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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 -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 2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파란의 근대사, 생생한 인간 벽화, 총체소설의 장관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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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1979년 ‘토지’ 3부를 끝마치고.

“선생님이 평생의 업적으로 남기신 ‘토지’에는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직업, 고귀한 인간성으로부터 바닥 상것의 비천함까지 천태만상의 인간군상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박제를 만들어 모자이크한 게 아니라,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고 하는 게, 마치 지류(支流)가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1973년 봄 ‘토지’ 1부를 읽고 김병익은 “아마도 춘원의 ‘무정’ 이후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이며 “박경리의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라고 평가했거니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8년에도 ‘토지’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토지’는 일제 강점기에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 맥이 끊어진 대하소설의 맥을 되살려 이후 김주영의 ‘객주’,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뛰어난 성과를 거둔 작품들이 잇달아 나왔다.

그러나 김병익이 ‘토지’에 대해 ‘가장’이란 최상급의 수식을 고집한 것은 이 작품이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이 3만1200장의 방대한 양적 규모를 자랑한다거나 50년에 달하는 가장 긴 역사를 소설공간으로 재현하고 있다거나 우리 민족사를 재구성하고 대작 붐을 선도해서 획기적이었다거나 한 것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정신의 GNP”

‘토지’야말로 우리 문학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총체소설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토지’는 개인사·가족사·생활사·풍속사·역사·사회사 등을 포괄하고 있다. 여기에는 농민과 중인을 중심으로 양반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계급을 망라한 우리 민족 전체의 삶의 모습이 재구성되어 있으며, 별의별 인물과 성격들을 재현하고 창조함으로써 인간사의 모든 것을 모아들여 거대한 실존적 벽화를 그리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토지’의 주무대를 관광지화한 경남 하동 최참판댁.

소설의 시대적 배경도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는 가장 험난한 역사적 흐름을 폭넓게 조망하고 있으며, 그 서사적 공간도 한반도 남단의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진주·통영·경성과 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 및 일본의 동경 등으로 확대되며, 언어가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실제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전시함으로써 소설의 거대성을 담보해내고 있다.

따라서 ‘토지’는 마땅히 최상급으로 존중받아야 할 우리 소설문학 최대의 자산이라는 것이 김병익의 주장이다. 사실 많은 대하소설이 규모가 크고 내용이 풍부하며 이야기가 박진하다 하더라도, 그 전체는 부분사적 로망으로 그치고 세계는 한 측면으로 서술되는 데 반해, ‘토지’는 수백 가지의 이야기 마디를 총체성으로 엮어 우리 문학사의 어떤 작품도 이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했다.

1970년대에 근대성에 대한 치열한 비판을 작품 속에 녹여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는 ‘토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가 이 모순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우리 영혼의 슬픈 밑뿌리를 보호해 이 땅에 묻는 작업을 한 선배가 박경리다. 나는 거대한 중화학공장 몇 백 개보다 ‘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세금으로도 생산해낼 수 없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토지’가 올려준 것은 우리 정신의 GNP다.”

‘토지’는 6·25전쟁 이전부터 박경리의 기억 한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다. 거제도 외가 할머니가 어린 시절 들려주었던 얘기가 작가의 뇌리에 선명하게 빛깔로 남아 있었다. 거제도 어느 곳, 끝도 없이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떨어져 내릴 때였는데,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수확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외가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는데, 나중에 웬 사내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어느 객주 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사람들이 있었다 한다.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황금빛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작가의 머리에 짙은 잔영을 드리웠다.

“글 기둥 잡고 눈먼 말처럼”

‘토지’는 매우 조용히 시작됐다. 1부가 연재되기 시작한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는 “오랫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으며 오직 이 작품에만 심혈을 기울였다”는 작가의 말과 함께 작가의 사진이 실렸을 뿐이다. 이 침묵을 깬 것은 1부 단행본의 발간이었다. 2부를 연재하던 ‘문학사상’에서 1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자 “문단의 괄목할 만한 수확”(김동리), “문학사 희유(稀有)의 대작”(백철), “뼛속에 스미는 아픔”(황순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하소설”(이어령) 같은 평가가 나왔다.

제3부는 ‘독서생활’ ‘한국문학’ ‘주부생활’을 거쳤으며, 1980년에 작가는 아예 원주시 단구동으로 거처를 옮겨 자신을 외부와 격리한 채 제4부를 ‘정경문화’ ‘월간경향’에 발표했다. 제5부는 그 후 4년여의 공백 끝에 1994년 8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됨으로써 길고 긴 장정을 마감했다. 작가의 나이 43세에서 68세까지 25년간이었다. 작가는 “내가 ‘토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토지’가 나를 몰고 갔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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