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경북 김천 한전기술 사옥 앞에 늘어서 있는 서울-수도권행 대형버스들. 일부 차량은 빈자리가 거의 없을 만큼 승객으로 가득 찼다.
4월 26일 ‘불금’의 경북 김천은 적막했다. KTX 김천(구미)역사가 있는 율곡동 상권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조는 오후부터 나타났다. 3시 무렵, 율곡동 중심에 있는 지상 28층 ‘한국전력기술’(한전기술) 사옥 앞에서 대형버스 10여 대가 줄지어 도시를 가로질렀다. 앞 유리창에 양재 사당 광화문 부평 금정 모란 등 서울 경기 각 지역 이름이 붙어 있었다. 오후 6시 무렵, 또 한 번 한 무리의 통근버스가 김천을 떠나 수도권으로 향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는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을 목표로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수도권에 있는 공공기관 가운데 일부를 지방에 이전하기로 하고 김천을 비롯한 전국 광역시·도 10곳에 ‘혁신도시’를 지정했다.
김천에 조성된 혁신도시엔 한전기술을 비롯해 12개 공공기관이 내려왔다. 김천시에 따르면 전체 임직원 수가 3월 현재 4140여 명에 달한다. 이들 기관 임직원이 김천에 정주하면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이 해소되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2016년 12개 기관 입주가 모두 끝나고 3년여가 흐른 지금도 공공기관 임직원 상당수가 ‘삶의 터전’을 옮기지 않고 있다. 율곡동 상인 장재호 씨는 “한전기술만이 아니다. 여러 공공기관이 통근버스를 운행한다. 매주 금요일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김천을 떠나는 대형버스를 볼 때마다 속이 터진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최근 수도권 공공기관 일부를 추가로 지방에 내려보내는 ‘혁신도시 시즌2’를 추진하고 있다. 역시 국토 균형발전이 목표다. 시민들은 “공공기관 사옥 짓고 아파트촌을 조성하는 것만으로는 지방이 살아나지 않는다. 빈 땅을 건물로 채우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채울 수 있는 정책을 구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4월 26일 금요일 밤 인적 드문 김천 율곡동 상권 풍경. 지난해 국회입법조사처가 공개한 ‘이전공공기관 이주현황’ 자료에 따르면 김천혁신도시 공공기관 임직원의 가족동반이주율은 2018년 6월 말 현재 39.7%다. 10명 중 6명의 가족이 아직 수도권 등 다른 지역에 산다는 얘기다. 이 바람에 주말이면 김천혁신도시 상권은 큰 타격을 입는다. 율곡동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상인은 “평일 저녁 갈비탕 매출이 가장 잘 나온다. 단신 부임한 직원들이 보통 점심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주말이면 수도권에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KTX 김천(구미)역사 앞길에는 큰 상권이 조성돼 있다. 그러나 말끔하게 새단장한 건물 상당수가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김천혁신도시에서 살고 있는 한 공공기관 임직원은 “그나마 있는 게 식당뿐이다. 목욕탕, 병원, 마트를 이용하려면 다른 동네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지역 관계자는 “정주 인원이 적어 장사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걸 어쩌겠나”라며 혀를 찼다. “사람이 늘어야 편의시설이 생길 텐데, 편의시설이 없어 사람이 떠나니 악순환”이라는 얘기다.
김천혁신도시 한 건물에 붙어 있는 ‘공공기관 추가 이전’ 홍보 현수막. 주민들은 ‘혁신도시 시즌2’가 시작돼 수도권 기업이 추가 이전하고 지역 인구가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한편에서는 “혁신도시가 제 궤도에 오르려면 건물만 새로 지을 게 아니라 교육, 문화, 복지 등 정주여건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천혁신도시 내 부동산 공인중개사 사무소들은 요즘 거래 실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 공인중개사는 “4월 한 달 동안 율곡동 내 부동산 실거래 신고 건수가 1건에 그쳤다”고 귀띔했다. 그에 따르면 율곡동에 공인중개사 사무소만 수십 개 있다. 그는 “혁신도시가 생기면 부동산 거래가 활발할 줄 알았다. 다들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