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대리석 석탑의 절묘한 인연…경천사·원각사지 10층 석탑

[명작의 비밀⑯] 두 석탑의 안쓰러운 운명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0-07-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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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뽀얀 자태의 대리석, 그러나 훼손은 빠르고…

    • 받침돌과 몸돌 아(亞)자형 닮은꼴…라마교 영향

    • 개성 경천사 탑 불법 밀반출한 日 궁내대신

    • 연산군이 廢寺한 원각사, 유리에 갇힌 탑

    경천사 10층 석탑 도면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위).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천사 10층 석탑 도면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위).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 로비에선 종종 이런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어 저거 파고다공원에 있는 탑 아닌가? 아니 저게 왜 여기에 와 있지?” 

    그럼 누군가 점잖게 응수한다. 

    “아, 파고다공원. 그러니까 탑골공원에 있는 탑은 원각사지 10층 석탑이고요. 여기 박물관에 있는 탑은 경천사 10층 석탑입니다. 모양이 비슷해서 그렇지 서로 다른 탑입니다.” 

    국보 86호 경천사 10층 석탑(고려 1348년, 높이 13.5m)과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조선 1467년, 높이 12m). 두 탑은 모양이 똑같다. 그런데 흔히 보아온 우리네 석탑과 그 모양이 확연히 다르다. 훤칠하게 쑥 솟아오른 몸체에 세련된 조형미. 한국의 탑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들은 사연도 특이하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있다. 탑은 원래 절에 있어야 하는데, 거대한 탑이 실내에 전시돼 있다니. 우리 석탑 가운데 이런 경우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유일하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서울 탑골공원에 있다. 조선시대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 현재 유리 보호각으로 탑을 완전히 덮어씌운 상태다. 우리 석탑 가운데 이런 경우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유일하다. 두 탑은 왜 이렇게 독특한 상황에 처했을까. 그 비밀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쏙 빼닮은 두 개의 탑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 10층 석탑.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 10층 석탑.

    10여m 이상 늘씬하게 솟아오른 우리의 전통 석탑 가운데 이렇게 특이한 모양의 탑이 또 어디 있을까. 누군가는 “월정사의 8각9층 석탑도 특이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국보 48호 월정사 8각9층 석탑(고려 11세기, 높이 15.2m)도 이색적이다. 그런데 이 탑의 이색적인 면모는 경천사 10층 석탑이나 원각사지 10층 석탑과는 좀 다르다. 고려시대엔 다각다층탑(多角多層塔)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주로 북한의 평양 일대와 평북 향산군 묘향산 일대에 밀집돼 있다. 묘향산 보현사의 8각13층 석탑을 비롯해 평양 영명사의 8각5층 석탑, 평양 원광사 8각7층 석탑, 평양 광법사 8각5층 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의 다각다층 석탑은 고구려 석탑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월정사 8각9층 석탑은 그 전통 속에 있고 그렇기에 이색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어딘가 친숙하다. 하지만 원각사 탑과 경천사 탑은 다르다. 두 탑은 이색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이국적이다. 두 탑은 온통 특이하다. 기단부(받침돌) 3개 층과 탑신(몸돌) 1~3층부터 그렇다. 이 부분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자형(亞字形)이다. 정사각형이 있고 네 개의 변으로 직사각형이 튀어나온 형태여서 아자형이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아자형 두 개가 중첩돼 있는 모양새다. 어떻게 이런 모양새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이 같은 아자형 구조는 중국의 라마교 탑의 영향에서 온 것이다. 

    옥개석(지붕돌)은 실제 목조건축물의 기와지붕인 양 모든 구성 요소를 빠짐없이 표현했다. 기단부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 서유기(西遊記)의 인물을 새겨 넣었다. 또한 불교의 상징물인 사자, 용, 연꽃 등도 새겨 넣었다. 

    탑신(1~3층은 각 20개 면, 4~10층은 각 4개 면)의 표면엔 불교 관련 내용과 상징물들이 빼곡하게 조각돼 있다. 삼세불회(三世佛會), 영산회(靈山會), 미타회(彌陀會), 용화회(龍華會) 등 불교 경전에 나오는 여러 불회의 광경을 중심으로 부처와 보살, 금강역사 등이 생동감 넘치게 등장한다. 불교의 스토리를 탑신부 표면 전체에 빼곡하고 정교하게 표현해 넣은 것이다. 

    두 탑은 이렇게 표면의 조각 내용까지 놀랍도록 흡사하다. 정교한 조각 표현은 두 탑 모두 대리석 재질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나라 석탑은 거의 모두 화강암 재질이다. 제작 시기 119년의 시차가 무색할 정도로 거의 똑같은 모습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경천사 탑은 1층 탑신에 탑의 제작 경위와 시주자에 관한 내용을 새겨놓았고, 원각사 탑은 9층의 탑신과 옥개석 부분에 제작자에 관한 정보를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경천사 탑의 1층 탑신에는 탑을 조성한 연대, 시주자, 조성 목적 등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탑의 시주자는 원나라와 사돈을 맺어 원 황실의 비호를 받았던 인물이며, 원 왕실을 축원하기 위해 이 탑을 조성했다. 그렇기에 원나라 요소가 적잖이 반영됐다. 당시 티베트에서 중국에 들어온 라마교 탑의 특성이 경천사 탑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가 119년이 지나 원각사 탑으로 다시 한번 전해진 것이다. 


    경천사 탑의 수난…베델, 헐버트의 폭로

    경천사 탑 표면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연꽃이 새겨져 있다.

    경천사 탑 표면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은 원래 야외에, 사찰 마당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경천사 10층 석탑은 박물관 건물 안에 있다. 사연은 이렇다. 이 탑은 원래 개성의 경천사에 있었다. 1907년 2월 무장한 일본인 인부 130여 명이 개성 경천사 터를 급습했다. 이들은 10층 석탑을 막아서는 개성 주민들을 위협하면서 석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해체한 부재들을 달구지 10여 대에 옮겨 실은 뒤 개성역으로 향했다. 불법 약탈이었다. 그 배후는 당시 일본 궁내대신이던 다나카 미쓰야키였다. 순종의 결혼식 참석차 한국에 온 그는 고종이 경천사 탑을 하사했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였다. 그러곤 인부를 동원해 탑을 해체해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밀반출했다. 

    이 만행을 폭로한 사람은 푸른 눈의 두 이방인이었다. 영국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은 1907년 3월 대한매일신보 영문판에 이 사실을 보도했다. 선교사이자 고종 황제의 외교 조언자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도 일본의 영자신문을 통해 약탈 사실을 알리고 반환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비난 여론이 비등하고, 1918년 다나카는 결국 이 탑을 한국에 반환했다. 

    경천사 탑이 한국에 돌아왔지만 탑은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반환 이후에도 별다른 보존 조치 없이 포장된 상태로 경복궁 회랑에 방치됐다. 식민지, 분단과 6·25전쟁을 겪으며 40여 년이 흘렀고, 우리가 이 탑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1959년이었다. 그제야 보수에 들어갔고 1960년 탑을 복원해 경복궁 경내에 전시했다. 하지만 탈락 부위를 시멘트로 메우는 정도였다. 그것이 당시 우리 문화재 수리 보존의 현실이었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복원 이후 경복궁 야외에 전시되면서 풍화작용과 산성비 등으로 인해 훼손이 계속됐다. 대리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훼손 속도가 더 빨랐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995년 해체 보수하기로 결정했다. 탑의 142개 대리석 부재를 모두 해체한 뒤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 각 부재의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비바람으로 인해 약화된 대리석을 단단하게 경화(硬化) 처리하고, 균열 부위를 천연 접착제로 붙였다. 1960년 복원 때 채워 넣었던 시멘트를 제거하고 레이저를 이용해 표면의 오염물도 닦아냈다. 해체된 탑의 부재 142개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64개를 새로운 대리석으로 교체했다. 이 탑의 원래 대리석과 암질(巖質)이 유사한 강원도 정선 지역의 대리석을 사용했다. 물론 원 부재의 조각이나 형태 등 원래 모습을 그대로 살렸다. 보수보존 처리를 하는 사이, 문화재 전문가들은 경천사 10층 석탑을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야외에 세울 경우, 훼손이 심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0년에 걸친 해체 수리


    보수보존 처리를 마치고 다시 탑을 세우게 됐다. 142개 부재를 다시 서울로 가져와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서 하나하나 쌓아 올렸다. 수평과 균형을 잡아가며 142개의 부재를 높이 13m까지 쌓아올린다는 건 고난도의 작업이다. 1mm만 맞지 않아도 돌들이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탑신, 난간, 옥개석을 쌓아 한 개 층을 조립하는 데 2∼3일, 수평을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는 데 일주일. 그 기다림 끝에 1㎜의 오차도 발견되지 않아야 다음 층을 쌓아 올릴 수 있다. 그렇게 3개월이 걸렸다. 10년에 걸친 해체 보수 복원 작업은 이런 과정을 거쳐 2005년 8월 모두 마무리됐다. 

    탑의 안정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의 바닥엔 탑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를 만들었다. 우선 맨 아래쪽에 철제 받침대를 만든 뒤 넓적한 화강석 판을 올려놓고 그 위에 경천사지 탑을 세웠다. 철제 받침대는 규모 8의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받침대의 아래쪽은 레일과 바퀴로 중앙홀 바닥과 연결돼 있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받침대가 레일 위를 움직이며 충격을 흡수하도록 한 것이다. 이른바 면진(免震) 장치다. 우리 석탑 가운데 면진 받침대 위에 올라앉은 경우는 경천사 탑이 유일할 것이다. 경천사 탑은 이래저래 특이한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서울 역사를 지켜본 원각사 탑

    원각사지 탑 표면에는 부처와 보살, 금강역사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옥개석(지붕돌).

    원각사지 탑 표면에는 부처와 보살, 금강역사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옥개석(지붕돌).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는 곳은 서울의 탑골공원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기미독립운동의 기치를 올린 곳이다. 이곳엔 원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었다. 원각사는 조선 세조 때 창건됐으나 1504년경 연산군 때 폐사(廢寺)됐다. 연산군은 절을 없애고 자신의 유희를 위해 악공(樂工)과 기녀를 양성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사찰의 전각들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10층 석탑은 건재했다. 18세기에 이르면 이곳은 실학파의 거점 공간이 된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원각사 터 주변 자신의 집들을 오가며 시대와 백성을 고민하고 시서화(詩書畫)를 나눴다. 그들을 두고 백탑파(白塔派)라 부른다. 탑골 백탑 아래에서 모임을 가졌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여기서 백탑이라는 말이 흥미롭다. 하얀 탑.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 탑이 화강암으로 만든 여느 탑보다 더 뽀얗기 때문이다. 뽀얀 색의 남다른 탑을 보며 18세기 실학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이후 1890년대 말~1900년대 초 원각사 터에는 근대식 공원이 조성됐고, 이때부터 탑골공원, 탑동(塔洞)공원으로 불렸다. 한편으론 파고다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 3·1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조선시대 언제부턴가 탑의 10개 층 가운데 맨 위의 세 개 층(8~10층)이 별도로 떼어져 바로 옆에 따로 놓이게 됐다. 기록이 없어 그 연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 올 뿐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탑을 분리해 약탈해 가려다 그냥 두고 갔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고, 연산군이 창덕궁에서 밖을 내려다보려니 원각사 석탑의 윗부분이 눈에 거슬려 3개 층을 떼어놓으라고 지시해서 그렇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3개 층은 1946년 미군이 거중기를 이용해 원래 위치로 올려놓았다. 어쨌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수백 년 동안 역사의 모든 영욕을 한자리에서 지켜봤다. 그 자리가 이 땅의 수도 한복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유리 보호각의 딜레마


    야외 석조 문화재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최근 들어 산성비의 피해가 심각해지고 도심의 경우엔 비둘기가 배설물을 쏟아내 석조물의 표면 훼손을 부채질한다. 그래서 문화재를 보호하는 구조물을 만들기도 한다. 바로 보호각이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대리석 재질이기 때문에 보통의 화강암 탑에 비해 약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훼손도 빠르다. 게다가 탑골공원엔 비둘기기 많다. 비둘기 배설물이 탑에 떨어져 탑의 표면을 위협했다. 그러던 중 1990년 누군가 돌을 던져 탑의 표면 일부가 훼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부와 서울시는 보호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찾았다. 그 아이디어가 유리 보호각이었다. 

    2000년 유리 보호각을 설치했다. 철제 골조를 세우고 거기 유리로 외관을 마감한 형태의 보호각이다. 그래서 지금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유리 보호각 안에 들어가 있다. 유리 보호각으로 탑을 완전히 감쌌으니 어쩌면 완벽한 보호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탑을 보면 답답하고 안쓰럽다. 유리의 반사로 인해 탑의 전체적인 모양이나 탑신에 새겨진 무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가까이 가보면 유리 보호각은 먼지와 얼룩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원각사 탑의 아름답고 세련된 자태를, 정교한 대리석 조각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2003년 9월엔 보호각 유리에 금이 가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유리 보호각 동쪽면의 판유리(각 1.5×1.5m) 18개 가운데 하나에 무수한 균열이 생긴 것이다. 유리에 코팅 처리가 돼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무수한 균열로 유리 자체가 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두 탑의 절묘한 인연과 운명


    경천사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 하나는 고려시대 탑이고 하나는 조선시대 탑이다. 독특하고 이국적인 외형을 자랑하는 두 탑은 모양도 재질도 똑같다. 살아온 내력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지금 그들의 상황을 보면 무언가 안쓰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경천사 탑은 고향을 떠나 100년 유랑 끝에 박물관 실내에 들어가 있고, 원각사 탑은 온갖 영욕을 지켜보며 제자리를 지켰지만 유리 보호각에 갇히게 됐다. 

    보수보존 처리를 마치고 대한민국 최고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 잡은 경천사 10층 석탑. 그렇다면 경천사 탑의 ‘100년 유랑’은 정녕 끝난 것일까. 문화재는 원칙적으로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문화재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있다. 경천사 10층 석탑도 예외일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실내가 정녕 그 탑의 자리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통일이 된다면 개성의 고향땅으로 돌아가는 것도 논의해 볼 수 있으리라.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유리 보호각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2000년 상황에서는 유리 보호각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탑의 가치와 매력을 떨어뜨렸다. 누구도 그곳에서 탑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기는 어렵다. 이에 대한 새롭고 전향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쨌든 현재 상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경천사 탑 하면 원각사 탑이 떠오르고, 원각사 탑 하면 경천사 탑이 떠오른다. 이들은 대리석 덕분에 뽀얀 자태를 뽐낼 수 있었으나 그로 인해 훼손이 빨라졌고 결국 다른 탑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을 맞이했다. 두 탑의 인연이 참으로 묘하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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