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진보적 언론학자들의 진실 왜곡에 할말 있다

  • 글: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입력2004-02-27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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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공안당국의 물고문에 숨진 사건은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등의 연이은 특종보도로 그 전말이 세상에 알려졌다. 천인공노할 군사정권의 ‘범죄’에 분노한 국민들은 6월항쟁을 일으켰고, 한국 언론은 민주화 투쟁과정을 끈질기게 보도함으로써 값진 승리를 일궈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한국언론의 빛나는 업적이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일부 언론학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감추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우려하며 1987년 민주항쟁과 한국언론의 역할을 되짚어 본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한국 정치사상 가장 빛나는 민주주의 혁명인 6월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었다. 1987년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자, 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건을 향해 끓어오른 국민들의 분노는 온 나라를 진동케 했다. 1980년 피비린내 나는 광주항쟁을 야기하고 정권을 잡은 5공 신군부 세력조차 성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고문 규탄과 민주화 요구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박종철 사건은 당초 고문이 아닌 ‘쇼크사’로 은폐·조작되었다. 그러나 언론이 그 진상을 밝혀냈다. 언론은 군부독재 권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미궁 속으로 빠질 뻔했던 이 사건을 근 1년 동안 집요하게 추적했다. 언론은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권력의 음모를 밝혀냄으로써 독재권력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마침내 거리로 뛰쳐나와 4반세기 이상 지속됐던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민주적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6월항쟁 과정에서도 언론의 역할은 마찬가지였다. 언론은 박종철 사건의 전모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적했던 것처럼, 6월항쟁 보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언론은 6월항쟁의 시발이 된 6·10시위를 계획단계에서부터 대서특필하여 열기를 더했다. 언론은 사실보도뿐 아니라 사설, 칼럼, 심지어는 지면에 게재되는 시(詩)를 통해서도 민주화 항쟁을 고무하는 동시에 5공 정권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으로부터 “혁명을 선동한다”는 비난과 압력이 가해졌지만, 언론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이런 점에서 우리 언론에게 있어 6월항쟁은 붓으로 싸운 민주화 투쟁이며, 6월항쟁에서 언론은 국민 동원을 위한 조직역과 선전역을 맡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근래에 상당수 진보적 언론학자들은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에 대한 언론의 기여를 외면하거나 심지어는 왜곡하고 있다. 우려할 사실은 현재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몇몇 진보적 언론학자들의 한국언론사 저서가 6월항쟁 당시 언론의 역할을 올바르게 기술하지 않아 차세대에게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박종철 사건의 전말과 6월항쟁의 경과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6월항쟁은 붓으로 싸운 민주화투쟁

    한국 민주화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사건은 1987년 1월 ‘중앙일보’의 특종보도로 세상에 드러났다. 이어 ‘동아일보’가 추적보도에 나서 연속 특종을 터뜨림으로써 언론사간의 취재경쟁은 뜨거워졌다. ‘중앙일보’가 속보특종을 해냈다면, ‘동아일보’는 발굴특종을 해낸 셈이었다. 1999년 ‘월간조선’이 해방 이후 특종기사 100건을 선정하기 위해 언론계 원로들과 고참기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꼽은 특종기사가 바로 이 사건보도였다.

    박종철 사건 보도는 보통의 특종기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보통 특종기사는 그 특종을 캐낸 언론에서 끝나기 일쑤이고, 다른 언론사가 불가피하게 이를 뒤쫓아 보도하더라도 작게 취급하고 만다. 그러나 박종철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연일 속보가 나왔기 때문에 어느 특정사의 특종여부에 관계없이 대부분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비록 가정이긴 하나 ‘중앙일보’의 첫 보도가 없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일보’의 보도가 없었더라도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 뜨거운 취재경쟁이 벌어졌을까. 경찰은 당초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진상규명의 열쇠가 검찰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검찰이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을지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시대였다.

    당시의 검찰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우선 검찰이 직접 수사에 나서지 않고, 사건 당사자인 경찰에 수사를 맡겼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다. 검찰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이후 범인 축소조작사건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경찰의 범인 축소조작 사실을 파악하고도 2개월 동안 가만히 있었다.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검찰은 5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발표로 이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후에도 수사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설사 검찰이 용기를 내어 자발적으로 고문치사사건임을 밝혀냈다 하더라도 몇몇 관련자가 처벌을 받았을 뿐, 치안본부장이 구속되고 국무총리가 사임하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앙일보’의 첫 특종은 겨우 사회면 2단짜리 기사였다(1987년 1월 15일자). 신문을 자세히 읽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작은 기사였다. 기사 제목도 경찰 주장대로 ‘쇼크사’였다. 그러나 이 기사는 짧지만 충실했다. 이 기사를 쓴 신성호 기자는 당시 입사한 지 6년째로, 법조 출입을 한 지는 5년이 된 기자였다. 허용범의 ‘한국언론 100대 특종’에 의하면 신 기자의 행운은 그의 열성과 노력의 산물이었다.

    첫 제목은 ‘쇼크사’

    신 기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체크’를 위해 검찰청사를 돌다가 한 검찰간부의 방에 들렀다. 이것이 특종을 얻는 계기가 됐다. 신 기자는 검찰간부가 내뱉은 “경찰 큰일 났어”란 말을 놓치지 않았다. 간부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신 기자는 기지를 발휘하여 “그러게 말입니다. 요새 경찰이 너무 기세 등등해졌어요”라고 받아넘겼다. 그러자 그 검찰간부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아침에 들으니 그렇다고 하데요.”

    “시끄럽게 생겼어. 어떻게 조사했기에 사람이 죽은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

    신 기자는 이를 단서 삼아 검찰간부 몇 명을 더 접촉해 취재를 마쳤다. ‘중앙일보’는 신 기자의 보고를 토대로 경찰, 서울대, 그리고 부산에서 보충취재를 한 뒤 이를 종합하여 기사화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취재하는 데 시간이 걸려 석간 1판에 넣지 못하고 1.5판부터 기사를 게재했다. 만약 신 기자가 이날 오전체크를 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신속하게 보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경찰과 검찰, 그리고 신군부는 여론의 악화를 두려워하여 이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처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날 ‘중앙일보’의 기사는 어떤 내용일까. 제목을 ‘쇼크사’로 달았으나 인용부호를 붙였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박종철군이 경찰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검찰이 수사중’이라는 대목을 기사 앞부분에 넣어 구타나 고문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풍겼다. 박군이 어떤 혐의로 경찰수사를 받았는지, 그리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은 사실은 쓰지 않았으나 가난한 집안 출신의 서울대생이고 운동권에 가담한 사실을 기사화함으로써 시국사범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이만하면 제1보로서 별로 손색이 없는 기사였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이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朴鍾哲군(21·서울大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朴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朴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

    학교측은 朴군이 3∼4일 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한편 釜山市 靑鶴洞 341의 31 朴군 집에는 朴군의 사망소식을 14일 釜山시경으로부터 통고받은 아버지 朴正基(57·청학양수장 고용원)씨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 있었다. 朴군의 누나 朴恩淑(24)씨는 지난 해 여름방학 때부터 朴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朴군은 釜山 土城국교·嶺南중·惠光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 20만원으로 가정형편이 어렵다.》

    담당의사 증언으로 밝혀진 ‘물고문’

    ‘중앙일보’가 박군이 죽은 바로 그 다음날 신속하게 첫 보도를 하지 않았다면 사건의 진상이 비밀에 부쳐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그대로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동아일보’가 ‘중앙일보’에 첫 보도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이 사건을 추적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낙종은 더 큰 특종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특별취재팀을 만들어 현장에 투입해 큰 성과를 거뒀다.

    ‘중앙일보’는 첫 특종보도를 했지만 ‘고문’이라고 쓰지는 못했다. 고문이라고 보도할 사실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그 이튿날자 신문에 2단 기사로 속보를 실어 검찰의 박군 사인에 대한 조사착수와 시체부검 사실, 그리고 가혹행위가 있었다면 검찰은 담당 경찰관을 처벌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 부검 결과 무릎의 찰과상과 손가락 사이에 멍, 그리고 오른 쪽 폐에서 탁구공만한 크기의 출혈반 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처음부터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3판(16일자 지방판)에서 ‘중앙일보’보다 기사를 더 키워 중간 톱기사로 보도한 데 이어, 이튿날(16일자) 서울 1판부터는 사회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형 중간 톱기사로 박종철 사건을 취급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물고문으로 질식 사망했다는 치안본부의 조사결과를 전한 1987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위)와 12대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박종철 고문사건과 관련해 질의하는 야당의원.

    새로운 사실도 많이 보도됐다. ‘동아일보’는 박군 사망 당시 그를 담당했던 의사를 인터뷰하여 사건의 가닥을 잡은 것이다. ‘동아일보’가 박군이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을 보도하는 데 결정적 증언을 해준 의사 오연상(吳演相·중앙대부속병원 용산병원)씨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군이 조사받던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조사실에 도착했더니 박군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밝혔다.

    이 증언은 ‘심문 도중 수사관이 ‘쾅’ 하고 책상을 치자 박군이 ‘억’ 하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는 경찰 발표와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오씨는 “조사실에서 박군을 살리기 위해 그의 기관지에 튜브를 집어넣어 인공호흡을 시키고 충격요법으로 캠플주사를 놓고 약 30분 동안 심장마사지를 계속했으나 박군의 심폐기능은 소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이날자 신문 사설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조사 받던 대학생의 죽음’이란 제하의 이 사설은 박군이 조사 시작 불과 30분 만에 ‘억’ 하며 책상 위에 쓰러졌다는 경찰 발표는 납득가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그의 사인이 “경찰 발표대로 쇼크사였는지, 딴 이유가 있어서였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히라”고 촉구했다.

    ‘동아일보’의 결정적인 특종기사는 17일자에 나왔다. 의사 오씨가 마침내 “박군은 복부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는 사망시 들리는 수포음이 전체적으로 들렸다”면서 “그가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수사관으로부터 들었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오씨는 또한 “비좁은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다”고 덧붙여 박군이 물고문으로 질식 사망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 보도는 국민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15일 밤 실시된 박군 사체 부검결과가 나오려면 빨라야 18일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오씨의 증언기사의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 외에도 이날자 신문에 화장장에서 박군의 아버지가 “철아 잘 가그래이”하고 절규하는 모습을 묘사한 취재기자의 칼럼 ‘창’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김중배 칼럼을 실어 온 국민을 분노케 했다.

    전 언론의 ‘융단 폭격’

    박종철 사건은 ‘동아일보’의 물고문 기사를 계기로 동아 중앙뿐 아니라 조선 한국 경향 등 대부분의 신문에서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온 나라는 박종철 사건으로 술렁거렸다. 야당인 신민당은 17일 오전에 열린 긴급확대간부회의에서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키로 결정했다. 이 당의 5인진상조사위원회는 이날 중앙당에 “박군은 고문 등의 가혹행위로 인해 사망에 이른 점이 인정된다”고 보고했다. 5인진상조사위는 박군이 연행 수시간 만에 급사할 신체조건이 아니었고 사망 당시 대변이 하의에 묻어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박군의 사인을 고문에 의한 가혹행위로 단정했다. 제2야당인 국민당은 임시국회 소집문제를 원내총무간에 협의토록 하고, 우선 상임위원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여러 시민단체는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미국무성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철저한 조사를 통해 잘못이 드러난다면 한국당국이 엄중하게 법을 적용시킬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19일 오전 10시 드디어 치안본부의 박종철 사건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동아 중앙 등 석간지는 이 날짜에, 조선 한국 등 조간지는 이튿날자 조간신문에서 지면을 온통 조사결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1면을 비롯해 6개 페이지에 걸쳐 박종철 사건을 다루었다. 하루 12페이지의 신문을 발행하던 때임을 감안하면 박군 관련 기사의 비중은 상당한 것이었다.

    강민창(姜玟昌) 치안본부장은 이날 발표에서 박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의 조사관인 2명의 경찰관에게서 물고문을 당해 질식해 사망한 사실이 경찰 자체조사 결과 밝혀졌다고 밝혔다. 이에 관련 경찰관 2명은 구속되었고, 이 사건에 대한 감독 책임을 물어 수사단 단장(경무관)을 직위해제했다.

    치안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박종철 군은 목 부위의 압박에 의해 질식사했다. 수사관들은 박군을 연행한 뒤 위협수단으로 수사단 5층 취조실에서 박군의 머리를 욕조물에 한 차례 잠시 집어넣다 뺐으나 박군이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박군의 머리를 욕조에 밀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 사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인(死因)은 ‘경부(頸部) 압박에 의한 질식사’이며, 부검에서 나온 복부팽만은 조사관의 인공호흡과 초진의사의 호흡기 투입으로 인해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또한 폐조직 검사결과 폐에서는 수분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대목은 박군이 물고문으로 물을 많이 먹어 사망했다는 초진의사 오씨의 말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박종철 사건보도가 이날 치안본부 발표로 일단락되지 않은 것은 이 사건이 워낙 중대하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신문들은 고문경찰관 2명의 구속 이후 사건 속보와 함께 연일 하늘을 찌를 듯한 국민의 분노를 전하느라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예컨대 ‘동아일보’의 경우 20일자 1면에 신민당 민추협 신구교 등의 범야기구인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이날부터 26일까지 1주간을 박종철군 추모기간으로 선포하는 한편 이 기간 동안 각종 항의집회를 갖기로 한 소식을 1단 기사로 자세히 보도했다.

    또 서울대에서는 500여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가 열려 침묵시위가 벌어졌으며, 200여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분향소를 설치하고 시위한 사실도 보도되었다. ‘동아일보’는 박종철 사건 발표 이후 국회 및 정치권과 재야 학원 종교계의 움직임 등 관련기사를 박종철군 추도회가 열린 그해 2월7일까지 약 20일간 매일 연거푸 1면 톱기사 또는 중간 톱기사로 실었다. 대서특필 행진은 조선과 중앙 한국 경향 할 것 없이 나머지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종철 사건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해 5월 들어 이 사건은 다시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박군 고문사건 관련자가 단 두 명이 아니라는 풍설이 검찰 주변에서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구속 기소된 고문경관 중 조한경(趙漢慶) 경위의 가족은 2월 조 경위가 상사로부터 강요받아 범인을 2명으로 축소하기로 동의했다고 검찰에 폭로했다. 검찰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도 어물어물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5월18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년 기념 추모미사 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金勝勳) 신부가 박종철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19일자 ‘동아일보’ 등 신문의 사회면에 실린 김 신부의 성명은 “박군을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은 현재 구속 기소되어 재판에 계류중인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姜鎭圭) 경사가 아니라 학원문화 1반 소속 황정웅 경위와 방근공 경사, 이정오 경장 등 3명으로 현재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통일민주당은 이 발표를 중시하여 당 차원에서 진상을 조사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은 이튿날 이를 부인했다. 특히 검찰당국자는 “고문치사의 경우 법정형이 최고 무기징역까지 규정되어 있는데 누가 자신이 진범이 아니면서 진범이라고 허위자백을 하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이 당국자는 한마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그는 “공범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몰라도, 진범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과연 이 당국자의 말대로 박종철 사건 관련자는 모두 5명이라는 사실이 며칠 후 검찰수사로 밝혀졌다.

    검찰은 더 이상 내막을 덮어둘 수가 없어 21일 진상을 발표했다. 정구영(鄭銶永) 서울지검 검사장은 범인이 이미 구속된 2명 이외에도 3명이 더 있으며 이들을 구속했다고 발표하면서 5명의 수사관이 짜고 범인을 축소 조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범인 축소조작으로 국민의 분노 폭발

    이러한 정 검사장의 발표는 22일자 조간 및 석간신문에 일제히 1면 톱기사로 대서특필되었다. 그런데 이날자 ‘동아일보’의 기사는 다른 신문의 기사와 달랐다. ‘동아일보’는 검찰에서 발표한 사실 이외에, 경찰의 범인축소결정이 관련 상사들의 모임에서 모의 결정되었다는 독자적 취재내용을 보도했다. 기사엔 ‘관련상사 모임에서 범인 축소조작 모의’라는 충격적 제목을 달았다. ‘동아일보’는 드디어 23일자 1면 톱기사에서 ‘검찰이 범인축소조작혐의자로 박처원(朴處源) 대공처장 등을 지목하고 이들을 금명 소환할 것이며 모의사실이 드러나면 구속할 것’이라는 내용도 보도해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동아일보’의 두 번째 특종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박 처장 등이 처음부터 범인축소모의에 가담했으며, 치안본부의 박종철고문치사사건 첫 발표가 있기 하루 전인 지난 1월18일 새벽 고문관련자 5명 중 2명만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범인 축소조작에 상부의 지시나 개입이 없었다는 검찰 발표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이어 검찰이 범인축소조작 사실을 5월초에야 알게 되었다고 밝힌 발표가 허위라는 사실도 폭로했다. 김성기 법무장관과 서동권 검찰총장은 이미 2개월 전부터 경찰의 범인 은폐조작사건을 알고 있었으나 그동안 이를 묵인해왔다는 것이다. 경찰뿐 아니라 검찰의 신뢰 또한 땅에 떨어졌다.

    검찰은 마침내 5월29일 박 치안감 등 5명의 대공수사처 간부들을 범인축소조작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태로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장관, 이영창 치안본부장, 김성기 법무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등 공안관련 수뇌부가 퇴진했다. 결국 5공 정권은 식을 줄 모르는 국민의 분노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26일부터는 박 처장 등을 사법 처리하기로 했다. 수뇌진이 교체된 검찰은 수사진을 서울지검에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바꾸었다.

    박종철 사건은 1주년을 맞아 다시 주목을 받았다. ‘동아일보’가 1988년 1월12일자 사회면 톱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박군의 부검을 맡았던 황적준(黃迪駿) 박사의 일기를 입수하여 사건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애초에 박군의 사인이 고문치사임을 보고받고도 쇼크사로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며, 범인의 축소조작에도 가담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거대한 드라마

    ‘동아일보’는 또한 당시 담당검사였던 안상수(安商守) 검사를 인터뷰하여 검찰이 경찰의 범인축소조작을 알고도 상부의 지시로 수사를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경찰관 2명만을 서둘러 기소했다는 증언을 아울러 실었다. 동아로서는 세 번째 특종이었다. 이 기사로 강 전 본부장은 1월15일 검찰에 소환되어 구속됐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대다수 신문들은 강 전 본부장의 범인축소 관여 및 구속 소식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6월항쟁의 시발점이었던 6·10시위는 박종철고문치사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조직된 집회였다. 1987년 5월22일 박종철 사건의 범인이 경찰고위층에 의해 축소 조작된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어 온 국민의 분노가 끓어오르자, 이튿날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6월10일 전국 규모의 대대적 항의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6월10일은 마침 여당인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당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는 날이었다.

    이날자 신문에 보도된 6·10시위 기사에 따르면 재야인사 134명은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이 같은 결의를 한 다음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박종철군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범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위윈회는 김영삼 김대중 김수환 등 고문 12명과 계훈제(桂勳梯) 박형규(朴炯圭) 송건호(宋建鎬) 등 공동위원장 35명, 김상근(金祥根) 오충일(吳忠一) 등 집행위원 87명으로 구성되었다. 준비위는 성명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온 국민의 분노를 현정권에 보여주기 위해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미 2월7일 박종철군 추도집회와 3월3일 국민평화대행진을 주도한 바 있었다.

    6·10시위 개최를 결정한 5월23일부터 6·29선언이 나올 때까지 1개월 간의 상황은 한국현대사의 거대한 드라마였다. 언론은 부도덕한 신군부 정권의 범인축소조작을 기사로, 사설로 맹렬히 비난하였고, 국민의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다. 23일 ‘동아일보’ 사설 두 건은 모두 정권을 규탄한 것이었다. 하나는 ‘국민 속이고 우롱한 죄’였고, 다른 하나는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22일자 조선일보의 사설은 ‘누가 은폐 조작했나-박종철 사건의 새 사실에 놀란다’였다.

    이러한 열기 속에서 25일 ‘동아일보’ 기자 132명은 시국성명을 통해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하여 국민적 여망인 민주화가 더 이상 지체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성명은 AP와 일본 아사히신문 등 외국언론에 널리 보도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26일 명동성당 저녁 미사에서 “동아일보 기자들이 시국성명을 발표한 것은 박해와 희생을 무릅쓴 용감한 궐기”라고 찬사를 보냈다. 27일에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동아일보’ 기자들의 결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끓어오르는 6월항쟁에 불을 붙였다.

    언론은 6월10일의 집회를 앞두고 국민의 행동요강까지 상세하게 보도하는 등 대회홍보에 열을 올렸다. 일부 신문은 6월1일자 1면 기사를 통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성명을 소상하게 실었다. 이 단체는 5월27일 야당과 재야단체의 대표 2000여명이 발기인이 되어 만든 조직으로 개헌 거부의사를 밝힌 전두환 대통령의 4·13조치 백지화와 직선제 개헌 쟁취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국민운동본부는 30일 회의에서 6·10시위에서 박종철 사건 규탄과 아울러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기로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검찰의 범인축소 모의를 특종 보도한 1987년 5월22일자 동아일보(위)와 6월항쟁 당시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아래).

    이날의 행동요강은 ▲전국의 자동차는 대회 당일 오후 6시 정각 애국가가 끝남과 동시에 경적을 울리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은 타종하여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적 의지를 표시하고 ▲모든 대회 참가자는 태극기를 지참하고 대회장에 나오도록 했다. 국민운동본부의 인명진(印名鎭) 대변인은 “더 이상 못 속겠다. 거짓정권 물러나라” 등 4종의 대회 표어도 공개했다고 ‘동아일보’는 전했다.

    정권이 반정부 시위 선동으로 간주하는 이 같은 상세한 보도는 언론으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다. 그러나 언론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KBS는 9시뉴스에서 박종철 사건과 관련하여 당국 발표만을 보도했고, 천주교사제단 성명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에 18개 여성단체 대표들은 30일 오전 회합하여 시청료 거부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민주화투쟁 전국으로 확산

    격렬한 민주화 시위는 이미 5월27일부터 시작됐다. 서울대를 비롯한 23개 대학은 27일부터 시위를 위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결전의 날인 6월10일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공권력으로 시위를 막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주요 재야인사들을 가택연금하기로 했다. 이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5일 정부가 국민대회를 원천봉쇄하여 무산될 경우 각 참여 단체별로 교회 성당 사찰 등지에서 11일 오전 6시까지 단식농성을 하기로 결의하는 등 투쟁 강도를 높였다. 운동본부는 전국민이 10일 밤 9시부터 10분간 소등한 뒤 TV를 보지 않는다는 국민행동요강을 추가했다.

    언론은 이날부터 정부와 시위대의 충돌을 우려하는 긴급 특집을 마련하여 정부의 양보를 촉구했다. 29개 대학생 1500여명은 결전일을 나흘 앞둔 6일 이미 고려대에 모여 연합대동제를 지내며 6·10시위에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정부는 8일 내무·법무장관 합동담화문을 통해 6·10시위는 불법집회이므로 강력히 봉쇄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운동본부는 전국 20개 도시에서 대회를 동시 개최하기로 하고 대회 명칭도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언론은 이 대회의 상세한 식순 또한 보도했다. 정부는 6·10시위 하루 전날인 9일 경찰 5만8000명을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민주당은 같은 날 총재단 회의에서 대회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당일 당원 5000명으로 하여금 도보 행진키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날 언론은 사설과 칼럼 등을 통해 거듭 정부에 이성적 대처를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이날자 사설 ‘6·10 전야 마지막 권고’에서 “지금 우리가 줄 수 있는 마지막 권고는 이성과 자제라는 말뿐”이라고 충고했다. ‘조선일보’는 10일자 사설에서 ‘불상사만은 없기를’이란 제목으로 정부의 자제를 촉구했다.

    마침내 운명의 날인 6월10일. 6·10국민대회에는 전국 20여개 도시에서 수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다 점차 격렬한 시위로 변했다. 경찰에 연행된 참가자만 3831명에 이르렀고, 재야인사 등 220여명이 구속됐다. 시민과 경찰 모두 768명이 부상했고 16개 파출소가 파손되었다. 이 소식은 이튿날 신문에 일제히 1면 톱기사로 대서특필되었다.

    6·10 집회에서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6월항쟁은 파상적으로 전개되었다. 6월10일 시위 때 시위대원 일부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자 이들을 해산시키는 방법을 둘러싸고 5공 정권 내부에서는 연일 대책회의가 열렸다. 군대를 풀어 농성을 해산시키자는 강경론과 경찰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온건론이 맞섰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온건론 쪽으로 기울었다. 시위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이 시위에 합류한 사실에 정부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18일에는 70여 대학에서 학생들의 심야시위가 열리는 등 전국 대도시에서 격렬하게 시위가 벌어지면서 민주당마저 폭력시위를 자제할 것을 호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동아일보’는 19일자 신문을 통해 ‘4·13조치 철회만이 위기 수습책’이라는 김수환 추기경과의 회견기사를 실어 다시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언론은 20일자에서 레이건 미국대통령이 한국 사태를 우려하며 개헌 논의의 재개와 시위 대응 자제를 촉구했다는 뉴스를 크게 보도했다.

    노태우 민정당 대선후보의 ‘민주화 선언’이 나온 6월29일은 월요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전부터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2일 미국의 개스턴 시거 국무성 동아시아담당차관보가 ‘한국사태에 대한 군부개입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발언한 내용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22일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영수회담이 열려 개헌 등 정치 일정을 여야합의로 할 것에 의견 일치를 보아 경색된 정국에 돌파구가 마련됐다. 이것은 사실상의 4·13조치 철회였다. 김대중씨에 대한 가택연금도 해제키로 했다.

    이러한 가운데 26일에는 다시 전국적으로 대규모 행진이 개최되어 37개 시읍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크게 충돌했다. 연행자만 3400여명에 달했다. 전국 주요 도시가 모두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긴박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인 29일 마침내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이 발표되어 민주화의 새벽 동이 트게 된 것이다.

    언론은 6월항쟁 기간 동안 벌어진 사태를 대서특필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두 신문은 6월10일부터 30일까지 연속하여 이 사태를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또한 매일 사회면, 기획면을 통해 관련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사설, 칼럼, 좌담회 등 의견란을 통한 대정부 캠페인은 단기간 동안 엄청난 양을 보였다. ‘동아일보’의 경우 6월 한달 동안 이 사태에 관련한 사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와 모두 26건에 달했고(5일간은 하루 2건씩), 사내외 필진이 쓴 칼럼은 17건에 달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간 동안 사설 31건(10일간은 하루 2건씩), 칼럼 12건을 통해 이 사태를 다뤘다. ‘동아일보’는 6월17일자 6면에서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성숙함을 찬양하는 한운사의 시 ‘대비약’을 실어 6월항쟁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세월이 녹으리라모든 것이 녹으리라눈앞에 광명이 가득 비치리라

    대비약껑충 뛰었다.껑충 뛰어넘었다.오 !영리한 민족이여축복받은 민족이여 !

    6·29선언이 발표되던 날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는 서울시내에서만 1판 신문이 40만2800부라는 놀라운 부수가 가두에서 팔려나갔다. 이는 언론과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혼연일체 였음을 의미한다.

    김대중 정권과 언론 투쟁사 왜곡

    김대중 정권 당시인 2001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기자연맹(IFJ) 제 24차 총회는 한국언론발전을 위한 결의를 채택했다. 이 결의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들어 있다. “1987년 이후 언론자유의 회복은 언론인 스스로의 투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에 힘입은 것”이란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국제기구가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해 어떻게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국내의 어떠한 사람들이 이러한 결의가 나오는데 협력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경위가 어쨌든 오랫동안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양심적 한국 언론인들, 특히 5공 신군부 정권하에서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을 보도한 해당 언론인들은 이 결의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모욕을 받은 셈이다. 더욱 의아스러운 것은 이 결의 가운데 ‘기본적으로’ 운운한 구절은 한국어 텍스트에만 들어 있는 표현이며 영문 텍스트에는 없다는 점이다. 영문 텍스트에는 “The increase in media freedom since 1987 is a result of struggles by the people for democracy, and not a result derived from struggles by journalists themselves”라고 되어 있다. 축어역(逐語譯)하면 “1987년 이래의 언론 자유 증대는 국민들의 민주주의 투쟁의 결과이지 언론인 자신의 투쟁에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로 해야 할 것이다. 영어 텍스트의 문맥이라면 언론자유의 발전이 언론인의 투쟁에서 얻어진 결과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 되고 만다. 이쯤이면 한국 언론인들은 국제사회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사실 관계조차 모르면서 비판

    보수적인 학자와 진보적인 학자 모두 박정희 시대와 신군부 시대에 나타난 언론의 굴곡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에 있어 언론의 역할은 인정하는 바이다. 진보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교수는 저서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에서 한국에 민주화를 가져온 1987년 6월항쟁에 대한 당시 언론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 교수는 “언론은 … 한국 현대정치사의 결정적 계기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것은 언론의 비판적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예증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군부권위주의의 해체를 가져오는 데도 역시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언론의 역할은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368쪽)고 쓰고 있다.

    그러나 막상 언론학을 전공한 상당수 진보적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은 마치 하나의 유행 현상처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6월항쟁에 대한 당시 언론의 기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강준만 교수이다. 그는 저서 ‘권력변환-한국언론 117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543~544쪽).

    ‘1986년 6월에 발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도 전두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의 부도덕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와 ‘보도지침’에 따른 왜곡된 보도만을 내보냈다. 게다가 촌지까지 받았다 …(중략).

    그 광란의 세월은 1987년 5월18일 밤 8시30분에 벌어진 한 사건으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5·18 광주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미사’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끝난 뒤 홍제동성당의 주임신부 김승훈이 가톨릭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은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박종철은 경찰의 고문을 받다가 87년 1월14일에 사망했는데 그 간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죽었다”는 식으로 해명성 보도자료를 돌리는 등 진상을 은폐 조작해 왔었다.

    이 성명의 위력은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를 무력화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 성명서를 기점으로 하여 6·10항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강 교수는 박종철 사건이 쇼크사가 아닌 고문치사사건이라는 사실이 그해 5월18일 가톨릭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으로 비로소 진상이 폭로된 것처럼 쓰고 있다. 사제단 성명은 이미 앞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검찰에 구속된 이 사건관련 범인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이었지, 사건 자체를 담은 성격은 아니었다.

    강 교수는 박종철 사건의 발생과 언론의 보도 등 경과를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인용한 사제단 성명의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강 교수가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에 있어 당시 언론의 역할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강 교수는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에서 언론의 기여를 전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언론인들이 침묵할 수 없는 이유

    ‘새로 쓰는 한국 언론사’의 공동저자인 정대수 교수는 신군부 치하의 언론상황을 기술하고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을 설명하면서도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만 소개하면서 “이 사건은 재야와 야당을 묶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게 함으로써 전두환 정권과의 투쟁에 전국민의 역량을 결집시키도록 하는 한편 전두환 정권의 신뢰성은 물론 정당성까지도 뒤흔들어 놓았다”고만 쓰고 있다(367쪽). 차배근 교수 등이 공동저자인 ‘우리 신문 100년’ 역시 1960년의 4월 학생혁명 당시 신문의 역할에 언급하여 “신문은 민중과 더불어 민권투쟁의 선봉에 섰다”며 다섯 페이지에 걸쳐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면서도, 1987년의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202~207쪽).

    한국언론사의 개척자적 저술이라 할 최준의 ‘신보판 한국신문사’ 역시 5공 시절의 언론을 다루면서도 박종철 사건이나 6월항쟁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그는 신군부가 단행한 언론통폐합과 법정언론단체의 설립, 그리고 경제적 기업적 특혜, 그리고 노태우의 6공 언론까지 간단하게 다루고 있지만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에서 언론 역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424~429쪽).



    자신의 사관(史觀)과 언론에 관한 소신에 따라 한국의 현대언론사를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학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있었던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거나 미처 알지 못하고 판단을 내리는 일은 피해야 한다. 언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6월항쟁 당시 언론 역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자화자찬하는 것은 언론으로서 정도(正道)가 아니다. 스스로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안 했다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언론이 이룩한 일을 어떤 이유에서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역사 기술에 대해서 언론인들이 침묵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글을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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