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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유럽의 식민지 침략으로 전파

노예 참혹사 부른 커피

  • 박영순|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유럽의 식민지 침략으로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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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의 등장과 더불어 비롯된 노예제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 침략 루트를 따라 전파된 커피로 인해 참극을 더했다. 세계 각지로 뻗어간 커피 밭은 곧 그들에 대한 착취의 결과물이었다.
인류는 집단생활을 통해 ‘협력의 위대한 가치’를 깨달았다. 씨족과 혈족으로 구성된 원시 공동체 사회는 농경문화를 꽃피웠고, 집단이 모여 마침내 국가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권력’이 생겨나면서 협력을 강제하는 횡포가 기승을 부리게 된다. 권력자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해 재산과 노동력을 강탈함으로써 세력을 빠르게 불려나갔다. 권력과 부는 인류애를 오염시켰다. 전쟁 포로와 식민지 사람들은 권력을 쥔 측엔 손쉽게 부를 불리는 도구에 불과했다.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인한 짓으로 꼽히는 노예제(Slavery)는 이렇게 시작됐다. 커피의 역사도 잔혹한 노예사로 점철돼 있다.

노예는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는 자 또는 계층을 말한다. 그 뿌리는 인류 최초의 국가가 형성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에까지 닿는다. 고대 이집트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을 노예를 확보하려 전쟁까지 치렀다. 고대 그리스 시대엔 아테네 인구의 40%가 노예였다는 기록도 있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방인을 그리스인의 태생적 노예로 규정했다. 그는 특히 “그리스인들은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받았다”며 노예제도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인종차별적 사상가라는 오명을 입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인류사에 얼마나 끔찍한 일을 초래할지를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망언

로마에 이르러서는 노예가 제도로 굳어졌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배한 지역의 민족들이 노예로서 로마에 대량 공급됐다. 노예와 그 소유주인 시민 간 계급관계는 이 시대를 규정하는 하나의 지표라고 할 만하다. 제정시대 로마에만 노예가 40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전한다. 로마 건국부터 쇠퇴기까지 거의 1000년 동안 노예로 팔리거나 잡힌 사람이 최소 1억 명에 달했다는 견해도 있다.





커피의 무역상품화

5 세기 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싹트기 시작한 중세 국가들은 왕과 영주 간 계약에 의해 이뤄진 봉건사회였다. 하층계급인 ‘농노’는 사실상 노예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이 시기 노예의 역사는 무슬림과 기독교 간 전쟁으로 인한 포로의 역사이기도 하다. 중세 초기 노예 공급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맞닥뜨린 중부 유럽과 동유럽이었다. 셀주크 튀르크족이 차지한 예루살렘을 두고 1096년부터 1270년까지 170여 년간 지속된 십자군전쟁은, 한편으로는 양 진영이 주거니 받거니 한 노예의 참혹사이기도 했다. 십자군전쟁 초기, 잉글랜드 인구의 약 10%가 노예였다는 기록은 그 처참함을 웅변하는 듯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노예제를 금지하면서 최소한 기독교도 노예를 비기독교 지역으로 수출하는 행위만은 강력히 막았다. 그러나 부를 안겨주는 노예는 그들에게 결코 떨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규정한 노예제 사회(고대)-봉건제 사회(중세)-자본주의 사회(근대) 등 역사발전 단계를 관통하는 공통된 키워드가 노예다.

십자군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슬람의 음료인 커피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로 전해졌다는 일각의 주장은, 기록은 차치하더라도 정황 증거조차 부족한 소리다.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건 십자군전쟁이 끝나고도 350년쯤 더 지난 17세기 초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전쟁사에서 커피는 오스만제국 전성기에 등장한다. 수니파 이슬람 왕조인 셀주크 튀르크는 십자군전쟁 이후 세력이 약해지고 내부 혼란을 겪게 된다. 이 틈을 타서 셀주크의 지배를 받던 오스만 튀르크가 1299년 터키를 중심으로 제국을 수립한다. 오스만제국은 터키공화국 수립을 앞둔 1922년까지 623년간 세력을 떨치면서 에스파냐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비롯한 상당 부분의 유럽 땅과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를 지배하기도 했다.

오스만제국은 1453년엔 비잔티움제국을 정복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고쳐 수도로 삼았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양측 간 무역이 왕성했던 곳이다. 이 시기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커피가 예멘을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오스만제국이 예멘을 지배한 16세기부터 커피가 대량 이스탄불에 들어오면서 터키 사람들이 즐기는 방식이라는 의미의 ‘터키시 커피(Turkish coffee)’가 주변 국가에까지 퍼져 크게 유행한다.


교황이 허락한 노예제

1615년 커피는 이스탄불을 오가던 이탈리아 베니스 상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게 된다. 6~7세기 에티오피아의 커피가 예멘으로 전해진 뒤 거의 1000년간 아라비아 반도에 갇혀 있던 커피가 마침내 유럽의 그리스도 국가들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는 유럽으로 전해진 뒤 세계적 무역상품으로 급부상한다. 그것은 물론 각성 및 치료 효과라는 커피의 본질적 매력 때문이었지만, 17세기 유럽 국가들이 부를 안겨줄 새로운 상품을 찾고자 했던 시대적 요구도 한몫을 한 결과였다.

소금, 향신료, 설탕, 담배, 면화 등 오랜 기간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던 상품들의 구매력이 점차 떨어질 때쯤 커피가 등장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유럽이 커피에 빠져들면서 포르투갈,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강국은 커피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됐다. 이들 국가는 기존 식민지만으로는 물량이 달리자 커피가 자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점령해 커피나무를 심었다. 커피나무는 아열대와 열대지역에서만 자라기에 유럽 국가들로선 자체 재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프리카를 떠나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터키로, 이어 베니스를 통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로 전해진 커피는 유럽 강국들을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량생산 시대를 열게 된다. 현재 세계적으로 커피 공급의 80~90%를 책임지는 아시아-아프리카 커피의 전파 경로는 곧 유럽 열강의 식민지 침략 루트와 일치한다.

커피나무를 많이 심고 키우고 열매를 많이 수확하려면 그만큼 인력이 필요한데, 힘 있는 강국들은 손쉽게 가난한 나라의 인력을 노예로 동원하는 법을 떠올렸다. 노예를 부리려는 유럽 강국들의 못된 버릇은 중세 때 다소 주춤하는 듯했지만, 대항해 시대 개막과 함께 다시 고개를 쳐든다. 더욱이 교황청까지 나서서 노예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이 1452년 공포된 교황 니콜라스 5세의 ‘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 칙서’다. 그는 포르투갈의 알폰수 5세에게 ‘사라센인, 이교도, 신앙이 없는 자들을 세습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노예무역을 합법화했다.



참극의 전주곡, 대항해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를 정당화한 이후 고대와 중세에 벌어진 참상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망언’이 나온 지 2000년이 지나 마침내 근대가 열리던 시기에, 그것도 교황의 입에서 노예를 국제적으로 거래하는 무역 합법화 방침까지 나온 지경이니 장차 벌어질 참극이 어떠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넘겨짚어볼 수 있겠다. 인간성이 말살된 중세 암흑시대를 르네상스운동으로 마감하고 근대로 넘어가고자 했던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칙서가 교황에게서 나온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15세기 지중해 패권 다툼에서 밀리자 향신료의 나라 인도로 닿는 다른 루트를 찾으려 대항해에 나섰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해 후추, 계피, 카르다몸 등을 들여오던 실크로드가 차단됐기 때문에 동양과 연결하는 통로가 절실한 터였다. 포르투갈은 북아프리카 주변 바닷길을 탐험하다 1488년 희망봉을 발견한다. 이어 9년 뒤인 1497년엔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끈 4척의 배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너머 인도에 도착한다.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겨 급속도로 해상제국이 됐다. 후추가 금보다 비싸게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를 휩쓸며 노예와 금을 선박에 꽉 채워 들여왔다. 노예무역을 허락한 교황의 칙서 탓에 아프리카에선 잔인한 노예사냥이 버젓이 벌어졌다. 포르투갈에 질세라 스페인은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를 끌어들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서인도제도와 남아메리카에서 수많은 식민지를 거머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후추, 금, 노예 등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는 ‘상품’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도 안달이 났다.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16세기 말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 등 정향과 육두구의 주요 산지와 동맹을 맺고 수백t의 향신료를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1641년엔 포르투갈령 말루쿠 제도를 아예 점령했다. 영국은 1786년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피낭 섬에 후추 항구를 설립했다. 프랑스도 1668년 동인도회사를 차리고 향신료 전쟁에 뛰어든다. 모리셔스, 기니, 도미니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며 부를 챙겼다. 특히 서인도 제도엔 사탕수수밭을 일궈 설탕무역을 벌였다.

향신료 수요가 늘면서 가격이 폭등했지만 점차 시간을 두고 향신료를 생산하는 나라들이 속속 등장해 재배지가 넓어졌다. 이에 따라 17세기 중반쯤엔 향신료 가격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해 무역상품으로서의 매력 역시 예전과 달리 떨어졌다. 반면 설탕은 여전히 고가에 거래돼 유럽 열강은 경쟁적으로 식민지에 사탕수수 재배 면적을 늘려갔다. 설탕을 만드는 일은 사탕수수 수확뿐 아니라 50~60℃의 고열에서 가마솥 작업을 벌여야 하는 매우 고된 일이라 노동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강제로 동원했지만, 전염병으로 거의 사라질 정도가 되자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흑인들을 데려다 쓸 전략을 세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한 지 200년 만에 원주민은 10분의 1로 급격히 줄었다. 그나마 생존한 원주민들은 산속 깊숙이 숨어들었다. 아메리카 대륙엔 설탕 주문이 쇄도했지만 이를 만들어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유럽은 인도나 중국에서 향신료와 차를 수입하느라 쌓인 적자를 아메리카에서 약탈하는 금과 은으로 메웠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자 담배, 커피, 사탕수수, 면화 재배에 매달린다. 재배에 많은 인력이 필요해지면서 노동력을 조달하는 노예무역도 큰 수익거리로 떠올랐다. 포르투갈은 이미 서아프리카 탐험을 하면서 구축한 노예사냥을 더욱 본격화한다. 에스파냐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도 흑인 사냥에 가세했다.


삼각무역의 한 축

노예무역이 부를 약속하는 아이템이 된 것은 삼각무역(Triangular Trade) 때문이기도 했다. 유럽은 면직물이나 총, 화약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흑인 노예와 교환했다. 다시 그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서는 노동력이 필요한 농장에 노예를 팔고 빈 배에 설탕, 커피, 담배, 면화를 싣고 돌아왔다. 한 번의 항해에서 3개 품목을 대량 거래하는 삼각무역 기법은 최고 500%의 엄청난 이익을 안겨줬다. 노예무역이 가장 심했던 시기가 계몽주의의 싹이 터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의 기운이 충만했던 18세기라는 사실 또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원주민은 한 해 8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한다.

노 예 노동이 필요한 사탕수수 농사가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기술 개발로 그 기세가 잦아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805년 스페인 남부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함대에 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고립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영국의 선박이 묶이면서 오히려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국가들이 여러 가지 곤란을 겪게 된다. 배편이 부족해 서인도제도에서 싣고 오던 설탕 유입이 차단된 것도 그중 하나다. 이때 나폴레옹이 사탕무로 설탕을 만들도록 한 것이 결과적으로 사탕수수를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무역경쟁을 차분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예의 수난사는 멈추지 않았다. 커피가 사탕수수를 대신해 유럽 국가들에 부를 안겨주는 새로운 상품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선 이제 커피 밭에 보내기 위한 흑인 사냥이 예전보다 더 참혹하게 진행됐다.

무역상품으로서 커피의 존재감은 빠르게 커졌다. 베니스 상인들이 1615년 커피를 처음 유럽으로 들여갈 때는 터키를 통한 간접무역 방식이었다. 중동 상인들이 터키에 전한 커피를 받아오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 만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예멘의 모카 항에서 정기선을 띄워 커피를 직접 수입하게 된다. 런던(1652년), 파리, 빈(1683년), 프라하, 뉘른베르크(1686년), 함부르크(1687년), 라이프치히(1694년) 등 도시마다 최초의 카페들이 문을 열면서 유럽인은 커피에 빠져들었다. 수요량이 폭증하는 상황에서도 커피 공급원은 여전히 예멘뿐이었다.

유럽 각국은 커피가 한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아예 식민지에 커피나무를 심게 된다. 네덜란드가 1658년 실론에 커피나무를 옮겨 심은 것을 신호로 유럽 강국들의 커피 재배 경쟁이 시작됐다. 1680년부터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커피를 재배한 네덜란드는 1712년 처음으로 커피 400kg가량을 자국으로 들여온다. 아라비아 상인을 통하지 않고 자급자족한 이른바 ‘식민지 커피’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15년 뒤 자바커피 유입량은 700t, 1855년엔 7만7000t에 달했다. 자바 주민이 식량난을 겪을 정도로 현지는 온통 커피 밭으로 바뀌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에서 커피 묘목을 받아 1723년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재배를 시작한다. 여기서 자란 나무가 브라질로 옮겨지고 연이어 퍼져나가면서 사실상 아메리카 대륙에 퍼지는 커피의 원조가 된다.

16~19세기 노예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은 40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을 착취해 서유럽과 미국은 큰돈을 벌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동력은 삼각무역에서 조달됐고, 삼각무역은 아프리카 흑인들에겐 인권유린과 참혹함의 상징이었다. 

노 예 이야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끝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과 독일이 아프리카 개척에 나서면서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등지에서 커피 밭을 일군다. 아프리카 본토에서도 그곳 흑인들의 처참한 아픔이 새겨진다. 아프리카 노예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참상이었다.




박 영 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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