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새 연재> 상속의 역사

상속은 가문의 생존 전략

  •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7-05-19 1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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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속이라면 대개 딱딱한 학술적 주제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은 사람 사는 세상의 이모저모가 상속과 관련돼 있다. 결혼, 가족, 출세, 사회적 관습, 심지어 종교도 그렇다. ‘상속’의 렌즈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인류 문명을 심층적으로 되짚어보자.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부자로 인정받는 사람의 74%가 ‘상속형’이라고 한다(동아일보, 2014년 2월 6일자). 부자가 되고 못 되고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상속에 달려 있다니 충격적인 소식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봐도 마찬가지일까. 상황은 반대로 나타난다. 자산이 수백억 달러나 되는 세계 정상급 부자의 대다수가, 정확히 말해 70%가 ‘창업형’ 부자라고 한다. 한국 사회와 달리 세계 각국의 경제를 주무르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독창적 아이디어와 근면함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우리로서는 좀체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장차 한국 사회는 상속으로 인한 부의 과도한 편중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 3년 전부터 시중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난무한다. 심지어 ‘무(無)수저’라는 표현마저 등장해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처럼 심각한 사회현실을 그대로 외면할 순 없다. 우리는 이제 상속의 폐단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옳지 않을까.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필자는, 오래전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상속 관행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져왔다. 1990년대 독일 괴팅겐 시 막스플랑크 역사학연구소에서 상속에 관한 서적을 폭넓게 탐독한 기억이 새롭다. 그때 차근차근 꼼꼼히 기록한 연구노트를 잃어버려 유감이지만, 당시의 문제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다.



    상속, 역사를 보는 렌즈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금세 동의하겠지만, 상속은 인간의 역사를 여러모로 지배했다. 큰 틀에서 보면, 개인주의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이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적 지위가 상속에 좌우되는 건 앞에서도 말한 바다.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인맥도 상속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지만, 일본에선 유명 정치인들이 선거구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문화 영역도 상속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다. 선대가 구축한 문화적 환경이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판소리의 고장에선 유독 명창이 많이 쏟아져 나온다. 조선시대로 화제를 옮기더라도, 퇴계 이황의 학풍이 강한 경상도에선 생원이 많이 나왔다. 시조와 가사문학의 전통이 강한 전라도에선 진사의 수가 많았다고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라고 할까.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간 주장을 펼 수도 있다. 한 사회가 어떤 상속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이 결정된다. 가령 모든 자녀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주느냐, 장자에게 몰아주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기본적 성격에 큰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차남 이하의 여러 아들이 상속에서 배제되면, 그들은 고향을 떠나 군인이 되거나 상공업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근대 유럽에서 빈번히 목격된 사회현상이다.

    고대엔 인구 증가율이 낮은 데다 모계제의 유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랬겠지만 여성(딸)의 지위가 높았다. 가령 일본에선 딸도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고, 결혼한 다음에도 여전히 친정에 남아 있었다. 남편은 일종의 방문객이나 마찬가지여서 자녀 양육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권한이 더욱 강했다. 자녀 이름도 어머니가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여성의 지위엔 변화가 나타났다. 결혼한 남성이 처가에 장기간 머물게 된 것인데, 이는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 서옥은 처가에 있는 사위의 주거 공간) 및 고려의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사위가 아내 집에 머문다는 뜻)과도 흡사했다. 그때까지는 한일 양국 모두 여성의 상속권이 보장됐고, 가정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지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는 계속됐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사무라이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에도시대엔 사무라이 가문에서 장자상속제가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이에 여성은 가부장적 지배 아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현모양처의 삶에 만족해야만 했다.

    큰 틀에서 보면, 한국의 사정도 비슷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상속제도는 남녀 평균 분배, 즉 균분이었다. 그것이 17세기부터 아들 위주로 바뀌더니, 차츰 장남 중심의 상속제도로 이행했다. 왜 그렇게 바뀌었을까.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변화는 정치·경제·문화적 맥락에서 중층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장자상속, 말자상속, 공동상속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퍼진 상속제도는 부계상속이다. 장남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하는 장자상속을 비롯해 막내아들이 재산을 상속하는 말자상속, 여러 아들이 고루 나눠 갖는 균분상속, 형제가 공동으로 상속하는 공동상속도 있었다. 대부분의 농업사회에선 장자상속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유목사회와 일부 농업사회에선 되레 말자상속이 선호됐다.

    말자상속은 한국인에게 낯선 제도지만 실은 가장 합리적인 상속제도라는 평가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재산권과 사회적 권위를 그대로 유지하며, 나이 차이가 가장 큰 막내아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다. 막내아들 역시 아버지의 지도 아래 가장으로서 필요한 모든 조건을 서서히 갖출 수 있다. 말자상속은 가장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이루는 방법이었다.

    공동상속 풍습도 우리로선 익숙지 않다. 이 제도는 남송시대 양자강 남쪽의 대지주들이 고안했다. 만약 여러 세대 동안 아들들에게 토지를 고루 나눠주는 균분상속을 시행하면 어떻게 될까. 모든 자손이 영세농민으로 전락하거나 자칫하면 생존 기반 자체를 몽땅 잃을 우려가 있었다. 송나라의 사대부들은 토지의 영세화를 저지하고, 자손들이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에 진출할 재정 기반을 만들었다. 그들이 ‘의장(義莊)’ 또는 ‘제전(祭田)’의 명목으로 일종의 가족재단을 만든 배경이다. 결과적으로, 남송의 ‘대족(大族)’은 일정 지역의 토지를 광대하게 점유해 향촌사회를 지배했다. 또 재능 있는 자손들을 뽑아 교육에 열을 올렸다.

    상속은 가문의 ‘생존전략’이었고, 거기엔 2개의 극점이 존재했다. 장자든 말자든 어느 한 자식에게 몰아줌으로써 가문의 지위를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전략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균분상속 또는 공동상속을 통해 자손 모두에게 생존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려는 의지도 적지 않았다. 각 사회는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양 극점을 오가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상속의 혜택에서 완전히 배제된 자녀는 거의 없었다. 장자 또는 말자가 단독으로 상속받는 경우에도 그들은 가계 경영을 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동기간의 생계를 도와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걸머지게 마련이었다. 일종의 ‘빚 갚기’ 또는 ‘보상금’ 지급인 셈이었다. 제도적으로 상속에서 소외된 자녀들도 일종의 보상금을 받았다. 여성들은 결혼 지참금 형태로 사실상 상속에 참여했다. “딸이 도둑이다. 시집가며 기둥뿌리를 뽑아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요컨대 상속의 역사는 한낱 사회제도의 역사에 그치는 게 아니다. 거기엔 인간 사회의 숱한 애환이 담겨 있고, 생존을 지키려는 다양한 전략과 욕망이 꿈틀거린다. 상속은 지금도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는 사회적 생물이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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