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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작품 될 것 80년대의 진실 제대로 그리겠다”

장편소설 ‘대위법 80년대’ 연재 이문열

  • 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내 인생 마지막 작품 될 것 80년대의 진실 제대로 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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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69)은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손꼽힌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같은 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사람의 아들’ ‘삼국지’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곤 했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호암상 예술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 부악문원 대표, 한국외대 석좌교수,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6년 만에 본업인 소설 집필에 돌입했다. 다음 달부터 ‘신동아’에 장편소설 ‘대위법 80년대’를 연재하게 된다. 2011년 ‘리투아니아의 여인’ 이후 첫 작품이다. 특유의 맛깔난 문체와 통렬한 해학이 가득한 그의 문학세계를 그리워하던 많은 독자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를 경기도 이천에 있는 작업실 부악문원에서 만났다.

“어떻게 지내셨느냐”고 인사를 건네자 “지난 6개월 동안 술 먹고 성내는 일밖에 없었다”며 웃었다. 촛불 정국으로 시작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보수정당의 분열, 진보정부 출범으로 이어진 지난 6개월 동안의 시국 상황에 대한 탄식이 묻어났다.

“큰일 났다. 신장암 수술을 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그전보다 술을 더 먹고 있다. 수술 때문에 40년 만에 술을 끊었는데, 수술하고 100일이 지나면서 못 참겠더라. 처음엔 가족들 눈치 보며 몰래 먹었는데, 지금은 그냥 마신다(웃음).”

-어느 정도 마시나.
“나는 최소한 소주 3병 이상은 마셔야 한 번 먹은 걸로 친다. 한두 병 정도는 그냥 반주 삼아 한잔 걸친 걸로 친다. 매일 그렇게 마시는 건 아니고, 사흘 쉬었다 마시고 닷새 쉬었다 마신다. 그마저 안 지키면 죽을 테니까.”



-그런데도 몸이 괜찮은가.
“아직 이상은 없다.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된 건 없다. 초기에 발견해 수술해서 그런 모양이다. 체중도 6kg 정도 늘었다.”



예레미야의 불행한 예언

작가의 서재에 펼쳐진 성경책이 눈에 띄었다. “연재소설 제목을 짓기 위해 예레미야서를 봤다”고 했다. 구약성서의 한 권인 예레미야서는 유대왕국의 멸망을 말한 예언서다. 유대인도 우리처럼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들에게 침략을 당했다. 민족이 두 나라로 갈라지기도 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때는 이미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패해 멸망했고, 남유대는 신바빌로니아와 이집트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당시 정치인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은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고 장담하며 이집트와 손잡고 신바빌로니아에 저항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남유대는 신바빌로니아에 멸망했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됐다.

-왜 예레미야서인가.
“똑같은 케이스는 아니겠지만, 우리도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예레미야처럼 슬픈 노래를 부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물론 그게 불행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불행은 1980년대에 태동했다. 내 소설이 1980년대를 담고 있어 적당한 구절이 있나 살펴봤다.”

-소설은 어떤 내용인가.
“1980년대, 정확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씨앗이 만들어지는 1979년부터 1990년 1월 3당 합당까지를 다룰 예정이다. 지금 우리나라엔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두 세력이 존재한다. 나는 두 세력이 1980년대에 태동했다고 본다. 진보의 태동은 광주민주화운동이었고, 보수의 태동은 산업화 세력이었다. 3당 합당은 한마디로 80년대 내내 갈등하던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봉합으로 한 시대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었다. 당시는 동유럽이 몰락하는 등 이념 대립이 사라져가는 시기였다. 그땐 3당 합당이 근대화와 민주화 세력의 절묘한 결합이고, 이념 갈등은 이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다시 광주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도가니와 모루

-구상은 언제부터 한 것인가.
“2005년부터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밀려 시작하질 못했다. 3년 전쯤엔 본격적으로 쓰려는데 암 수술을 하는 바람에 또 늦어졌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동안 막연하게 여겨졌던 80년대의 의미들이 최근 몇 개월을 거치면서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또한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더욱 농익어가는 것을 느꼈다.”

-분량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나.
“총 3권이다. 처음엔 ‘변경’처럼 10부작으로 해서 여러 등장인물의 시각으로 80년대를 조망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대하소설이 허용되는 시대가 아닌 것 같다. 주인공 한 사람의 시선으로 80년대를 볼 생각이다. 3권도 요즘 독자에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10년의 세월을 담아내기 어렵다.”

-연재소설 제목이.
“처음엔 ‘도가니와 모루’로 하려고 했다. 쇳물을 뽑아내려 달궈진 도가니와 쇠를 두드려서 뭔가를 만드는 모루가 1980년대를 은유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설명적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대위법 80년대’로 정했다.”

-대위법(對位法)이 무슨 뜻인가.
“대위법은 여러 개의 운율이 동시에 흐르는 음악이다. 여러 가락이 함께 흐르면 때론 잡음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조화를 이루면 멋진 푸가(둔조곡)가 된다. 1980년대를 음악으로 표현하면 여럿이 한목소리로 부르는 단성 음악의 제창이 아니고 대위법처럼 여러 개의 멜로디가 각계 층위에 따라 이쪽에서는 민주화의 노래, 다른 쪽에서는 산업화의 노래로 나오고 세계화의 변화도 섞인 복합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민주화나 산업화 어느 한쪽만 강조하는 건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단선음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선 안 된다.”

작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작고했을 때 모든 언론이 그를 민주투사로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심지어 이만섭, 박태준이 작고했을 때도 민주 인사로만 부각하더라. 하나의 멜로디만 흐르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라며 산업화의 가치가 퇴색하는 시류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광주의 또 다른 진실

-광주민주화운동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하다.
“그동안 진보 쪽 작가들이 광주에 대해 많이 다뤘다. 하지만 그들이 다루지 않은 이면의 이야기가 많다. 그들의 영웅담, 저항정신은 충분히 이야기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는 있다. 또한 많은 국민이 1980년대 초를 흔히 3저 호황으로 인해 저절로 경제가 발전한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큰 고비였다. 자칫하면 1960~70년대 우리 국민이 쌓아올린 산업화 근대화 성과가 다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야기도 담으려 한다.”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소설이 예언서나 역사서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진실을 이야기할 책무가 있다. 1980년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80년대를 다룬 진보 시각 작품은 많지만 보수의 시각으로 80년대를 본 작품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정치적 이념이나 의도, 목적에 사로잡혀 글을 쓰는 것은 피하고 싶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충실히 보여줄 생각이다.”

-주인공은 작가 자신의 투영인가.
“주인공은 80년대를 종합적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가능한 직업이 뭘까 생각했는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골고루 관찰하고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 작가가 가장 적당했다. 내 체험도 잘 활용할 수 있고. 그래서 주인공이 소설가다. 내 체험도 많이 들어갈 것이다. 당시 만난 보수와 진보 인사들, 각 분야 수많은 군상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다. 물론 이건 실록이 아니라 소설이다. 주인공에겐 내 모습도 있지만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문학적 고민을 했던 당시 작가들의 고민도 투영될 것이다.”

-그런 작가가 많았나.
“과거엔 지금처럼 문인들이 좌파 우파로 나뉘지 않았다. (사회)참여냐, 순수(예술)냐로 성향이 갈렸는데, 그래도 서로를 인정했다. 내가 등단할 때만 해도 순수문학이 대다수였고, 참여문학은 소수였다. 1980년대 중반만 해도 비율이 5대 5였는데, 1995년쯤엔 7대 3으로 기울더니 10년 뒤엔 9대 1이 됐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더라. 그래도 나는 저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세상 어느 것이든 한쪽으로 모두 몰리면 전복될 수밖에 없다.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씨는 글은 순수문학인데 참여문학 편으로 분류됐다. 나중에 조선일보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고 그들로부터 엄청 비난을 받았다. 작고하기 몇 년 전에 만났는데 그 친구들을 신랄하게 비판해 깜짝 놀랐다. 그전엔 그런 말을 전혀 안 하던 사람인데, 그 일로 고초를 많이 겪은 모양이었다.”


누가 더 정치적인가


-작가도 처음엔 사회 비판 작품을 써 참여문학 작가로 분류되기도 했다.
“난 사회적 모순, 부조리를 쓰는 것일 뿐 그쪽과는 달랐다. 예를 들어 악인을 그리면서 나쁜 놈이니 쳐죽이자고 쓰지 않는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자기 잘못을 모르는 ‘이런 인생도 있다’는 걸 그릴 뿐이다. 그런 인생에 대해서도 연민과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저쪽에서 내 작품을 오독해 운동권 입문서로 사용하기도 했다(웃음). 처음엔 날더러 자기네 쪽으로 오라고 유혹하더니 안 되니까 내 작품을 ‘병든 낭만주의’니 ‘싸구려 교양’이니 ‘현학적’이니 하며 비난하더라.”

-지금은 보수의 상징처럼 됐다. 이로 인해 소설에 이념, 정치적 메시지가 과도하다는 비판도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 나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이 덮어씌운 프레임일 뿐이다. 참여문학이야말로 정치적 메시지로 도배한 작품들 아닌가. 그런데 자기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보진영 작가들 중에는 아예 정치권으로 넘어간 경우도 많다. 내가 정치에 관여한 건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그것도 위원장도 아닌 15명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누가 더 정치적인가.”
2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며 작가는 “이 작품이 내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심혈을 기울여 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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