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슬픔을 나누는 지혜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7-09-05 2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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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을 나누는 지혜
    2001년 무렵이다. 승객들로 가득한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19세기 조선 사람 심노숭이 쓴 ‘눈물이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의 아내가 먼저 죽었다. 그도 인간이니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위의 글은 자신의 눈물을 바라보며 스스로 던지는 질문들이다. 눈물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눈에 고여 있던 물이 그냥 흘러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눈물이 솟구치는 것일까? 과연 눈물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고리타분한 유학자의 관념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구절들을 읽어가는 동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 눈에도 눈물이 한껏 고였던 것이다. 보기와는 달리 나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니다. 가끔, 아주 가끔씩 운다. 그런 내가 출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그만 눈물을 흘릴 뻔했던 것이다. 나는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지하철의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가서야 나는 고개를 내릴 수 있었다.

    한동안 그 이유가 궁금했더랬다. 왜 그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는가? 나는 아직 가까운 가족과 사별하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 내가 소설가이긴 하지만, 그런 게 어떤 경험일까 궁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능하면 나는 아내를 잃은 심노숭의 슬픔 같은 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은 고였다. 그와 같은, 눈물은 과연 무엇일까? 내 눈에 고인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자면 ‘살구를 따고’란 시를 읽어야만 한다. 장석남의 시다. 이렇게 시작한다.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 올라간 가지 사이사이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서른여섯 살이 된 시인이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나무에 매달린 살구를 딴다. 살구를 따내자, 가지가 약간 위로 올라가는 게 보인다. 그 광경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의 서른여섯 살 시절을 기억한다. 나는 이 시가 너무 능청스럽다고 생각했다. 짐짓 서른여섯 살 때 그는 살구만 땄을 뿐이라는 듯이 이렇게 써놓았으니까. 서른여섯 살이던 그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적적해졌다. 몇 행의 문장만으로 나는 그 시를 쓴 시인의 쓸쓸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초여름이 오기 전에 살구 두어 되 따는 서른여섯 살 사내가 느낄 만한 감정이었다.

    한동안 ‘알고 나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었다. 나도 ‘사랑이라니, 선영아’란 소설에다가 그런 식으로 사랑을 정의한 일이 있다. 예컨대 영어에서는 ‘know’가 성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소설 중에 ‘To Know a Woman’, 즉 ‘한 여자를 안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는데,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한 여자와 동침한다는 것’이라고도 읽힌다. 30대 중반이 되기 전까지 한참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의 두 글은 그런 내 생각을 배반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이 느낀 감정만은 공유할 수 있었다. 요컨대 그 감정의 형식을 먼저 이해했다. “눈물이란 무엇인가?”라고 끊임없이 따져 물을 때, 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물이 솟구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게 됐다. 초여름이 오기 전에 살구 한 두어 되를 딸 때 문득 적적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실제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느낀 어떤 감정의 껍데기만 이해했을 뿐이다. 나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생각과 달리 그 감정의 껍데기 안은 텅 비어 있다. 감정은 오직 그 형식에 있을 뿐이다. 슬픔은 눈물일 뿐이다. 쓸쓸함은 살구를 따는 행위일 뿐이다.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의 눈물을 보게 되면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슬픔은 눈물이라는 껍데기와 슬픈 사실이라는 내용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에게서 아내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우리는 그 눈물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는 어떤가? 심노숭은 계속 묻고 있지 않은가? 눈물이란 무엇이냐고? 당사자는 자신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해도 그는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했기에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다. 눈물이 흘러나오기에 이제 어쩔 수 없이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납득하는 순간, 눈물은 멈춘다. 살구를 따는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는 순간, 서른여섯 살의 사내는 더 이상 쓸쓸하거나 적적하지 않다. 알게 되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틀렸다. 사랑하게 되면 보이고, 보이고 나서야 알게 된다.

    소설가라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창작수업 시간에 가장 중요한 공부는 우리 바깥의 뭔가에 우리를 대입하는 훈련이다. 예컨대 아내를 병으로 잃은 남자의 슬픔에 대해서 쓰되, 그의 낡은 구두를 통해서 쓰라고 말하는 식이다. 왜냐하면 소설가에게 인간의 감정은 오래 들여다보면 실명하게 되는 태양빛과 같으니까. 누구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직접 말하진 못한다. 소설가는 타인의 고통이 드러내는 그 형식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게 바로 문학이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가 감정의 형식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글이 실린 잡지가 발행될 즈음에는 사태가 어떻게 바뀔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지만, 탈레반에 납치된 사람들을 우리가 이해할 방법은 많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먼저 분석하고자 한다. 그걸 분석하게 되면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 두려움과 공포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게 다다. 오직 두려움과 공포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제 정세와 탈레반의 역사와 이슬람의 전통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감정의 원인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사실상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슬픔을 나누는 지혜
    김연수

    1970년 경북 출생

    성균관대 영문과 졸업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저서 : 소설 ‘스무살’ ‘빠이, 이상’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등


    냉혹한 국제 질서라든가, 공격적인 한국 기독교 선교의 문제점 등으로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해버릴 때, 우리를 당혹시킨 그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을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아내가 죽었으니 눈물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의 친구일 수 있을까! 때로는 이해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때가 있다. 지금은 무턱대고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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