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1일 서울 강남구 동부증권 동부금융센터 앞. 전국이 새 정부 출범에 대한 기대로 술렁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묘한 긴장감이 거리를 뒤덮었다. 비장한 각오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3월 29일 출범한 동부증권 노조 조합원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이 지점 폐쇄와 원격지 발령 압박으로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한 고원종 동부증권 사장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노동부에 고소하면서 동부증권 노조는 출범 한 달 반 만에 사측과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저는 HMC투자증권, LG투자증권, SK증권을 거쳐 2008년 5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7년간 동부증권에서 근무하다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을지로지점을 끝으로 동부증권을 떠났습니다. 이전에 여러 증권사를 거친 경력이 있고, 지금도 타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이 있다보니 증권계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구조조정 국면에서 동부증권은 증권업계에서도 가장 잔인한 행태를 보이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부증권을 끝으로 증권업계를 떠나게 됐다는 류성수 씨는 스스로를 동부증권 등급제도의 희생양이자 앞잡이였다고 고백했다. 한때 우수사원에서 부지점장으로, 다시 지점장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지점장 직무수당까지 반납할 만큼 열성적으로 회사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계약해지 죽을 때까지 죄책감’
“지점장으로 있으면서 다른 회사에 다니던 후배들을 동부증권으로 데려와 정규직에서 C등급 계약직으로, 그러다 계약해지를 통보해 무일푼으로 쫓아낸 일은 제가 죽을 때까지 죄책감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저는 오랜 기간 회사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한 직원들을,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한 사람들을 한 푼도 주지 않고 내쫓아 가정까지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후배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제 자의가 아니라 회사에서 몰래 지시를 내린 때문이라는 걸요. 떳떳치 못한 명분으로 직원들을 내쫓으려다보니 본부장에게 압력을 넣어 직원 면담 명목으로 직원들을 협박하고 퇴사 압력을 넣었죠.”
그는 현재의 동부증권 상황이 여전히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토로했다. 증권산업이 온라인화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구조조정이라는 필연적 수순을 밟게 된 것은 사실이나 다른 증권사들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적게는 1억, 많게는 수억 원의 명예퇴직금을 지급해 직원들이 이직이나 창업을 준비할 여유를 마련해주는 것과는 달리 동부증권은 정규직을 C등급으로 강등시킨 다음 계약직으로 전환,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명예퇴직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영업실적이 낮은 직원에게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는 제도는 어느 회사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동부증권의 C등급 제도는 사실상 실적을 독려하거나 영업실적에 따라 급여를 차등 지급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 동부증권 노조 측 주장이다.
동부증권의 경우 직급별로 채워야 하는 영업실적 즉, BEP가 정해져 있는데 정규직은 6개월, 계약직은 3개월마다 평가를 통해 등급을 다시 매기고, 임금을 다시 책정하는 방식이다. 정규직이 C등급을 받으면 미리 사표를 받은 다음 전문영업직으로 전환시키는데 일반영업직이 되는 순간 3개월마다 등급을 재평가받아 실적이 좋지 않을 경우 계약직으로 전환되며 이후 또다시 계약해지의 수순을 밟는다.
4인 가족 최저생계비도 안 돼
C등급의 가장 큰 폐해는 월급의 70% 삭감이다. 직급에 따라서는 월 1000만 원 이상의 영업실적을 채워야 월 150만 원에 인센티브를 적용받을 수 있는데, 이를 채우지 못하면 월급이 150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4인 가족 최저생계비조차 되지 않는 금액이다.
금융업계에서 영업직원에 대해 이처럼 등급제를 적용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지만 대부분 상여금에 차등을 두는 정도로, 동부증권처럼 연봉을 깎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언제 맞게 될지 모를 C등급 철퇴에 대한 불안과 실적에 대한 압박, 경제적 빈곤이 지속되면서 직원 대부분은 심각한 스트레스와 가정불화를 겪다 급기야 가정이 해체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물론 영업실적이 낮다고 해서 무조건 C등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C등급 제도는 영업실적이 극도로 낮은 0.5% 미만의 일부 직원에게만 적용되는 가장 마지막 방법”이라는 것이 동부증권 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노조 측은 이러한 제도가 결과적으로는 정규직을 계약직으로 전환하거나, 직급이 높은 정리해고 대상 직원을 별도의 명예퇴직금 없이 정리해고하기에 가장 편리한 제도라 주장한다. C등급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을뿐더러 직전까지 아무리 영업실적이 좋았어도 일시적으로 6개월 평균 실적이 기준치에 못 미치면 바로 생산성개선 대상자, 즉 C등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C등급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해고 통보와 다름없어 회사의 눈 밖에 나거나 직급상 급여 수준이 높은 직원을 자르기 위한 사측의 편법에 불과하다는 것이 노조 측의 입장이다. C등급을 받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연하다’고 입을 모은다. C등급을 받은 사람 대부분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목을 옥죄는 것은 C등급 제도만이 아니다. 동부증권은 2015년 1월 1일, 직원휴양시설 건립을 명분으로 지점장, 팀장급을 제외한 직급에 대해 대학학자금제도를 사실상 폐지하는 차별적 복지제도를 채택했다. 노조 측은 이러한 차별이 결국 직원들 간의 불신과 갈등을 조장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조 탈퇴 강요’ vs ‘탄압 없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은 5월 11일 기자회견을 통해 소속 조합원들에게 ‘지점 폐쇄’와 ‘원격지 발령 압박’ 등으로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한 동부증권 사측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고원종 동부증권 사장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노동부에 고소했다. 징검다리 연휴가 이어지던 5월 초, 부산 영남지역 지점 영업직원들에게 지점 통폐합과 원격지 발령 등으로 협박을 가하며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5월 8일 하루에만 28명의 부산영남지역 조합원이 노동조합 탈퇴 신청서를 제출했다. 노동조합 측은 “28명의 노동조합 탈퇴 신청서 양식과 내용이 동일한 것만 보아도 사측에서 조직적으로 노동조합 탈퇴를 일괄적으로 강요한 사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며 항의하고 있다.
3월 29일 사무금융노조 동부증권지부가 설립되고 조합원들이 사내 인트라넷 자유게시판에 노조 설립 알림 글을 게재하자 사측에서 이를 무단으로 삭제하고 노동조합 관련 내용을 자유게시판에 게시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등 노조 탄압을 자행한 내용도 공개됐다. 동부증권은 노동조합이 설립되자마자 사내 인트라넷의 전 직원 휴대전화 번호와 e메일을 삭제해 항의를 받았으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조치일 뿐 노동조합 설립과는 무관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룹사 전체에 기폭제 될까
박중호 동부증권 홍보팀 부장은 “노조 활동은 근로자의 자유 권리로 당사에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뿐 어떤 방해나 압박을 가하고 있지 않다”면서도 “사내 인트라넷은 업무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인 만큼 근무시간 내에 노조 활동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은 금지한다”고 밝혔다. 사전 선거운동을 통해 4월 28일 실시한 노사협의회 선거에 개입, 사측 인사를 근로자위원으로 선출하도록 했다는 의혹 역시 부인했다.
동부증권 노조가 출범한 것은 창사 3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실 이용규 보좌관은 “동부증권뿐만 아니라 최근에 노조가 설립된 대신증권, HMC증권 등도 사측에서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증권사의 경우 지점이 많다보니 노조가 설립됐다 해도 교섭과 쟁의가 쉽지 않아 사측에서 이를 악용한다. 대신증권 사례처럼 사측에서 어용노조를 추가로 설립해 어용노조원들에게만 성과급을 지급하고 기존 노조원들은 성과급 대상에서 배제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권교체 이후 노조를 만들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국정감사 등을 실시하는 등 시정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기대도 덧붙였다.
노조 설립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증권업계만이 아니다. 그간 노조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해오던 동부그룹사 전체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과 기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희성 동부증권 노조위원장은 “동부증권 36년 역사상 노조 설립이 처음이라는 것도 노조 설립을 준비하면서야 알게 됐다. 이는 곧 동부그룹의 조직적인 탄압이 있어왔다는 반증”이라면서 “직원 모두가 회사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행태에 분노하고 있는 만큼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찬성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노동조합 가입 시 혹시 모를 불이익을 당하게 될까봐 직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노조에 가입할 경우 지점 발령을 새로 내는 식으로 압력을 가할 수 있다. 근무 지역이 달라지면 본래 관리하던 고객들과 멀어지면서 새로이 영업망을 뚫어야 하는데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는 당장에 영업실적을 채울 수 없으니 당연히 C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이미 시작된 사측의 탄압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노조 가입 자유 보장하라’
금융업계 내에서도 동부그룹은 노조 활동에 강경하게 대응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동부그룹 계열사인 동부화재 노조가 사측의 방해로 와해된 이후 동부그룹은 ‘노조 없는 기업’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동부화재 노조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93년 말부터 1994년까지 10여 개월 농성이 계속됐습니다. 당시 기업들 사이엔 노조를 와해시키는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공유되고 있었는데 동부화재뿐만 아니라 포스코도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노조를 와해시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 저도 이듬해인 1995년에 회사를 그만두게 됐는데, 형식적으로는 내가 내 발로 걸어나왔지만 사실상 회사에서 내쫓은 것이었지요. 대구지점에서 남대문지점으로 발령을 내면서 일도 주지 않고 사람을 허수아비 취급을 했거든요. 어떠한 경우에도 부당노동행위는 엄격하게 처벌돼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부당노동행위를 신속하고 엄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법제도의 정비가 시급합니다.”
동부증권 노조는 사측에 대해 직원들의 노조 가입과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단체협상에 성실히 임할 것, 정규직에 대한 부당해고와 전문직에 대한 일방해고 중단, C등급 제도를 포함한 성과급제 전반에 대한 조정, 물가상승률 등 최소한의 요건을 반영한 임금인상 계획, 복지제도 차별 적용과 학자금 지원제도 폐지에 대한 재조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