 하나.
“나보다 번개 모임을 더 자주하는 오너도 많다. 번개도 시선 일치가 돼야 한다. 부서별로 (번개모임 참석자를) 할당해서 참석하는 경우도 종종 있더라. 부담이나 강압, 할당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모임이 이뤄지면 나도 기분이 좋고 일치가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조직문화를 만들고 싶다.”
▼ ‘신바람 조직문화’를 만들겠다는 건데.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인문학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가다보니까 어느 순간 벽에 부딪혔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방식으로 글로벌 경쟁을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만큼 다른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정 부회장은 인문학을 해결책 중 하나로 봤다. 나는 문화를 바꿔야 가치창조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말씀한 대로 조직문화는 ‘신바람’이 나야 한다.”
▼ 임직원 모두가 ‘박세창’이 되길 바라나.
“그랬다간 큰일난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들이 들어와야지(웃음). 누구나 다 오너같이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다.”
▼ 겸손하다는 평가가 많던데.
“겸손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고, 현대사회가 계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군림한다고 군림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지 않나. 우리 제품 팔아주는 대리점주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내 능력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쉽다(웃음). 회사에 도움 된다면 90도 인사가 아니라 절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늘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내 아이들에게도 남을 배려하고 자기 직분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 특별한 가정교육이 있었나.
“할아버지(박인천 창업주)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부모님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모시는지 직접 지켜봤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효를 실천할 수 있다.”
▼ 부친으로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받았나.
“‘신동아’에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기사를 봤는데, 두 분은 새벽에 부친과 식사를 함께하는 일종의 ‘룰’이 있더라. 내 경우 그런 밥상머리 교육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아침저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께 문안인사하고 출퇴근하는 것을 지켜봤다. 지금의 나를 반성하게 한다.”
▼ 자녀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됐으면 하나.
“어릴 적부터 내가 어른이 되면 ‘친구 같은 아버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녀 고민에 귀기울이는. 그런데 막상 키워보니까 그게 제일 어려운 거 같다. 그건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니까.”
친구 같은 아버지
1983년 사내 체육대회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처음엔 낯을 좀 가리는 편인데, 낯이 익으면 친구들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노력했다. 친구들과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좋아했다. 군 대도 친구들과 날마다 어울려 다니다가 입대하게 됐다. 어린 시절 일기장을 보면 대통령, 사업가 등으로 꿈도 자주 바뀌었다. 어느 때부턴가는, 어떤 면에서든 가치를 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다.”
▼ 친구 때문에 입대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자주 술을 마시고 들어오니 부모님이 얼마나 한심스러워하셨겠나. 어느 날 부모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하시기에 ‘군대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입대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복무하다가 산불로 부대가 없어지면서 서울로 배치받고 복무하다 제대했다.”
▼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나.
“스트레스 해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비움’이라고 생각한다. 스키를 타거나 친구들을 만나거나, 아내와 산책하고 심야 영화를 본다. 지난 주말엔 밤에 애들 데리고 영화 ‘어벤저스 2’를 봤다.”
▼ 그룹 입사 전에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2년 동안 일했는데.
“기업 전략 컨설팅을 하는 회사였다. 대학 때 전공이 생물학이어서, 기업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컨설팅 회사에 다니면서 기업을 볼 수 있었고, 다른 회사를 먼저 경험한 것도 좋았다. 컨설팅이라는 게 CEO 관점에서 회사를 바라보는 거라 의사결정권자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일종의 ‘속성 코스’였다(웃음).”
▼ 끝으로 보태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따뜻한 경영자가 되고 싶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거다. 그룹 임직원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터라, 이 인터뷰도 그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