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에 그려진 모란도.
별의별 예쁜 꽃이 많은 요즘에는 화중지왕에 대해 달리 볼 수도 있겠다. 이국적이고도 늘씬하고 농염한 꽃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 등 적어도 동아시아 안에선 이 모란을 꽃 중의 꽃, 미녀 중의 미녀로 쳤다. 당나라의 절세미녀 양귀비도 이 모란꽃에 비유했다. 그런데 적자(赤紫)색의 화려하고 풍성한 모란꽃을 보면, 경국지색이었다는 양귀비의 이미지가 대충 떠오르기도 한다. 늘씬하면서도 섹스어필하는 현대의 미녀와는 다르게 그려질 수밖에 없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그린 베니스의 미녀들처럼 풍염한 미(美)가 아니었을까.
모란꽃을 얘기하는데 시성 이백(李白)의 시가 빠질 수 없다. 어느 봄날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침향정에 나와 활짝 핀 모란꽃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난간에 기대앉은 양귀비를 보다가 어느 것이 사람이고 어느 것이 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당장 한림봉공 이백을 불러들이라 명했다.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해 있다 창졸지간에 끌려온 이백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한 바가지 물세례를 받고서야 정신을 차린 이백이 거침없이 붓을 놀리니 세 편의 시가 경각에 이뤄졌다. 그것이 저 유명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다. 그중 세 번째 시다.
꽃과 절세미녀가 서로를 보고 즐거워하니 (名花傾國兩相歡)
바라보는 군왕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일도다 (長得君王帶笑看)
향기로운 봄바람은 온갖 근심을 날리누나 (解釋春風無限恨)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서니 (沈香亭北倚欄干)
모란은 한자명으로는 ‘목단(牧丹)’이다. 모란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명(異名)으로 ‘목작약(木芍藥)’이라고도 하는데 모양이 작약 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란과 작약은 둘 다 미나리아제빗과이지만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이다. 이 둘은 꽃과 잎, 전체적인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다. 꽃피는 시기도 5~6월경으로 비슷하다. 각별히 관심이 있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초본(풀)인 작약을 일부러 초작약(草芍藥)이라고도 한다.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쁘다는 뜻으로 ‘앉으면 모란, 서면 작약’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게 모란과 작약은 우열을 가르기 어렵다. 그러나 화품의 품계를 정확히 따지면 작약이 모란보다 한 급 밀린다. 예부터 화왕을 모시는 재상이란 뜻으로 화상(花相)이라고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왕인 모란이 만인지상(萬人之上)이면, 화상인 작약은 일인지하(一人之下)다. 모란이 먼저 피고 작약이 그 뒤를 따라 피기 때문에 마치 재상이 왕을 보필하는 듯해서 그 품계를 정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디까지나 옛사람들의 품평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로 유명한 영랑 김윤식 선생 생가(전남 강진읍 탑동마을)에 모란꽃이 활짝 폈다.
모란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키가 1m 정도 자라는 작은 나무다. 5~8조각의 꽃잎들로 이뤄진 적자색 혹은 백색의 꽃은 피어서 일주일쯤 지나면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 구절에서처럼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긴 듯’ 어느새 꽃잎이 뚝뚝 지고 만다.
전통적으로 모란은 청열양혈(淸熱凉血)하는 소중한 약으로 쓰였다. 청열양혈이란 피가 뜨거워져 솟구치거나(出血) 몸에 열이 나고(身熱) 피부에 반진이 돋는 증상들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땀도 안 나는데 뼛속에서 열이 나는 듯한 증상 등에 모란을 쓴다. 이를 한의학에선 ‘음(陰) 속에 들어간 화(火)를 사(瀉)한다’고 한다.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이란 유명한 한약에 이 모란이 들어간다. 물론 약으로 쓰는 것은 목단피(牧丹皮) 즉, 모란의 뿌리껍질이다. 단단한 목심부를 제거하고 껍질을 말려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