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한 해 현대자동차 임직원들은 신형 그랜저(‘그랜저 TG’)의 눈부신 판매실적에 넋을 잃었다. 2005년 5월 출시된 그랜저 TG는 지난해 말까지 19개월간 14만1083대가 팔려 나갔다. 1998년 출시된 그랜저 XG의 7년간 총 판매량 30만여 대의 절반에 가깝다. 2006년 한 해 그랜저 TG의 판매량은 그랜저 XG의 2004년 실적과 비교해 내수와 수출물량 모두 2배 이상 늘었다. 말 그대로 ‘대박’이 터진 것이다.
지난해 LPG차(장애인용, 렌터카, 영업용)를 제외한 현대 쏘나타의 판매 실적은 6만5000대 수준. 그런데 그랜저 TG도 가스차 21%를 제외하면 6만5755대가 팔렸다. 2005년 12월과 2006년 1월에는 국내 모든 승용차 브랜드 중 1개월 판매량 기준으로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국내 대형승용차 판매기록으로는 전무한 실적이다.
영업사원들은 신이 났고, 초창기에 차를 주문한 사람들은 길게는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애마’를 만져볼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 서울 강남지역 판매왕 차동환 차장(선릉지점)은 “현대차 입사 13년 이래 대형승용차를 이렇게 많이 팔아본 것은 처음이다. 판매왕인 나조차 믿기지 않는 실적”이라고 했다. 그는 그랜저 TG 출시 후 지난해 말까지 88대의 TG를 팔았다. 그랜저 단일 상품으로만 혼자 3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그랜저 TG가 어느새 전체 대형승용차 시장의 63% 이상을 차지하자 자동차 전문가들은 “TG가 잠재하는 국내 대형승용차 수요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고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정작 현대자동차 내부에선 이런 세몰이에 대해 우려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그랜저라는 브랜드가 유지해온 희소성이 평가절하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대중화에 따른 ‘개체존엄성’의 파괴는 차의 성능, 디자인과 관계없이 대형승용차로서 그랜저의 ‘고품격’ 이미지를 손상할 가능성이 크다.
角 그랜저, 깍두기, 그랜다이저
일반적으로 동일한 브랜드의 상품가격이 올라가면 수요는 줄어드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그랜저 TG는 이전 브랜드인 그랜저 XG 동급보다 판매가격(옵션 품목을 제외한 기본가격 기준)이 평균 691만원이나 올랐는데도 판매량은 2004년보다 오히려 2배 이상 늘었다. 자동차업계에서 ‘출시효과’로 불리는 판매량 반짝 증가 현상(출시 후 5개월)이 끝난 지도 1년이 넘었지만 그랜저 TG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한국인에게 그랜저는 ‘부자와 상류층의 차’라고 각인돼 있다. 탈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다면 그랜저 TG의 이 같은 폭발적인 판매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불과 몇 년 만에 고급 대형승용차를 구입하고 유지할 만한 부자와 상류층이 그만큼 늘어났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랜저가 준중형차나 중형차로 ‘다운그레이드’ 된 것도 아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지난 20여 년간 4세대를 이어온 그랜저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