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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누스티의 추억

커누스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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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앨런 로버트슨, 톰 모리스, 제임스 브레이드가 설계한 ‘지구상에서 가장 가혹한 코스’ 커누스티. 거듭 꼬인 개울과 불규칙하기 이를 데 없는 바람 앞에 선 골퍼는 누구나 인생에 회의를 품을 만큼 괴로워진다. 이 험악한 코스에서 열린 올해 브리티시 오픈 마지막 날 경기를 지켜보며 되새긴 6년 전의 추억, 그리고 골프와 삶.
지난 7월19일부터 22일까지 제136회 브리티시 오픈이 스코틀랜드 커누스티에서 열렸다. 이 대회가 커누스티에서 열린 것은 1999년 이후 꼭 8년 만으로 사상 여섯 번째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나는 2001년 9월24일 커누스티에서 처음 플레이한 후 쓴 일기를 꺼내 읽었다. 참으로 모처럼 만에 되새긴 옛 추억이었다.

세인트앤드루스에 와서 사흘째다. 어젯밤에는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새벽 3시 무렵에 깼는데, 일기를 쓴답시고 노트북을 여는 바람에 7시까지 앉아 있었다. 개잠이라도 청해볼까 망설였지만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는 것 같아 샤워를 하고 차를 몰았다. 어제 오후 봐두었던 커누스티로 향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40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미리 와보았던 게 크게 도움이 된 듯하다.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분다. 가끔씩 빗방울도 떨어진다. 하긴 이곳에 와서 햇볕이 쨍쨍 나는 날을 보지 못했다. 서울은 천고마비 최고의 계절인데 말이다. 세인트앤드루스에 도착한 첫날 오후 올드코스(Old Course)에서 라운드하는 동안에도 바람이 있기는 했지만 비교적 약했고, 하늘은 청명했으며 가끔씩은 해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지방에서는 그런 날씨는 뜻하지 않은 ‘사고’이고, 오히려 오늘 같은 날씨가 일상인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 지방 사람들이 우리네처럼 벼, 보리를 재배하지 않는 것은 감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기후 탓인 모양이다.

이 지방이 골프의 발상지로 불리는 것은 등산할 수 있는 산이 전혀 없는 지형적인 특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바다는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멋있으려면 눈부신 태양과 쪽빛 나는 바닷물이 있어 금방에라도 뛰어들고 싶어야 하는 법인데, 이 고장의 바다는 그저 우중충하다. 뛰어들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난다. 이런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이 여가를 무엇으로 보내겠는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마도 골프가 아니었을까. 그런 운동이 미국을 거쳐 일본을 들른 다음 한국에 와서는 부자들의 전유물로 변질된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천지사방에 산이 가득 차 있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다. 등산이 귀히 여겨지지 않는 까닭이다. 상대적으로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한국에서 결코 작지 않은 땅을 필요로 하는 골프로 여가를 보내는 일이야말로 보통사람으로서는 넘보기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거꾸로 이곳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등산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몇 차례 해봤다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고 오히려 등산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이가 적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한국에서 골프가 대중화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골프 대중화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북한산 등산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프로골퍼가 아니라서 고마운

커누스티의 추억
내 기억으로, 커누스티에서 골프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보다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세인트앤드루스보다 상대적으로 시골이지만 골프장 숫자는 적지 않았던 때문으로 추측된다. 스타터에 들렀더니 곧바로 조인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그날 만난 일행은 이름표에 밀러라고 써붙인 한 사람과 그의 동료로, 모두 이곳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름표에 쓰인 ‘LACC’라는 글자로 보아서는 아마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나처럼 회원권 하나 없는 골퍼야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지만, LACC의 멤버가 여기까지 날아온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코스에 들어서면서 세인트앤드루스에서와는 달리 캐디를 불렀다. 스타터의 반 강요도 있었고, 이곳의 캐디피는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기왕이면 좋은 스코어를 내보려는 욕심 때문이다. 애초에는 한국말을 할 리 없는 캐디로부터 조력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거리 정도는 야데이지 책을 사서 보면 족할 것이므로 캐디는 공연한 사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예를 들어 커누스티 챔피언십 코스의 14번홀 468야드 파4홀에서의 일이다. 141야드의 파3홀인 13번홀에서 5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했더니 겨우 온그린될 정도로 강한 맞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심지어 11번홀에서는 티샷하기 전 커피잔이 바람에 날려 마시다 남은 커피가 몽땅 쏟아졌을 정도였다. 드라이버로 티샷을 했는데, 엄청난 벙커 턱에 가린 블라인드 홀이라서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홀컵까지 남은 거리가 260야드 이상으로 보였다. 스푼으로 아무리 잘 보내봐야 평상시 비거리가 210야드인 내가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그저 스리온이나 해서 운 좋게 파세이브를 기대하는 수밖에.

그런데도 캐디는 홀 주변에 위치한 벙커가 어떤지를 설명하면서 어느 클럽을 사용하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주고받은 이야기로 보면 캐디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못하는 영어나마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

“I don´t need thinking about TW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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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기 변호사, 법무법인 보나 대표 sodongki@bonalaw.com / 일러스트·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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