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정재민의 리·걸·에·세·이

자백이냐, 부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입력2017-05-18 16: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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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어느 오후 텅 빈 법정에 들어가 피고인석에 앉아보았다. 판사직을 그만두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타인의 신발을 신고 두 달 동안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인디언 부족의 경구는 판사가 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판사석에서 고작 열 걸음도 안 되는 피고인석에 앉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다.

    그러나 막상 피고인석에 앉아봐도 판사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높더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그 앞에 앉기만 해도 롤러코스터처럼 가슴을 불안하게 휘저을 줄 알았던 피고인석의 나무 테이블도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을 올려놓은 북카페 테이블과 별다를 바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피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자가 버스 한 번 타봤다고 해서 서민 심정을 알 수 없듯이 판사가 피고인석에 한 번 앉아봤다고 해서 피고인 심정을 알 리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피고인의 처지를  그저 이렇게 제멋대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치부를 아는 사람 앞에서, 나의 신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나는 얼마나 불편하고 작아지는가. 하물며 검은 옷을 입은 검사가 내 나라를 대표해서 내 죄를 낱낱이 낭독하고, 법대 위 높은 자리에 앉은 판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 나는 얼마나 두렵고 비참하고 무력감을 느낄까. 칼과 갑옷을 빼앗긴 채 남루한 포로의 옷만 걸치고 적장 앞에 무릎이 꿇린 항복한 장수의 기분일까. 벌거벗은 채 수술대 위에 누워서 외과의사가 든 메스에 자신의 생명을 모두 맡겨놓은 환자의 기분일까.



    차마 자백하지 못하는 경우

    피고인석에 앉은 이를 더욱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런저런 질문에 대해서 책임 있게 답변해야 한다는 점일 게다. 재판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공소사실 인정 여부에 관한 것이다. 검사가 공소사실을 낭독하고 나면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피고인, 공소사실을 인정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 이후에 검사나 변호사가 피고인에게 하는 세세한 질문도 결국에는 공소사실을 인정하는지, 부인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법정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죄가 있다 생각하면 자백하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부인하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피고인석에 앉아보면 잘못이 있어도 자백하지 못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억울해도 잘못했다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특히 이혼 재판을 하면서 숱하게 보았다. 기혼의 남성 또는 여성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사진이 법정에 제시된 경우조차 당사자 대부분은, 마침 그 시간에 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러 모텔에 들어갔다, 비밀리에 사업 논의를 하러 모텔에 갔다는 식으로 발뺌한다. 심지어 남녀가 모두 벌거벗은 채로 있는 사진이 찍혔는데도 어릴 적부터 화가가 꿈이어서 누드화를 그려보려고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는 당사자도 만나보았다. (그렇다면 모델만 옷을 벗으면 되지 왜 화가까지 옷을 벗느냐고 물으니 모델이 부끄러워할까봐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혼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배우자나 자식에게 도저히 면목이 없어서, 그 밖의 어떤 이유로 끝끝내 잘못을 자기 입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음주운전을 한 번만 더 하면 회사에서 파면당할 처지의 피고인도 잊히지 않는다. 그는 술에 만취한 나머지 편도 3차로인 큰 도로 한복판인 1차로 신호등 앞에 자신의 차를 세워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주변 운전자들 신고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런데도 그는 차를 일부러 도로 1차로에 주차해놓고 친구와 술을 마신 다음 차로 돌아와서 깰 때까지 잠을 청했을 뿐 운전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날 함께 술을 마셨다는 내연녀를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증인은 피고인과 함께 술을 마신 후 피고인을 1차로에 주차해 놓은 피고인 차까지 바래다주었고 피고인이 차 안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잠이 드는 것까지 봤다고 증언했다가 위증죄로 실형을 받았다.(그 뒤 항소심에서는 둘 다 깨끗이 자백했다.)



    억울해도 자백하는 경우

    반대로 억울해도 말하지 못하고 그냥 자백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괜히 부인했다가 판사가 믿어주기는커녕 괘씸죄를 적용해서 더 엄한 형을 내리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일 수도 있고, 법률전문가가 둘러싸고 있고 법률용어가 난무하는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조리 있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부인할 경우 마음이 불편한 법정에 계속 더 나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심적 부담이 돼서일 수도 있다.

    어릴 때 내 경험도 그렇다. 초등학생 때 자주 가던 동네 슈퍼에서 과자를 너무 오랫동안 고르다가 돈 치르는 것을 깜빡 잊고 나간 적이 있다. 그러자 주인이 불러 세워서 딱딱한 표정으로 “왜 돈을 안 내고 그냥 가?”라고 물었다. 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돈만 내고 나왔다. 깜빡 잊었다는 말을 해봤자 주인이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도둑놈에 더해 거짓말쟁이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쓸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아무런 말없이 돈만 냄으로써 도둑놈임을 자백한 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억울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로 다시는 그 슈퍼에 가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로 하여금 그때 그렇게 처신하게 만든 그 이전의 경험이 있었다. 친구들 서너 명과 숲길에 서 있는 빈 콜라병을 돌로 쓰러뜨리는 놀이를 했다. 그 뒤쪽에 경비초소가 있었는데 그곳을 지키던 젊은 경비원이 초소에 돌을 던지는 줄 알고서 달려 나왔다. 그는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더 화를 냈고 우리를 외진 곳으로 끌고 가서는 서로 뺨 때리기, 원산폭격 따위를 한 시간 내내 시켰다. 나중엔 한 명씩 목을 조르면서 부모님에게 이르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끝내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이것은 비단 어린아이들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무수한 ‘갑을’ 관계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사회구조 속에서는 수많은 어른도 ‘갑’일 때는 난폭한 경비원이 되지만 ‘을’일 때는 힘없는 어린아이가 된다. 갑일 때는 판검사가 되고 을일 때는 피고인이 된다. 그 구조 속에서 을은 갑으로부터 억울한 면박과 수모를 받아도 억울하다 말할 수 없다.

    만약 을이 억울하다 항의하면 이 체제는 이상하게도 약자를 괴롭힌 갑이 아니라 을을 ‘건방진 놈’으로 낙인찍는다. 그러곤 모든 갑이 단결해서 갑을관계의 체제 자체에 도전한 책임을 물어 강력하게 응징한다. 그런 체제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피고인석에 섰을 때 판검사 앞에서 어찌 억울함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피고인이 깨끗하게 자백하더라도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때로 그렇게 말하는 피고인의 가슴 밑바닥에 많은 말이 쌓여 있음을 느낀다. 그럴 때에는 “지금 심경은 어떻습니까?”라는 개방형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그제야 비로소 피고인이 자신의 억울함을 털어놓은 경우도 있다.
     


    내 마음속 법정의 햄릿

    반대로 피고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적도 있다. 상습사기죄로 기소된, 체구가 너무 작은 스무 살 여성 피고인이었다. 그녀는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라는 내 질문에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네”라고 짧게 말하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는 혹시 할 말이 더 있을까 싶어서 “지금 심경은 어떤가요?”라고 물어봤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심경’이라는 단어의 뜻을 못 알아듣는 것인가 싶어서 다시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는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나쁘죠!”라고 쏘아붙였다. 아마도 내가 자신의 처지를 조롱한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됐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도 나는 내 억울함을 설명하지 못했다.)

    반면 높은 자존감으로 법정에서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피고인도 적지 않다. “재판장님, 외람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라며 본인의 생각을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눈빛이 적의로 이글거리지 않는다. 어떤 판사는 그런 피고인을 두고 태도가 좋지 않다거나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엄한 형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위험과 압박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조리 있게 말하는 피고인을 만나면 인간의 존엄을 확인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판사 초기에는 자백하는 사람보다 부인하는 사람이 훨씬 더 파렴치하고 나쁜 사람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 자신의 현재 이해관계와 과거에 가슴에 쌓여온 경험에 따라서 죄가 있어도 부인하거나 죄가 없어도 자백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니 자백과 부인을 선악의 문제로는 보지 않게 되었다. 잘못을 시인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를 변상한 사람을 끝끝내 잘못을 부인하면서 피해자의 분노를 가중시키는 사람과 같이 취급하자는 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법을 위반한 정도와 남에게 피해를 준 정도가 더 크다고 판단할 뿐이지 사람 자체의 선악의 차이라고 보지 않는다.

    칸트는 “이 세상에 있어서나 이 세상 밖에 있어서나 선의지 이외에는 무조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선의지는 옳은 행동을 오로지 그것이 객관적 도덕법칙에 비추어 옳다는 이유에서 행하는 의지를 말한다. 그러한 선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면 타인을 이롭게 하는 행위도 선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선의지로 선을 이루기 어려운데 숱한 이해관계가 얽힌 법정에서 피고인의 신분으로서 자백과 부인을 선택하는 행위로 선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재판하는 판사도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판사의 일은 사회의 법을 기준으로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지 도덕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 판사가 할 일이다. 내 마음속에도 작은 법정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대개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내 삶을 두고 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검사와 선이라고 변호하는 변호사가 격론을 벌인다. 판사는 날마다 내게 묻는다.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나는 날마다 햄릿이 된다. ‘자백이냐, 부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면서. 그러면서도 언젠가 내 스스로 내 모든 행위의 준칙을 자신 있게 설정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기를 꿈꾼다. 그때는 피고인석을 걷어차고 내 스스로 내 행위의 가치와 당부를 판단하는 판사가 되고 싶다. 법정 자체를 걷어차고 궁극의 자유로움을 얻고 싶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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