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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논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진보적 언론학자들의 진실 왜곡에 할말 있다

  • 글: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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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공안당국의 물고문에 숨진 사건은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등의 연이은 특종보도로 그 전말이 세상에 알려졌다. 천인공노할 군사정권의 ‘범죄’에 분노한 국민들은 6월항쟁을 일으켰고, 한국 언론은 민주화 투쟁과정을 끈질기게 보도함으로써 값진 승리를 일궈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한국언론의 빛나는 업적이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일부 언론학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감추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우려하며 1987년 민주항쟁과 한국언론의 역할을 되짚어 본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한국 정치사상 가장 빛나는 민주주의 혁명인 6월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었다. 1987년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자, 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건을 향해 끓어오른 국민들의 분노는 온 나라를 진동케 했다. 1980년 피비린내 나는 광주항쟁을 야기하고 정권을 잡은 5공 신군부 세력조차 성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고문 규탄과 민주화 요구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박종철 사건은 당초 고문이 아닌 ‘쇼크사’로 은폐·조작되었다. 그러나 언론이 그 진상을 밝혀냈다. 언론은 군부독재 권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미궁 속으로 빠질 뻔했던 이 사건을 근 1년 동안 집요하게 추적했다. 언론은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권력의 음모를 밝혀냄으로써 독재권력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마침내 거리로 뛰쳐나와 4반세기 이상 지속됐던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민주적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6월항쟁 과정에서도 언론의 역할은 마찬가지였다. 언론은 박종철 사건의 전모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적했던 것처럼, 6월항쟁 보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언론은 6월항쟁의 시발이 된 6·10시위를 계획단계에서부터 대서특필하여 열기를 더했다. 언론은 사실보도뿐 아니라 사설, 칼럼, 심지어는 지면에 게재되는 시(詩)를 통해서도 민주화 항쟁을 고무하는 동시에 5공 정권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으로부터 “혁명을 선동한다”는 비난과 압력이 가해졌지만, 언론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이런 점에서 우리 언론에게 있어 6월항쟁은 붓으로 싸운 민주화 투쟁이며, 6월항쟁에서 언론은 국민 동원을 위한 조직역과 선전역을 맡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근래에 상당수 진보적 언론학자들은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에 대한 언론의 기여를 외면하거나 심지어는 왜곡하고 있다. 우려할 사실은 현재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몇몇 진보적 언론학자들의 한국언론사 저서가 6월항쟁 당시 언론의 역할을 올바르게 기술하지 않아 차세대에게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박종철 사건의 전말과 6월항쟁의 경과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6월항쟁은 붓으로 싸운 민주화투쟁

한국 민주화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사건은 1987년 1월 ‘중앙일보’의 특종보도로 세상에 드러났다. 이어 ‘동아일보’가 추적보도에 나서 연속 특종을 터뜨림으로써 언론사간의 취재경쟁은 뜨거워졌다. ‘중앙일보’가 속보특종을 해냈다면, ‘동아일보’는 발굴특종을 해낸 셈이었다. 1999년 ‘월간조선’이 해방 이후 특종기사 100건을 선정하기 위해 언론계 원로들과 고참기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꼽은 특종기사가 바로 이 사건보도였다.

박종철 사건 보도는 보통의 특종기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보통 특종기사는 그 특종을 캐낸 언론에서 끝나기 일쑤이고, 다른 언론사가 불가피하게 이를 뒤쫓아 보도하더라도 작게 취급하고 만다. 그러나 박종철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연일 속보가 나왔기 때문에 어느 특정사의 특종여부에 관계없이 대부분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비록 가정이긴 하나 ‘중앙일보’의 첫 보도가 없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일보’의 보도가 없었더라도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 뜨거운 취재경쟁이 벌어졌을까. 경찰은 당초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진상규명의 열쇠가 검찰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검찰이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을지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시대였다.

당시의 검찰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우선 검찰이 직접 수사에 나서지 않고, 사건 당사자인 경찰에 수사를 맡겼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다. 검찰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이후 범인 축소조작사건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경찰의 범인 축소조작 사실을 파악하고도 2개월 동안 가만히 있었다.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검찰은 5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발표로 이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후에도 수사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설사 검찰이 용기를 내어 자발적으로 고문치사사건임을 밝혀냈다 하더라도 몇몇 관련자가 처벌을 받았을 뿐, 치안본부장이 구속되고 국무총리가 사임하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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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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