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1930년대판 ‘OJ 심슨’ 골프천재 존 몬터규의 비밀

  • 소동기 변호사, 법무법인 보나 대표 sodongki@bonalaw.com / 일러스트 김영민

    입력2007-03-09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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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대의 골프 천재로 명성을 얻은 선수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신문에 난 사진을 본 경찰은 그를 7년 전 강도사건 수배자로 지목하고 체포한다. 그의 골프 친구이던 할리우드 스타들은 “그는 절대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호소하고, 이들의 지원을 받은 막강한 변호인단은 빼어난 변론 실력을 발휘하는데…. 언론과 연예산업, 돈과 권력이 얽힌 ‘골프 천재 강도사건’ 재판의 결과는?
    1930년대판 ‘OJ 심슨’ 골프천재 존 몬터규의 비밀
    1994년 6월13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고급 주택가 브렌트우드의 대저택에서 풋볼선수 OJ 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남자친구 로널드 골드먼이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목격자가 없었다. 수사를 시작한 경찰은 심슨의 집에서 피 묻은 장갑을 발견했고, DNA검사 결과 희생자의 피로 판명됐다. 그러자 경찰은 심슨을 체포하기 위해 그를 추적했다. 당시 이들이 벌인 100km 추격전은 TV로 생방송됐다. 경찰에 체포된 심슨은 곧바로 기소됐다.

    심슨은 로버트 샤피로 같은 유명한 변호사들로 이른바 드림팀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그들은 장갑이 심슨의 손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사건현장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으며, 담당형사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점을 주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피고인을 변호했다.

    재판이 시작되고 1년가량이 흐른 뒤 마침내 심슨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판결에 대해 흑인들은 환호했고 백인들은 분노했다. 배심원제도의 문제점과 고질적인 인종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때의 판결 앞에서 미국사회는 끝없는 논란의 한가운데로 빠져들었다.

    이상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소위 ‘OJ 심슨 사건’의 개요다. 돈과 권력, 스포츠 스타, 인종 문제, 가정폭력, 언론의 광기(狂氣)가 한데 어우러진 최악의 범죄사건. 한때 미국뿐 아니라 다른 대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OJ 심슨 사건이 일어나기 50여 년 전에 미국의 골프계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배트, 삽, 흙고르개



    1903년 워싱턴 주의 타코마에서 태어난 해리 릴리스 크로스비는 1920년 법률가를 꿈꾸며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음악에 더 관심이 많던 그는 1926년 ‘리듬보이즈’라는 트리오의 멤버가 되어 가수로 데뷔했다. 1929년 솔로로 전향한 후 무수한 히트곡을 발표했고, 1930년 영화 ‘킹오브재즈’를 필두로 약 120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그의 예명은 빙 크로스비다.

    1954년 ‘빙 크로스비 쇼’를 시작한 그는 텔레비전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1944년 영화 ‘나의 길을 가련다(Going My Way)’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1955년 12월 발표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말미암아 그는 실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빙 크로스비는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가수 겸 배우로서 진정한 의미의 멀티 플레이어였다.

    평소에 빙 크로스비는 골프를 하다가 그린 위에서 영원히 잠드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1977년 10월14일 오후 6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한 골프장에서 퍼트를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전영오픈에 출전하리만큼 골프실력도 뛰어났다. 요즘에는 몬테레이 반도의 페블비치골프링크스에서 매년 2월 두 번째 주에 열리는 AT·T페블비치프로암대회의 전신을 주최한 것도 그였다. 1937년에 샌디에이고 란초샌타페이골프클럽에서 처음 열린 전국프로암대회가 바로 그 대회다.

    1937년 6월10일, 골프광 빙 크로스비가 뉴욕에 들렀다가 친구 존 몬터규와 내기골프를 했다. 크로스비는 그날 몬터규로부터 핸디를 5개나 받았으면서도 파4홀에 이르러 ‘특별한 제안’을 했다.

    “나는 골프클럽을 사용하겠지만, 자네는 클럽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볼을 치면 어떨까?”

    1930년대판 ‘OJ 심슨’ 골프천재 존 몬터규의 비밀

    1995년 9월,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OJ 심슨 사건’ 재판정에 출두한 심슨(오른쪽)과 그 변호인단. ‘드림팀’ 변호인단은 인종차별을 재판의 쟁점으로 삼아 무죄평결을 이끌어냈다.

    이 기발한 제안에 몬터규는 야구배트로 티샷을 했다. 볼은 300야드나 날아갔지만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크로스비는 드라이버로 티샷을 한 다음 6번 아이언으로 18m 지점에 투온을 했다. ‘투 퍼트로 홀아웃을 하면 아무리 잘못된다 해도 비기기는 하겠지.’

    세컨드 샷에 나선 몬터규는 마침 코스 관리작업을 하고 있던 직원으로부터 삽을 빌려 핀에서 2m도 안 되는 지점에 갖다붙였다. 그런 다음 흙고르개를 집어들고 당구 흉내를 내어 버디를 잡아냄으로써, 파를 기록한 크로스비를 물리쳤다. 다음날 조간신문에는 ‘크로스비, 배트와 삽과 흙고르개에 참패’라는 제목의 기사가 사진까지 곁들여져 일제히 실렸다.

    “그는 절대로 범죄자가 아니다”

    이날 아침 뉴욕 주 웨스트코스 경찰서에서는 두 경찰관이 문제의 신문기사를 읽었다. 우연히 몬터규의 사진을 본 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내, 수배사진 속 인물과 너무나도 닮지 않았나?”

    “꼭 닮았네그려. 당장 사건이 벌어진 에섹스카운티 경찰서에 알리세!”

    전화를 받은 시카고의 카운티서 보안관은 오랫동안 추적해오던 강도살인미수범 레반 무어와 닮은 남자가 발견됐다는 소리에 크게 기뻐하며 바로 지문, 사진, 필적을 뉴욕으로 보냈다. 며칠 뒤 여느 때와 같이 크로스비 등과 함께 플레이를 한 몬터규는, 홀인원과 두 개의 이글을 잡아내어 66이라는 코스레코드를 작성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오자마자 수사관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레반 무어 맞죠?”

    경찰의 질문에 그는 의외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악수를 청했다.

    ‘몬터규, 과거의 강도사건으로 체포되다!’라는 쇼킹한 뉴스가 보도된 후 한 달 사이에 최소한 66인의 저명한 영화배우, 감독, 작가가 주지사에게 몬터규 체포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빙 크로스비가 주선해준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몬터규는 1937년 8월20일 자발적으로 검사국에 출두했다. 그가 출두하는 도중 시카고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군중이 나와 성원을 보냈다. 할리우드의 대스타들이 매스컴에 나와 한입으로 “그는 절대로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변호함으로써 그를 ‘비극의 왕자’로 만들어준 셈이었다. 곧바로 진행된 범죄사실의 인부(認否)절차에서 그는 존 몬터규가 가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체포 이유에 대해서는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주부터 시작된 재판의 모두(冒頭)에서 검사는, 7년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의 전모를 아래와 같이 배심원들에게 설명했다.

    1930년 8월5일 이른 아침, 조이에 있는 조그마한 잡화점에 4명의 무장강도가 들이닥쳤다. 가게주인 여자와 네 명의 자녀를 묶고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만든 뒤 가게에 있던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살던 아이들의 의붓아버지 매트코프가 묘한 기분으로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네 명 가운데 주모자 격인 레반 무어가 권총의 개머리판과 가죽곤봉으로 그를 가차 없이 두들겨 팬 뒤에 현금 800달러를 강탈했다. 일당은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달아났다.

    피해자는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지만 그 후로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도주하던 두 대의 차 가운데 순찰차에 쫓기던 한 대가 뒤집어지면서 범인 가운데 존 셀리가 사망했고 윌리엄 마틴이 체포됐다. 두 사람은 캐나다로부터 술을 밀수입했다는 금주법 위반혐의 용의자로 수배 중이었다. 게다가 뒤집어진 차 안에서 레반 무어 명의의 운전면허증, 보스턴백, 그의 주소가 적힌 편지, 버팔로 야구팀에서의 그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신문기사 스크랩, 17개의 골프클럽 등이 발견됐다. 여기에 체포된 마틴의 진술이 덧붙여지면서 무어는 지명수배된 것이었다.

    심리가 진행됨에 따라 수수께끼 같은 몬터규의 정체가 점차 밝혀지기 시작했다. 신문들은 관련기사를 매일같이 대서특필했다. 어떤 기자들은 용의자인 레반 무어의 성장과정을 취재해 흥미진진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하늘이 내린 천재

    1930년대판 ‘OJ 심슨’ 골프천재 존 몬터규의 비밀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유명한 가수 겸 영화배우 빙 크로스비는 소문난 골프광이었다. 존 몬터규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몬터규의 재판 내내 그를 지지해 여론의 동정을 이끌어냈다.

    그는 1905년 시러큐스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부터 글렌포올즈컨트리클럽에서 캐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레반 무어는 18세 때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트럼프 캐디’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 무렵에 이미 골프 기술을 완전하게 연마해 언더파를 넘나들 정도였다. 헨리 주라스는 10대 시절의 몬터규에게서 골프 강습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몬터규의 과거를 묻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구기종목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골프도 그렇지만 야구에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하지 않는가. 어려운 것이라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볍게 해치워버리곤 했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내였다.”

    22세 무렵 몬터규는 금광 채굴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도서관을 다니면서 금광에 관한 책을 탐독하던 그는, 마침내 당장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모아 내기골프를 하러 플로리다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그는 1930년 8월6일, 그러니까 강도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골프나 야구로 입신양명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생가를 떠났다.

    멕시코로 건너가 몇 군데 금광에서 사업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일확천금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네바다 주의 금광맥에 머무른 지 2년여 만에 겨우 입에 풀칠할 만큼 소량의 금을 캐기는 했지만 금맥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 후로도 광산기사라는 허울을 달고 각지의 산을 전전하며 황금을 찾는 여행은 7년여에 걸쳐 계속됐으나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그 후 그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에는 존 몬터규라는 새 이름과 엄청난 샷을 구사하는 골프선수로 변신한 다음이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어느 날 오후 팜스프링골프코스에서 천부적인 재능의 일단을 보여주면서부터였다. 이때 그는 200야드 거리에서 10개의 볼을 쳤다. 모두 온그린됐을 뿐 아니라 그중에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 홀에서 3m, 가장 근접한 것은 20cm였다. 당대의 유명 골프선수 조지 엘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몬터규야말로 세계 제일의 골퍼였다.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흥미로운 경기는 팜스프링스에서 나흘간 그가 68, 67, 66, 65로 매일 1타씩 코스레코드를 줄여가는 것이었다. 할리우드의 레이크사이드에서는 절대로 68타 이상을 친 적이 없었다. 18번 550야드에서는 언제나 투온이었다. 장타자면서도 볼이 휘지 않는 그를 골프 천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골프평론가인 그랜트랜드 라이스도 “몬터규를 넘어서는 골퍼는 20세기 중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1936년 전미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총평하는 자리에서 “우승자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이 시합에 존 몬터규가 출장하지 않았으므로 당신을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단두대의 칼날도 멈추게 하는”

    이처럼 유명한 골퍼가 7년 전 사건으로 체포됐으니 언론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판은 장장 17회에 걸쳐 열렸다. 피고인측 증인으로 클라크 게이블, 빙 크로스비를 필두로 열 손가락을 넘는 거물급 할리우드 스타가 출두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거리에는 연일 소동이 일었다. 100명이 넘는 보도진이 밀어닥치기도 했다. 코미디언 가이 기비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의 좋은 친구가 마치 길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 왔습니다. 게이블도, 크로스비도 그를 구제할 수만 있다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제발 그의 무고함을 믿어주십시오. 이 사람은 서부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존 몬터규야말로 20세기에 태어난 최고의 골퍼입니다. 그보다 정확하게 샷을 날리는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21세기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강약이 혼재된 기술의 뛰어남은 흡사 예술의 경지입니다. 골프 경기에만 국한해서 본다면 보비 존스나 벤 호건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할 겁니다. 그가 청명한 무대를 싫어했기에 직접 대결이 불가능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검찰측은 피해자를 증인으로 세웠다. 피해자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레반 무어를 가리키며 “틀림없이 저 남자도 범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단호하게 증언했다. 일부 신문은 이 증언을 근거로 레반 무어가 틀림없이 유죄평결을 받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레반 무어는 단지 친구에게 차를 빌려줬을 뿐 자신은 오히려 피해자라는 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재판이 열리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인 어느 날, 전 미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배심원들의 평결이 내려졌다.

    “무죄!”

    그 순간 백발의 재판장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듯 책상을 치고 일어나 소리쳤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당신들은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눈이 멀어 진실을 놓치고 말았소!”

    그러고는 재판이 끝났음을 알리는 뜻으로 망치로 책상을 두드리고 퇴장해버렸다. 신문들은 소수의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가 돈을 갹출해서 산 두 명의 변호사를 두고 “떨어지는 단두대의 칼날도 도중에서 멈추게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라고 썼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무죄가 선고된 다음해 11월 몬터규는 거리낌없이 롱아일랜드의 후렛슈메트컨트리클럽에서 개최된 뷰익토너먼트에 출전했다. 첫날 몬터규와 함께 코스를 돈 사람은 미국을 대표하는 두 명의 ‘베이브’, 즉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1932년 LA올림픽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뒤 골프로 전향해 여자골프를 파워골프로 바꾼 불세출의 운동가 베이브 자할리스였다. 예매권은 당일 모두 매진됐다. 그날 이 경기에는 1만2000여 명이라는 대규모 갤러리가 밀착 구경을 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몬터규를 냉대했고, 심지어 “어이 진실은 강도짓을 한 거 아니야?” 같은 비아냥거림이 난무해 베이브 루스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쏘아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존 몬터규는 이후 토너먼트를 기피하고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클럽에 틀어박혀 지냈다. 이후 그의 골프 재능을 아쉬워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사람들 뇌리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져버렸다.

    1972년 5월29일, 라디오시티의 조그만 방에서 존 몬터규는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뒀다. 시러큐스에 있는 동생과 두 명의 누이는 유체(遺體)를 대하려 하지 않았고 매장절차도 거절했다. 그렇게 매킨리 언덕에 있는 안치소에 방치된 지 일주일 만에, 옛 친구인 사진작가 아더 애덤스가 시신을 거두어 흙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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