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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KGB 비밀문건 들고 주석궁 찾은 김정일, “이젠 내가 군을 쥘 때가 됐습니다”

  • 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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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도화선 된 ‘소련 간첩단’ 사건●“1000만달러 주면 유학생 포섭자 명단 넘겨주겠다”● 1991년 여름, 군 지휘권 둘러싼 김일성과 김정일의 담판● 인민무력부 부참모장, 교도지도국 부국장, 대외사업국장 긴급체포●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작가 리진우의 처형● 보위국 여성공작원 제보로 시작된 ‘6군단 쿠데타 모의’의 실체●“안기부 내통자들이 6군단 포를 평양 향해 조준했다”●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와 국가안전보위부의 권력다툼● 황해제철소 농성진압 전말과 ‘온 나라의 선군정치화’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1970년대부터 아들에게 서서히 권력을 인계하던 김일성 주석이 마지막 순간까지 내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 인민군에 대한 지휘권, 즉 ‘최고사령관 직위’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1991년 겨울 급작스럽게 김정일 당시 조직비서의 최고사령관 추대를 발표했고, 이후 김정일 위원장은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숙청을 단행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의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아’ 사건과 1995년의 ‘6군단 사건’이다.‘신동아’는 ‘김일성 사망 직전 父子암투 120시간’(2005년 8월호)과 ‘親김일성 세력 제거작업 ‘심화조 사건’의 진상’(2005년 10월호)이라는 제목으로 북한 핵심 권력기관에서 일하다 탈북해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전직 관료의 수기를 게재한 바 있다. 이번에 공개하는 문서는 1990년대 김 위원장이 인민군의 군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 그간에는 ‘쿠데타 모의’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이 시기 각종 조직사건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수기에 따르면, 1991년 여름 몰락 중이던 소련 가안보위원회(KGB) 동아시아담당 요원으로부터 ‘북한 내 소련 포섭자 명단’을 입수한 김 위원장은 이를 근거로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벌여 최고사령관 지위를 승계하는 데 성공한다. 취임 이후 명단을 근거로 소련 등의 군사교육기관에 유학한 군부 내 비토 세력에 스파이 혐의를 씌워 대대적으로 숙청한 그는, 원응희(북한식 표기로는 ‘원응히’) 인민무력부 보위사령관을 중심으로 강력한 친위세력을 만들어 군 전체를 견제한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각급 부대가 ‘외화벌이 사업’에 몰두하면서 지휘서열이 흐트러지자, 이번에는 함경북도에 있는 6군단 지휘관들에게 ‘남한 안기부와 내통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슈화하고 이들을 사형시킨다. 이런 사건을 통해 총 1만5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처형, 숙청, 조사한 보위사령부는 명실공히 ‘선군 정치의 기수’가 되어 최고 권력기관으로 떠오른다. 이후 ‘황해제철소 농성’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민간에까지 개입하는 보위사령부의 위세를 경계한 김 위원장은 군권 장악이 완료됐다고 판단하자 보위사령부를 다시 총정치국에 예속시켜 권한을 축소한다. 한때 최고 실세로 군림했던 원응희 사령관 또한 독직혐의로 해임당해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북한 권력전환기의 상황과 분위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수기의 전문을 게재한다. 독자에게 생소한 표현은 일부 수정했으나, 고유명사는 북한식 표기를 그대로 살렸다.]

김정일에게 김일성이 가장 마지막으로 넘겨준 권력 직위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이다.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가 공식 발표된 것은 1991년 12월24일 열린 전국중대장대회에서였다. 이 날은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생일이기도 했다.

이념 국가인 북한에는 국가적 기념일이 많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2·16(김정일 생일)과 4·15(김일성 생일)는 물론 4·25 인민군 창립절, 9·9 공화국 창건절, 10·10 당 창건절이 있다. 새 최고사령관 추대를 선포하는 일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2월16일이나 4월15일, 4월25일이 적절했겠지만, 김일성은 굳이 12월로 날짜를 정했고 중대발표를 위해 전국중대장대회를 열었다.

인민군 모범 중대장들을 대거 평양에 불러들인 대규모 대회는 1980년대에 마지막으로 열렸던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 규모를 능가할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각 병종의 군, 사단 깃발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수천명의 대회 참가 군인이 수령 만세, 혁명 만세를 불러 젖히는 대회장에서, 백발의 김일성은 자신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김정일 동지를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한다”고 소리쳤다. 수많은 대회 참가자나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이 굳이 한 해가 다 끝나가는 12월말에 급작스럽게 중대발표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이면에 있었던 일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조용하고 은밀히 퍼져 나갔다.



당 선전선동부가 언론과 방송을 앞세워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소식을 연일 소개하며 온 나라에 명절 분위기를 강요하던 그 축제는 사실상 김정일의 작품이었다. 내각은 당에 소속돼 있고 당은 조직부가 통제하고 있어 명색만 총비서이고 주석이던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이란 직함마저 김정일에게 내놓는 것은 곧 인생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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