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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장시성

贛 도연명의 詩, 도자기, 마오쩌둥 신중국

중국 히트 상품 제조기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贛 도연명의 詩, 도자기, 마오쩌둥 신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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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닷 말 쌀에 허리 굽히나”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안 돼 안으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황족들의 내란)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이민족들이 쳐들어왔다. 진나라는 장강 아래로 내려가 피난 정부를 꾸린다. 이것이 동진(東晉)이다. 장강 너머 이민족의 위협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황제는 허약했고 반란이 잇따랐다. 이때 도연명의 증조부인 도간은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워 한미한 가문 출신이면서도 병권을 장악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미천한 가문이 떠오르는 것을 극력 저지했다. 한 귀족은 도간과 함께 수레를 탄 귀족을 비웃었다.

“어찌 이런 소인과 함께 수레를 탑니까?”
도간이 죽은 후 권문세족의 핍박은 더욱 심해져 그 후손들은 모함으로 살해당하기도 했다. 도연명이 태어났을 때 도씨 가문은 힘없는 선비 일족에 불과했다. 도연명은 도간의 증손자이며 명사 맹가의 외손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도씨 일족의 중흥에 대한 야망도 은밀히 품고 있었다. 청년 도연명은 “큰 뜻은 사해를 달리고, 날개를 활짝 펴고 멀리 날아오르길 기다렸다.”

그러나 세월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동진은 환현과 유유 등의 잇따른 반란을 겪으며 가사상태에 이르렀고, 반란이 또 다른 반란에 의해 엎어지는 와중에 반역자의 혐의를 쓰고 처형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출사를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모반자는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명 인사를 초빙했고, 이 초빙을 거절하면 화를 입게 마련이었다. “가을 풀 아직 노랗게 시들지 않았지만, 따뜻한 바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그런 난세 속에서도 권문세족의 텃세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도연명은 청운의 꿈을 안고 29세에 조정에 나아갔으나, 41세에 현령직에서 물러났다. 도연명의 12년 관직 생활은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도연명은 관직에서 물러나며 노래했다.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혀 있다가, 이제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네.”

도연명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이 자전적 수필은 이렇게 시작한다. 출신과 가문을 중시하던 당대 사회를 한껏 비웃은 말이다.

“선생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또 그의 성과 자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도연명은 유유자적한 전원생활과 술을 낙으로 삼았다. “세상에 바라는 바 없고, 오직 좋은 술과 오래 사는 것”만을 바랐다. 훗날 백거이는 도연명을 이렇게 추모했다.

“술을 사랑하지 명예 사랑하지 않고, 술 깨는 것 걱정하지 가난 걱정 않았다네. 다른 점은 따르지 못하겠지만, 얼큰히 취하는 건 본받으려네.”



贛 도연명의 詩, 도자기, 마오쩌둥 신중국

징더전 도자대학. 중국 유일의 도자예술 관련 고등교육기관이다.

진우량, 장사성, 주원장

‘삼국지연의’에서 형주(후베이)의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기 시작할 때, 손권은 이미 시상(장시성 주장)에 군대를 이끌고 와 있었다. 형주를 차지하고 조조의 남진을 막을 생각이었으나, 형주의 유종이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손쓸 틈이 없었다.

이때 조조가 손권에게 항복을 제의하자, 손권 진영은 싸우자는 파와 항복하자는 파로 갈렸다. 손권 역시 막강한 조조의 군세 앞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라 안의 일은 장소와 상의하고, 나라 밖의 일은 주유와 상의하라”는 손책의 유언을 떠올린 손권은 파양에 사람을 보내 주유를 불렀다. 그러나 급박한 정세를 감지한 주유는 이미 손권에게 오고 있었다.

정리해보자. 손권은 근거지인 회계(장쑤성 쑤저우)를 떠나 시상에 전진배치했다. 주유는 장시성 파양호에서 수군을 훈련시키다가 시상에 와서 조조와 싸우자고 주장했고, 곧바로 후베이성 적벽으로 출격해 조조의 군대를 격파했다. 즉, 장시는 오나라 정치의 중심 장쑤성과 방어의 중심 후베이를 잇는 지역으로 평소 군대를 훈련시키다가 유사시 어디로든 수월하게 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장강의 요지를 잇는 장시성 파양호는 원나라 말에 대격전의 현장이 된다. 원나라의 가혹한 정치에 대기근까지 겹치자, 중국 각지에서 군웅이 일어났다. 그중 장시 주장(九江)의 진우량, 장쑤성 쑤저우(蘇州)의 장사성, 난징(南京)의 주원장이 돋보였다.

진우량은 후베이·후난·장시에 안후이성 남부 일대를 장악해 최대 세력을 자랑했다. 장사성이 차지한 장쑤성 쑤저우와 저장성 일대는 장강 삼각주의 곡창지대이자 으뜸가는 상업지역이어서 당시 중국 총 조세액의 3분의 1을 내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처럼 엄청난 양대 강적 사이에 포위됐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즉, 진우량은 강했고, 장사성은 부유했으며, 주원장은 투지가 넘쳤다.

모든 여건은 진우량에게 유리해 보였다. 진우량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호걸이었고, 이미 군웅 최대의 판도를 구축했다. 장시에서 장강의 순류(順流)를 타면 주원장의 난징을 거침없이 공략할 수 있었다. 또한 장사성과 함께 동서에서 협공한다면, 가뜩이나 세력이 약한 주원장을 깰 수 있다.

진우량은 큰 전함만 100척, 작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주원장을 쳤다. ‘일제히 창을 던지면 강물을 끊고, 배는 꼬리를 물고 천리를 잇는’ 위세 앞에 주원장 군대도 크게 겁을 먹었다. 투항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몰래 달아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주원장의 장자방인 유기는 의연했다. 장사성은 큰 야심이 없고 사치향락에 젖어 있어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재빨리 진우량을 격파한 뒤 장사성을 평정하고 북으로 중원을 취해 왕업을 이룬다는 전략이었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군대를 거짓 항복으로 꾀어낸 다음 매복 공격으로 전군을 섬멸하고 2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진우량은 의심이 많고 도량이 작아 재주 있는 사람을 꺼리고 못난 사람을 감쌌기 때문에 내부에 불화가 잦았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불만세력을 흡수해가며 세를 불리니, 주원장의 세력은 날로 강해졌고 진우량의 세력은 날로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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