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는 예정돼있다. 문제는 ‘어떤 변화인가’이다. 최악의 경제위기와 넘치는 신자유주의 반성론(論) 속에서 오바마노믹스의 방향타는 자본에 대한 규제 강화와 복지정책의 확대를 향할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보호주의와 과거 회귀가 과연 그 결론일까. 고전적 의미의 진보를 넘어서 오바마 리더십이 그려나갈 경제·무역정책의 밑그림을 가늠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의 결정적인 변수는 최근의 미국발(發) 금융위기였고, 그에 따른 ‘부시 피로감(Bush Fatigue)’이었다. 결국 오바마 리더십의 등장은 미국이 추구해온 경제적 가치들을 얼마나 변화시킬 것인지, 또 부시 행정부의 경제정책과는 얼마나 차별화될 것인지 관심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미국 선거에서는 경제정책의 성공 여부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유권자의 판단기준은 현 정부의 업적을 평가하는 ‘회고적(retrospective) 요인’과 새롭게 들어설 정부에 대한 기대를 의미하는 ‘전망적(prospective) 요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지난 8년에 대한 유권자의 회고적 요인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부시 3기 행정부’로 규정한 오바마 측의 선거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9월 이후 금융위기가 본격화하지 않았다면 그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선거전문가들의 사후 분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통상 유권자들이 자기에게 표를 준 이유와 맞아떨어지는 정책을 추진하고자 한다. 그러자면 집권 후 오바마 행정부의 성패는 금융위기 해결을 포함해 시대정신의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경제적 가치들을 구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1960년 존 F 케네디 당선 이후 최초로 남부나 서부 출신이 아닌 대통령이 나왔다는 의미를 갖는다. 투표에 참여하는 인구 구성이 변화했다는 이야기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번 대선에서는 흑인계와 히스패닉계 등 소수민족과 젊은 유권자가 오바마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이들 지지세력은 통상 견고하지 않고 실업이나 보험처럼 비이념적인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바마 당선자로서는 앞으로 이들 지지세력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끌고 가느냐가 당면과제다. 한마디로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이‘오바마 호(號)’에 승선할 경제정책의 요체다. 첫째로 현재의 금융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뉴욕발(發)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주택보유자의 문제 혹은 미국 내 저소득가계 안정의 문제를 넘어선 지 오래다. 미국 패권적 능력의 핵심 축으로 알려진 국제금융시스템의 구조적인 변화라는 의미를 갖는다. 일부 전망가들이 이번 사태를 1970년대 초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붕괴에 비유하며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0년대 이룩한 활황을 배경으로 부시 행정부가 과도한 일방주의적 힘의 투사를 시도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이외의 대항 헤게모니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혹은 지금 상황에서 금융시스템이 붕괴될 경우 이익보다는 피해가 더 클 것이라는 주요국 간의 이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패권의 붕괴라는 해석은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현재의 금융시스템에 규제와 감독 기능이 미비할뿐더러 통화정책 혹은 금융정책을 시장 자율성에만 맡길 수는 없다는 반성이 오히려 적절한 수준일 것이다. 이는 오바마 당선자가 선거기간 밝혀온 견해와도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오바마 당선자는 단기적으로는 부시 행정부가 내놓은 긴급금융구제법안 중심의 처방을 받아들이되, 이와 병행해 두 가지 조치를 취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미국 국내적으로는 금융감독기관을 통합하고 유동성 관리기준을 강화하는 조치가 추진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보완 등을 통해 미국 중심의 ‘신 국제금융질서 모색’을 시도할 것이다.
둘째로 살펴볼 질문은 ‘오바마 행정부는 결과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신뢰했던 신자유주의적 시장원리 기조를 철회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러한 전망은 민주당 백악관과 민주당 의회의 결합으로 인해 시너지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민주당의 정치적 기반은 자동차 노조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산업자본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최저임금 보장 및 국내실업의 악화에 대해 개입주의 정책을 전개할 것이라는 설명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국경이 사라진 세계화 시대에 미국 경제는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임금보장과 실업정책, 민주당 진영의 상대적인 개입주의 정책이 ‘보호주의 정책’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약자를 중시하는 태도로 중소기업을 보호하고자 애쓰는 경제적 가치 실현은 추진되겠지만, 그러한 정책의 기반은 세계 경제의 꾸준한 성장이나 다양한 국가들과의 무역을 통한 이익창출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오바마의 미국’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
셋째, 새 행정부가 신자유주의 과잉으로부터 일부 물러서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존중할 것이라면 오바마의 자유무역협정(FTA) 정책, 특히 한미 FTA의 향배를 전망하는 일은 우리에게 최우선 관심이 아닐 수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주당 진영의 무역정책은 자국민의 일자리 관리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세계화의 부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자국 내 노동조건을 저하시키거나 무역의 결과로 국내 실업문제가 악화된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분명 이에 적극 대처하고자 할 것이다.
FTA정책과 관련해서도 오바마 당선자는 선거기간 중에 1995년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비난하면서 한미 FTA의 경우에도 자국의 자동차 시장이 피해를 볼 수 있고 한국의 시장개방 의지가 충분치 않다고 비판한 게 사실이다. 특히 최근의 금융위기와 맞물려 FTA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강화됐고, 한미 FTA의 경우에도 한국 자동차의 대미수입관세 철폐 조항을 핵심으로 일정 부분 수정사항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오바마가 추구할 무역정책은 ‘보호주의’가 아니라 ‘공정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더욱이 FTA 문제만 해도 미국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문제의 핵심은 한미 FTA에 대한 미국의 요구가 과연 우리의 전략적 대응범위를 벗어나느냐 아니면 전략적 자율성의 범위 안에 있느냐다.
2007년 4월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최종 타결된 직후 김현종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카란 바티아 당시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가 기자회견장에서 악수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미FTA와 관련해서도 ‘위기가 곧 기회’라는 진부한 조언이 새롭다. 민주당 대통령과 민주당 의회의 결합은 오히려 우리의 전략적 대응에 따라 의회 비준 문제가 쉽게 처리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냉전기 이후 국제질서에 투영된 미국의 영향력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클린턴의 시대’는 세계 유일 패권국가로서 민주주의의 확산과 적극적인 관여정책을 통해 자유와 시장의 가치를 국제사회 곳곳에 연착륙시키려고 시도한 시기였다. 바로 그 연착륙의 매력에 사로잡혀 1차 북핵 위기를 성급하게 매듭짓기도 했고, ‘친절한 패권’이라는 말이 레토릭 수준에 머무르면서 어떻게 힘과 도덕을 결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도 했다.
두 번째 단계인 ‘부시의 시대’에는 자국의 힘을 글로벌 이슈에 과도하게 투사했다. 그 실천과정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의심받았고 국제사회로부터 명분 있는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 후반기에 들어 공공외교(public diplomacy)가 강조되고 몇몇 뜻있는 인사를 중심으로 군사력의 한계를 넘어선 ‘스마트 파워(smart power)’의 실천을 강조하는 담론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이미 미국 국민과 세계 시민의 마음이 떠난 후였다.
리더십의 갈등, 국익의 갈등
2009년 1월이면 오바마의 미국, 새로운 ‘진보의 시대’가 시작된다. 물론 고전적 의미의 진보는 아니다. 세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유형의 차별이나, 물리력이나 시장 같은 근대적인 문제해결 수단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탈근대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21세기형 진보’의 탄생이다.
이를 한국 정부가 갖고 있는 상대적 보수성과 비교하며 한미 양국의 불협화음을 우려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와 미국 새 행정부 사이에 큰 ‘부조화(miss-match)’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과거 박정희-케네디, 김영삼-클린턴, 김대중-부시 대통령이 카운터파트를 이루던 시기에 경험했던 부조화는 엄밀히 따지자면 리더십 대 리더십의 갈등이었지 국가이익 대 국가이익의 갈등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한국은 이제 동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생명력 강한 민주주의 발전을 이룩했고 글로벌 책임감을 고민하는 중견국가로 성장했다.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도 집권세력 간의 견해차를 전략적으로 해결할 외교수단이 생겨나고 있다.
당장은 북핵 문제와 한미 FTA가 현안으로 등장할 것이고, 특히 오바마 행정부가 선택할 진보주의적 경제정책은 분명 한국 정부에 외교적 어려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외교관계는 구조적 상황과 이슈의 특수성을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대공황 이후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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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금융위기 극복, 국제협조체제의 복원 등이 오바마 행정부가 처한 구조적 상황이라면, 한미 FTA와 자국의 자동차시장 보호는 이슈의 특수성일 것이다. 양자가 어떤 형태로 결합할지, 그 결합이 외교정책을 통해 어떻게 구현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의 외교적 노력이 요구될 따름이다.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오바마 당선자는 케냐, 백인, 흑인,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정체성이 혼재하는 소위 세계시민(cosmopolitan)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국제사회 리더십의 도덕적 기반을 복원하겠다는 오바마의 의지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질서에 대한 모범적인 실천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