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트루먼쇼’ 스스로 들어가듯
돌아보면 알파고 충격은 약한 파도
하나의 ‘본캐’에서 여러 ‘부캐’로
단일 직업, 평생직장 세상의 종언
다양성·상대성의 원리 필요한 이유
직장인 혹은 자영업자라는 본캐(릭터)에 더해, 유튜버라는 부캐(릭터)를 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자아를 발견해 가며 재능과 기술을 개발하는 사례다. [동아DB]
사촌동생은 원래 일러스트레이터로 영화 스토리보드 그려주는 일을 했다. 수년 전 개인 아티스트로 전환해 유튜브와 틱톡으로 예술 활동을 알리고 이와 관련한 패션 제품도 제작한다. 사촌처남은 스페인계 미국인 치과의사인데 살고 있는 도시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도 운영하고 있다. 2년 전 풍자를 곁들인 코미디 유튜버로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250만 구독자를 보유했다. 팬데믹 기간 중 에어비앤비는 정리했지만 치과의사 일은 병행하고 있다. 조회수 유지를 위해 매일 촬영과 편집의 노동을 거쳐야 하는 유튜버의 삶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본인도 예전에는 자신이 이런 생활 및 소득 패턴을 가질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류 진보의 다음 국면
“앞으로는 평생직장의 시대가 저물고 직업의 전환이 빨라지므로 한 사람이 인생에서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질 수 있다.”이런 유의 미래 예측을 20년쯤 전 활자로 접했을 때와 달리 가까운 가족을 통해 직접 접하니 체감도가 달랐다. 기술, 라이프스타일, 인간관계, 세계관 등의 변화가 동시에 몰려오며 삶의 방식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갈 때 개인과 사회에 어떤 변화가 닥칠지 초기에는 제대로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올 때도 마찬가지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섰다’는 말을 들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새로운 도구가 등장해도 처음에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 알기 어렵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PC), 1990년대 인터넷, 2000년대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 컴퓨터 칩의 성능, 인터넷 연결 속도, 카메라의 해상도가 각각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런 요소별 혁신이 누적돼 증폭 효과를 보이고 나서야 비로소 정보화 혁명의 결과물을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인류 진보의 다음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 ‘챗GPT’ 개발 회사인 미국 ‘오픈AI’의 샘 알트만 최고경영자(CEO)가 5월 16일(현지 시간) 미국 의회가 최초로 개최한 AI 관련 청문회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지금 이 순간과 1년 후 사이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10년, 20년 후의 세상은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무언가 큰 것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지금의 체제로 21세기 중반을 온전하게 넘길 수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살피기에 앞서 최근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 두 가지를 먼저 짚어보자.
본캐와 부캐의 우열
첫째, 하나의 실체가 각기 다른 속성을 가진 여러 개의 실체로 분화하고 있다. 이전 시대 세계관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단일 직업-평생직장의 세상은 이미 지나갔다. 단선적, 고정적, 절대적 세계관이 퇴조하고 복합적, 가변적, 상대적 세계관이 범람한다. 직업, 캐릭터, 데이트 상대 등 단일하다고 생각했던 실체가 분화, 다변화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동시에 발생하는 여러 사안을 멀티태스킹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소득 창출 수단인 직업도, 본캐-부캐로 분류하는 정체성도, 심지어 예비 단계의 연애도 동시에 여러 개를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고 일반적인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사촌동생에게 들으니 최근 미국에서는 연애 상대를 만나는 행위가 거의 온라인 앱을 통해 이뤄진다고 한다. 누군가와 진지한 만남을 시작하기 전에 누가 나와 더 맞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 남녀 모두 동시에 여러 사람과 데이트하는 패턴이 일반화했고, 이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재미를 위한 설정이긴 하지만, TV 예능 장르는 대중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 양상을 조기 포착해 트렌드를 증폭하고 가속화하는 구실을 한다.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등장하는 유재석 씨의 ‘부캐(릭터)’가 주된 것만 3개(유산슬, 유두래곤, 지미 유)이고 나무위키에 따르면 18개에 달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함의가 들어 있을 것이다. 직장인이 퇴근 후나 주말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자영업자가 영업 종료 후 투 잡, 스리 잡을 뛰는 안타까운 사례도 급증했지만, 자아를 발견해 가며 재능과 기술을 개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나의 원래 정체성인 ‘본캐’는 하나의 단일한 실체다. 다양한 상황과 맥락에 맞게 여러 개의 ‘부캐’를 갖게 되면 그 개인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의 캐릭터일 때보다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초기에는 본캐와 부캐의 구분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각각의 캐릭터에 몰입할수록 종국에는 무엇이 본캐이고 무엇이 부캐인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태가 올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사회적 현상이 ‘여기에도 있을 수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고,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는’, 즉 기존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원리를 담은 양자역학적 패턴을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뉴턴 물리학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확실하고 예측 가능했다. 이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가변적이며 확률적인 현상이라고 바라보는 양자역학의 세계관으로 옮겨왔다. 굳이 평행우주론이나 다중우주론 논의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런 관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넓혀주고 바꿔줄 것이다.
비율의 상대적 차이
둘째, 분리돼 있고 상반된다고 여겨지던 존재 간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있다. 남녀, 음양, 식물과 동물, 고체와 액체 등과 같이 원래는 서로 구분되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생각했던 존재 간의 경계선이 흐려진다. 이렇게 보면 상반되는 속성이 서로 중첩되고 혼합되는 영역이 의외로 넓게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존재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있다기보다는, 한 개체가 보유한 특정 인자(因子)의 보유랑에 따라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 ‘본질의 절대적 차이’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비율의 상대적 차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과거에는 ‘자폐증’이 단일한 질병이라고 여겨졌다. 연구의 진전으로 자폐증은 각 개인의 인지, 의사소통 및 행동 특성에 따라 심각도, 특징, 증상 등이 다양한 스펙트럼 형태를 갖는 질병임이 밝혀졌다. 이에 2013년 이후 ‘자폐 스펙트럼(장애)’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해 치료와 지원 방법도 다양해졌다.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명명 덕에 각 개인의 고유성, 다양성이 반영되고 자폐증을 둘러싼 복잡한 특성을 사회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자폐증 환자’와 ‘정상인’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 누구라도 ‘자폐 스펙트럼’ 연속선상의 어느 지점에 놓일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그 덕분에 타인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게 됐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민족’이라는 표현이 3회 등장하며 ‘한민족, 단일민족’ 의식을 국가 공동체 최고 규범에서부터 강제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이미 오래 전 농촌이나 공단 지역부터 다민족 사회로 변모해 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다민족 사회/국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탓에 대한민국에 이민 와서 귀화한 국민과 그들의 가족을 ‘다문화가정’이라고 불러왔다. 일종의 한국판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표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용어 탓에 이들을 시혜적 지원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고착화한 측면도 있다. 대한민국으로 이주한 국민과 그들의 자녀가 차별받지 않도록 할 책임을 국가와 사회가 회피하고, 개인과 가족 단위에서 돕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최근 외국인도 많이 참석한 세미나에 간 적이 있다. 각자 자기 정체성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나는 4분의 1은 인도, 4분의 1은 말레이시아, 4분의 1은 에티오피아, 4분의 1은 이집트 사람이야.”
실은 우리 공동체도 몽골계, 여진계, 거란계, 일본계, 아랍계, 인도계 등등 다양한 민족의 혈통이 섞인 상태로 형성됐다. 이 점을 상기하면 융복합의 시대, 하이브리드 시대를 더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중년을 맞은 남자와 여자
중년을 맞으면 남자들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여성들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분비량이 각각 줄어 심리적, 신체적 변화가 온다. 남성성, 여성성이 원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노화와 함께 호르몬 분비량이 변하며 함께 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된 성정체성, 성소수자 문제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엔 선천적으로 타고난 호르몬 분비량의 차이 또는 그 밖의 다른 원인들로 인해 타고난 신체와 심리적 자아 간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사례다. 이를 두고 사회적 차별이 있어왔다.이른바 ‘먹고살기에 급급하던’ 수십 년 전 과거에는 자폐 스펙트럼, 인종이나 민족 혈통에 따른 정체성, 성정체성 같은 이슈가 사회적으로 조명받지도 않았고 논란거리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도 개인의 인권과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할 선진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더욱 세밀히 살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도 절대적 기준으로 무 자르듯 가르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이렇게 다차원적·복합적 사회로 변모하는 중에 여전히 정치를 지배하는 논리는 단순한 이분법에 의한 갈라치기 선동이다. ‘내 편 아니면 네 편’ 식의 사생결단식 투쟁이 횡행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는 없다. 새로운 정치와 행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시대착오적 판단을 예방하기 위해 획일성 아닌 다양성, 절대성 아닌 상대성의 원리를 사회 운영체계의 핵심 알고리즘으로 편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김세연
● 1972년 출생
●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 제18·19·20대 국회의원
● 前 여의도연구원 원장
● 前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 저서 : ‘리셋 대한민국’(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