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아홉, 작은 화랑에 발을 내디딘 뒤 불가능에만 도전했다. 한국 미술이 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때 해외시장을 찾았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표 값을 청하는 화가에게 조건 없이 돈을 내줬다. 외환위기 때 오히려 멋들어진 화랑을 지었다. ‘미술은 사회 공헌’이라는 일념으로 달려온 미술 인생.

이호재(李皓宰)란 이가 화랑계의 신화라는 건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신화란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을 이룬 이에게 붙여지는 수사다. 1983년 인사동에 가나화랑을 처음 연 이래 그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가나화랑의 25년 역사는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진다. 전시실 하나짜리 화랑도 꾸려 나가기 벅찬 한국 미술계 현실에서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장흥아트파크를(서울, 뉴욕, 파리의 작가 아틀리에는 빼고라도) 거느린 가나의 약진은 실로 눈부신 감이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화랑계에 뛰어들었다. 모험적으로 시도하는 일 투성이였으나 그가 한 국내 최초 기획은 죄다 전례 없는 성공을 거뒀다.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는 건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작가들 중엔 그의 광팬이 수두룩하다는 소문이었다. 신화가 탄생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다.
신화의 속살
1983년 이후 지금까지 그는 국내외에서 400회 이상의 진지하고 참신한 기획 전시를 개최했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아트페어 피악(FIAC)에 참석한 것은 1985년이다. 88서울올림픽 이전이라 한국 작가의 작품을 세계시장에서 판매하기란 하늘에 별 붙이기(하늘에 별을 붙이는 건, 장대를 이용할 수 있는 별따기보다 몇 배 더 어려운 일임을 아는 사람은 알리라)였다.
무엇보다 코리아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기 이전이었다. 국제 미술시장에 우리 작가의 그림을 들고 나가도 팔릴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호재 회장은 서둘렀다.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한국작가가 해외 미술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후 20여 년간 그는 우리 작가의 작품을 들고 대규모 국제아트 페어에 80여 차례 넘게 쫓아다녔다. 정열과 수월찮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런 세월을 지난 결과는? 국제 미술시장에서 한국 미술은 이제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일부 작가의 작품들은 전람회 기간 내에 동이 날 정도다.
“1996년과 1997년 바젤과 피악에서 우리 화랑 출품작들이 ‘솔드 아웃(sold out)’됐어요. 그게 아마 한국 미술 약진의 시작이었을 겁니다”라고 말할 때, 그의 얼굴엔 한 점도 팔지 못하고 철수하던 아픔까지를 품은 자랑스러움이 넘쳐 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신화를 좋아한다. 역사 너머의 신화를 사랑하는 만큼 살아 있는 신화를 동경하고 주목한다. 그렇지만 그 선망과 찬탄 뒤엔 얼마간의 질시가 따르는 것 또한 세상의 법칙이다. 악의 없이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도 흔하다.
가나화랑과 이호재 회장은 외로운 선두에 섰던 까닭에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안아야 했다. 그 모든 것에 나는 관심이 있었다. 신화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코앞에 북악산을 마주한 방에서 이호재 회장과 마주앉았을 때 나로서는 당연히 질문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연 매출액 수백억을 올리는 미술품 경매회사와, 거기서 단 한 번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인 화가가 줄 서 있는 최상급 화랑과, 수십명 작가를 지원하는 아틀리에를 가진 이의 이미지가 어때야 한다는 공식 같은 건 물론 없다. 그 모습이 얼마간 노회하거나 권태롭거나 권위적이라도, 대개 우리는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뭐랄까, 소년 같았다.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솔직한 눈과 맑은 호기심, 낯선 사람의 방문이 어색해 다소 허둥지둥하는 태도, 자신에게 붙여지는 거창한 단어들을 거북해 하는 담백한 몸짓이 두루 그랬다.
일단 나가자, 그리고 보자

소속 작가의 그림 앞에 선 이호재 회장. 이 회장은 “해외 거물 화상과 교류하면서 세계시장 진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고려화랑에서 그의 임무는 고객을 직접 방문해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말이 판로개척이지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으니 문전박대가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재계 인명록을 구해 그걸 동네별로 정리하는 일, 요즘말로 하자면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다. 차츰 어느 동네 어느 모퉁이에 어느 회장 집이 있는지를 훤히 꿰게 됐다. 이른 새벽 그 집 앞에서 주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일주일쯤 기다리면 회장님과 대면할 기회가 생겼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한두 점씩 그림을 팔았다.
그러면서 재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혔다. 신뢰도 생겼다. 오히려 고객을 통해 그림 보는 안목도 늘어갔다. 성실하고 유능하고 정직한 이호재를 찾는 고객이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동업하던 친구 염기설(현 예원화랑 사장)과 걸핏하면 화랑의 미래를 설계하곤 했다. 요즘 표현으로 둘은 젊은 벤처기업인이었다. 친구가 원하는 건 국내시장에서의 성공이었다.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국내시장에서는 이미 궤도에 오른 화랑이 여럿이고 유명 화가는 전속화랑이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해외시장이 궁금했다. 바깥 구경이 하고 싶었다. “기왕에 힘들 거라면 큰물에서 힘들자” 싶었다.
마침 세계를 돌 수 있는 1999달러짜리 티켓이 있었다. 고려화랑을 퇴직했다. 퇴직금으로 북반구 일주 비행기 티켓 두 장을 샀다. 일단 두 번을 돌자. 그러면 뭔가 보이겠지! 파리, 런던, 뉴욕, 도쿄로 일정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첫 번째 도착지인 파리에서 그는 두 번 놀란다. 미술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르누아르, 세잔 같은 거장의 작품들이 화랑에 버젓이 걸려 있을 뿐 아니라 거래도 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놀란 건 파리에 상상보다 많은 우리나라 작가가 작업하면서 살고 있더라는 점이었다. 100명 이상의 재불 작가가 작업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림만 그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에겐 작품 판매는 고사하고 전시회 참여의 기회조차 없었다.
훗날 (1990년대 후반) 해외 아틀리에 를 뉴욕에 둘까 파리에 둘까 고민할 때 파리를 선택한 것도 이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화가들이 최소한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세계를 돌며 해외 미술시장의 가능성을 직감한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의 화랑을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그게 1983년이다. 가나화랑이라고 인사동 모퉁이에 자신만의 간판을 걸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한다는 의미로 가나라고 이름지었다.
해외 거물 畵商과의 우정
가나화랑은 지금 세계적 규모의 화랑으로 성장했다. 직원이 100명을 넘는 화랑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처음에 이호재 회장은 인터뷰를 사양했다. 한창 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니 고객에게 피해를 줘서도 안 되고 사생활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화랑주의 삶의 핵심은 작가들과의 관계이니 작가에 관한 얘기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개인적 삶에 관한 부분은 한 10년 후에나 털어놓겠다고 했고 나는 동의했다. 권위적이지도 음흉하지도 않은 성격이라 인터뷰 도중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는 일단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그의 성공비밀은 막강한 해외 네트워크에 있는 것 같다. 세계 여행에서 돌아와 가나화랑을 설립해놓고도 그는 대부분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다니엘 말링규(Daniel Malingue),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부르노 비쇼버거(Bruno Bisoburger), 바이엘러(Beyeler) 등 거물 화상(畵商)들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들은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눈빛을 가진, 수줍지만 열정적인 이 동양 청년에게 호감을 가졌다. 무엇이든 도와주지 못해 애를 썼다.
그중 다니엘 말링규는 인상파 작품을 거래하는 화상으로 이호재 회장이 만난 최초의 국제적 미술계 인사였다. 그는 부르델, 로댕, 샤갈의 작품들을 주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국제 미술시장의 큰 고객이던 일본 컬렉터들에 대한 비즈니스를 이 회장이 맡아주기를 기대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사업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됐다. 비록 한국에서는 국제 미술시장 정보가 없어 말링규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판로를 구축할 수 없었지만.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FIAC에서 세계적 작가 자오우지와 함께했다.
매그(Maeght)재단과의 인연도 이 회장에게는 의미가 깊다. 가나화랑이 안정기에 들어선 1991년쯤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남프랑스에 위치한 매그재단을 방문했다.
“매그는 세계적 미술관과 문화재단을 가진 화상으로 남프랑스 방스에 별장이 있었어요. 그의 선친은 1930년대부터 2차대전 전후까지 칸딘스키, 샤갈, 미로, 자코메티, 레제 등 서양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관리하고 소장했던 인물이죠. 아들 애드리앙 매그가 내게 여름이면 방스에 레오 카스텔리가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를 만나기 위해 유명 화랑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온다고도 하고….”
레오 카스텔리야말로 미술계의 큰손이었다. 앤디 워홀, 제임스 로젠퀴스트, 프랭크 스텔라, 짐 다인,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탐 웨셀만 같은 굵직한 작가들이 다 그에게 작품을 줬다. 이호재 회장에겐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그해 여름 방스에서 레오 카스텔리와 만난 이호재는 이들 작품을 국내에서 전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1995년 즈음부터 가나화랑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짐 다인,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전시는 방스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거기서 만난 유명 화상 중 부르노 비쇼버거도 있다. 그 역시 앤디 워홀, 바스키아, 바르셀로, 엔조 쿠키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 회장은 바르셀로와 엔조 쿠키의 국내 전시를 추진했고 비쇼버거는 흔쾌히 수락했다. 바르셀로는 화폭의 새로움을 보여줬는데, 소말리아의 움막에 아틀리에를 두고 캔버스에 비도 맞히고 행인의 발자국도 찍어가며 학대하는 과정을 작업에 포함시켰다. 그의 그림을 나는 이 회장과 동행한 장흥아트파크 전시장에서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인간에겐 의식과 무의식이 있지요. 그린다는 의식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려진 그림이 더 강렬하고 매력 있다는 걸 바르셀로에게서 느껴요. 여기 원숭이 형상이 보이지요. 이 작가에게 동양식으로 치면 원숭이띠라고 말해줬더니 내 말대로 여기다 원숭이 한 마리를 그려놨네요.”
“작가에 투자하라”
초창기 가나의 힘은 그런 큼직한 국제 전시에서 비롯됐다. 일련의 국제전이 가나화랑에서 개최된다. 부르노 비쇼버거의 협력으로 열린 1993년 바르셀로전, 매그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열릴 수 있었던 1994년의 미로전, 그리고 이 회장의 큰 조언자인 바이엘러의 컬렉션을 통해 개최된 1995년의 추상표현주의전과 자코메티와 현대조각전 등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안젤름 키퍼를 후원하고 있던 바이엘러는 이 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당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