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치다 다쓰루 외, 김경원 옮김, 이마, 2016.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무지나 무교양과 다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지성에 대한 반발, 아니 공격적인 태도다. 반지성주의적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지식도 교양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아사히신문, 2015년 4월 17일자 서평에서
‘안티’로서 만족 느껴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파 정치인이던 힐러리 클린턴이 아닌, 부동산 갑부이자 외국인 혐오주의자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도 어언 반년이 흘렀다. 어쩌면 이 선거는 정치 9단 클린턴이나 민주당의 패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패배’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대놓고 지지하지 못해도 선거 당일에는 작심한 듯 꿋꿋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샤이 트럼프(Shy Trump)’라는 집단심리. 그것은 클린턴을 비롯한 기성 정치인과 지식인 집단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63년 퓰리처상 수상작 ‘반지성주의’에서 미국 사회의 오래된 악습, 즉 ‘지식인을 혐오하는 문화’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반지성주의는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페미니즘을 혐오하며, ‘진보’로 묶이는 정치적 저항이나 소수집단의 인권을 도외시함으로써 증오와 편견을 부추긴다.클린턴이 좀 더 서민적이고 유머러스하며 ‘덜 지성적’이었다면, 좀 더 친근감 있고 ‘마초적 매력’이 넘치는 남성이었다면, 난데없는 트럼프 광풍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 클린턴 같은 뛰어난 지성과 오랜 경험을 두루 갖춘 정치가가 ‘나는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인기를 얻지 못했을까. 어쩌면 미국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반지성주의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기폭제를 만나 엄청난 강도로 폭발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반지성주의가 사회의 결정적인 과도기 마다 더욱 무섭게 기승을 부린다는 점이다. 반지성주의는 1960년대 미국뿐 아니라 아베 신조 총리의 극우·보수적 성향을 오랫동안 지지해온 일본의 대중에도, 나아가 2017년 장미대선 정국을 맞아 진보세력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에 의지하면서 생산적 담론을 끌어내지 못한 한국의 보수정치에도 뿌리 깊이 박힌 집단심리다. 반지성주의의 방점은 ‘지성’에 있다기보다는 ‘반(反)’, 즉 무언가에 대한 ‘안티’로서 만족을 느끼는 감정에 놓여 있다. 어떤 구체적인 담론에 기댔다기보다는 ‘누군가를 향한 반대와 증오’ ‘누가 대통령이 되면 절대로 안 돼’라는 식의 편견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다.
마녀사냥式 사고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외 다양한 필자가 함께 쓴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는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반지성주의적 성향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한다. 무지와 왜곡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A는 절대 안 된다’ ‘B만이 옳다’고 선동하면 누군가는 그 선동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는 사회, 그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의 어두운 단면이다. 앞뒤 맥락을 다 빼고 자신의 적대세력을 향해 폭언을 내뱉는 정치인들, 논리도 근거도 없는 음모론이 판을 치고 그 음모론에 기대어 실제로 여론이 조성되는 끔찍한 악습, 소수자 집단을 향한 무조건적 혐오와 극단적 배제.이 모든 것이 일본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증언하는 모습이며, 놀랍게도 그 모습은 한국 사회의 ‘극혐’ 문화, 즉 누군가를 미워하기로 작정하면 그에 대해서는 어떤 이성적 성찰도 하지 않고 오직 그를 증오하고 반대하는 데만 온 힘을 다하는 집단심리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진다.
아베 정권은 폼을 잡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런데도 국민의 다수는 이 정권을 지지한다. 일본인은 바보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논고가 가르쳐주는 중요한 것. 그것은 반지성주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무심코 무자각 상태에 휘말린다는 것이다. 바보가 되고 싶지 않은 일본인에게 필독서. ―겐다이 디지털신문, 2015년 4월 14일자 서평에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소다 가즈히로는 반지성주의의 핵심 정서로 ‘대본 지상주의’를 꼽는다. 마음속에 이미 ‘대본’을 정해놓고, 어떤 상황이 전개돼도 마음속에서 이미 다 쓰인 대본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반지성주의의 표본이다. 예컨대 동일본대지진 때 일본 정부나 언론사의 대응 방식이 그렇다. ‘일본의 원전은 사고를 일으킬 리 없다(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안전 신화’의 강력한 대본과 ‘원전은 존속돼야 한다’는 또 다른 대본에 매달리는 기업, 언론, 지식인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해 원전 사고가 가져올 사태를 축소 보도했다는 것이다. 막상 그들의 대본에는 없는 심각한 원전 사고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한국의 극우 정치인들이 TV토론회에서 보여주는 행태 또한 대본 지상주의다. ‘상대편 후보가 당선돼서는 안 된다’는 대본에 입각해, 그가 하는 모든 말을 ‘거짓말’로 몰아세우고, 상대편 후보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무 거리낌 없이 깎아내리는 태도야말로 대본 지상주의의 표본이다.
내 머리로 생각할 권리
즉 반지성주의는 ‘정의’와 ‘공정성’ 같은 긍정적 가치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다른 정치인에 대한 질투와 무조건적인 반감,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좌파’나 ‘빨갱이’로 몰아가는 마녀사냥식 사고로 스스로를 중무장한 방어 전략이다. 겉으로는 공격적으로 보이지만 ‘나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이라는 점에서 ‘작용’이 아니라 ‘반작용’에 불과하다. 다른 쪽의 자극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반지성주의는 계층이나 집단에 따라 ‘주어진 대본’을 주입한 뒤 ‘우리 집단을 위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쪽으로 집단의 심리를 몰아감으로써 ‘내 머리로 생각하는 주체적 사유’의 힘을 앗아간다. 더욱 무서운 것은 소위 ‘지성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 내부에서도 반지성주의가 만연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강화한 지식인들은 단지 권력에 기대어 ‘부역’한 것에 그치지 않고, 유대인을 향한 차별과 학살을 자신들의 학문적인 신념에 근거해 정당화했다. 지성의 외피를 두른 반지성주의가 권력의 시녀가 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전 세계를 암흑으로 몰아간 것이다.
반지성주의의 종착역은 민주주의의 압살이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대화의 물꼬 자체를 막아버리는 태도를 극복하는 것, 나아가 지금 생산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더라도 ‘언젠가는 우리가 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야말로 반지성주의를 극복하는 마음의 첫 번째 단추가 될 수 있다. ‘너희들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서 몰라’ ‘너희들은 배고픔을 겪어보지 않아서 몰라’라는 식으로 상대방의 선천적 조건을 문제 삼는 원천봉쇄적 대화를 극복하는 것, 나와 너의 다름으로 인한 마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는 것, 더 나아가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반지성주의를 극복하는 대장정의 시작이다.
선전하고 표현하고 과시하는 것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듣는 것, 이해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을 도외시하는 문화가 나타났다. 이 같은 문화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이 끝없는 질풍노도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지성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 나아가 ‘내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베’나 ‘극혐’ 같은 단어에 담긴 반지성주의를 통렬하게 고찰하고, 타인의 가치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모든 종류의 악습과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