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 한 번 잘하는 게 재판 백 번 잘하는 것보다 낫다
- ‘강제조정명령’으로 삼성자동차 파산 막아
- 재판에서 옮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건 상생(相生)
- 친구 토막살해사건, 사형 선고하려니 떨려
- 성매매특별법 유감, “법이 남의 치마 속, 바지 속까지 들어가서야”
- 지율스님 판사실로 불러 “도롱뇽도 중생이지만, 터널 개통돼 장사할 사람도 중생”
- 판사라고 법정에서 인사하지 말라는 법 있나
● 1948년 경남 창녕 출생<br>● 부산고, 서울대 법대 졸업<br>● 1975년 사법시험 17회 합격<br>● 부산고법·대구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창원지법 충무지원장, 부산지법 울산지원장, 부산지법 동부지원장, 부산고법 수석부장, 現 창원지법원장
법조계에서는 김 판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사시 17회 동기이고, 향판 우대 등으로 대변되는 대법원의 개혁 바람 덕분에 대법관 후보로 거론된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법조계의 전반적인 평가는 우호적인 편이다. 그중에서도 ‘분쟁을 그치게 하는 조정(調停) 분야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평이 돋보인다. ‘부산·경남 지역 법조계의 대부(代父)’라는 평도 따라다닌다.
현직 판사를 ‘대부’라고 표현한 것이 어색했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서울고등법원에 근무하는 몇몇 부장판사가 기자에게 김 판사와의 인터뷰를 적극 추천했다. 윤재윤 부장판사는 “지역에서는 사법행정의 달인으로 통한다”면서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이 폭넓어서 법조문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한 성격이 자상해 양측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법정에서 당사자들을 조정으로 화해시킨다”고 김 판사를 높이 평가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가 재판한 사건들을 살펴봤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한글로 ‘김종대 판사’를 쳐 넣는 순간 ‘현직 판사가 이순신 평전을 펴냈다’ ‘천성산 고속철 공사 재판장’ ‘르노 삼성자동차 인수 본격화’ 등의 기사가 주르르 올라왔다. 알고 보니 김종대 판사는 현직판사로 이순신 평전을 펴낸 이순신 전문가이자 ‘동물과 재판했다’는 그 유명한 ‘도롱뇽 재판장’이었다.
판사와 인터뷰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다’ ‘안 한다’를 거듭한 끝에 그는 마지못해 인터뷰에 응했다. 김 판사를 만난 건 2월10일. 기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5시간 걸리는 창원까지 내려가야 했다.
“서울에서 참 멀지요?”
김 판사는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는 기자에게 자상한 표정으로 여독을 걱정해줬다. 짙은 눈썹에 까무잡잡한 피부색과 자상한 표정이, 깐깐하고 똑 부러질 듯한 법관 이미지가 아니라 시골길을 걷다가 무시로 만날 수 있는 촌부를 연상케 했다.
“법관들이 대체로 인터뷰를 기피하는 편인데다 대법관 인선을 앞두고 괜히 오해를 살지 모른다며 막상 만나서 인터뷰를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고 하자, 김 판사는 “제가 정말 대법관이 될 수 있겠어요?”라고 반문했다. 그 말에는 ‘향판인데…’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최근 법조계에서는 노 대통령의 사법시험 동기들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10월 고위 법관 인사에서 사시 17회 6명이 모두 법원장으로 승진했다. 올 7월에는 대법관 5명이 교체되기 때문에 대통령 동기라면 기대해볼 만하다. 손용근 춘천지법원장, 김능환 울산지법원장, 김종대 창원지법원장, 차한성 청주지법원장 등이 유력한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존경은 당신들이나 하라”
-조무제 전 판사의 경우 대표적인 ‘향판’으로 대법관이 되셨지요.
“조무제 판사님은 결코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분입니다. 영원히 앞에 가실 분이지요. 단군 이래 그런 분이 없을 겁니다. 흉내를 낼 수가 없어요. 199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조무제 판사님의 장인어른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른에게 ‘조무제 판사를 존경한다’고 했더니 ‘존경은 당신들이나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른이 세무서장을 지내셨는데, 그 시절에 얼마나 잘살았겠어요. 판사 사위한테 또 얼마나 잘해주고 싶었겠습니까. 한데 딸이 조무제 판사한테 시집가서 평생 호강 한번 못했다는 겁니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 겨우 22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잖아요.”
‘딸깍발이’ 조무제 전 대법관은 법조계의 사표(師表)로 많은 법관의 존경을 받았다. 대법관이 된 후 서울 서초동에 보증금 2000만원짜리 원룸 오피스텔을 얻어 살았다. 장관급 예우에 걸맞은 5급 비서관도 “필요없다”면서 물리쳤다. 관용차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대법원에 출근해 이웃 주민조차 대법관인 줄 몰랐다고 한다.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다 존경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조무제 대법관은 인품이 훌륭했어요. 절대로 후배들에게 강요하지 않아요. 자신은 청렴결백하지만 남도 그러기를 바라지 않는 거죠. 청렴결백하지 않은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았어요. 늘 ‘나는 못났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번은 ‘저희처럼 평범하게 사세요’라고 했더니 ‘나는 그렇게 살면 죽을 것 같아’ 하시더군요.”
-조무제 판사는 청탁은커녕 가벼운 부탁에도 인색했다고 들었어요.
“말도 마세요. 찾아온 사람들이 커피 한잔도 못 먹고 가면서 온갖 욕을 하곤 했지요(웃음). 지인이 찾아오면 문을 아주 조금 열고서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서서 얘기하세요. 상대가 뭔가 부탁하면 공손하게 ‘네, 네, 잘합니다. 우리 판사들 다 잘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만 했습니다.”
-판사들은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재판과 관련해 부탁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던데요.
“맞아요. (부탁을) 안 들어줘요. 그러니 (부탁을) 하지도 않지요. 부탁하는 순간 체면이 다 구겨지잖아요. 저도 처음엔 무조건 ‘안 돼’ 했다가 요즘은 ‘기회가 되면 하마’ 하는 정도로 얘기해요. 그렇게 돌려보내면 참 마음이 아파요.”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중앙’을 마다하고 ‘1지망’으로 고향인 부산을 선택했다.
-‘향판’을 고집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친구와 경쟁하는 게 싫었습니다. 제 성격엔 ‘경쟁의 도시’인 서울이 안 맞았어요. 서울에 10년쯤 살아보니까 경쟁이 너무 심하더라고요. 양보도 없고 여유도 없었어요. 약간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촌사람이 더 좋아요. 대학 다닐 때 점심값 계산을 하는데, 촌사람과 서울사람은 다르더군요. 서울사람은 깍쟁이라서 정확하게 차례대로 돌아가길 원했어요. 그런데 자기 차례를 잊어버리면 실수잖아요. 경우가 없는 사람이 되니….”
“황우석은 이순신이 아니다”
김 판사는 ‘향판’이라는 용어를 거듭 사용하는 기자에게 넌지시 “서울이 고향인 판사가 서울에 근무하면 ‘향판’ 아닙니까?” 하고 물어왔다.
“이름 내려면 서울로 가야지요. 서울에서는 작은 사건이라도 판사의 이름이 공개돼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면 출세하는 것 아닙니까.”
김 판사는 “황우석 신화야말로 이름 내는 데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우울한 단면”이라면서 “시간에 쫓기고 업적에 내몰리는 지식경쟁에서 삶의 중요한 가치가 무너진 모양”이라고 개탄했다.
“도대체 뭘 배웠습니까. 난자·정자 분리하는 기술만 공부했지, 뭘 배웠습니까. ‘인류를 질병에서 구하자’는 가치는 허물어지고, 이름 내려는 명예욕과 세속적 욕심으로 가득 찼던 거죠. 이름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사람은 자신을 묶어주는 가치의 기둥이 있어야 해요. 그 기둥을 자기 편의로 흔들어버리면 황우석보다 더한 사람이 되는 거죠.”
김 판사가 황우석 사건에 분개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황 박사를 꽤나 지지했던 사람이다.
지난해 우리 문화계를 강타한 것 중 하나가 ‘이순신 신드롬’이었다. 가히 황우석 신화 못지않은 국민적 열풍이었다. 서점가에는 이순신 관련 책이 무려 180여 종이나 쏟아져 나왔다. ‘칼의 노래’ ‘불멸의 이순신’ 등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대열에 김 판사가 집필한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도 포함됐다.
김 판사는 지역에서 이순신에 대한 강연도 여러 번 했다. 지난해 부산경제포럼에서는 100여 명의 최고경영자 앞에서 GE 잭 웰치 회장과 이순신 장군의 닮은꼴과 전략을 강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강연에서 두 사람의 공통점에 대해 “사명과 가치를 제대로 설정하고 이를 명확하게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현직 판사가 강연에 나섰다는 것이 독특했다. 김 판사는 “기록을 보는 것 못지 않게 지식을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에 버금가는 인물이 황우석이다”라고 강조했던 일을 떠올리며 몸둘 바를 몰라 했다.
1986년 단독 판사 시절의 김종대 법원장.
김 판사의 이순신 얘기가 계속됐다.
“원균은 큰 병력을 갖고도 일본한테 패했어요. 이순신은 남은 12척을 모아 한 달 뒤에 명랑에서 일본을 물리쳤어요. ‘이순신은 악조건 속에서도 이겼는데, 원균은 왜 졌나?’ 의문스러웠어요.”
-답을 얻었습니까.
“인품이었어요. 이순신의 리더십에서 배울 점이 있어요. (이순신의) 리더십은 성(誠), 정(正), 애(愛)에서 나왔어요. 특히 애가 없었다면 백의종군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순신 연구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군 법무관 시절에 정훈교육을 위해 이순신 책을 한 권 사서 읽다가 푹 빠져들었어요. 인품에 반한 거죠.”
-이순신의 어떤 면에서 특히 감동을 받았습니까.
“흔히 이순신을 ‘명신(名臣)’ ‘명장수’ ‘전쟁영웅’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온 나라가 힘을 모아준 가운데 적(敵)과 싸운 분이 아니거든요. 겨우 12척 남은 전함으로 싸웠어요. ‘열 배, 백 배 넘는 적과 싸우라’는 재임명 교서가 내려왔을 때 불평은커녕 ‘12척이나 있으니 괜찮다’고 담담하게 재임명을 받아들였어요. 세 차례 파직당하고 두 차례 백의종군하면서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은 그의 마음에는 도(道)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같이 어지러운 때일수록 중심을 잡아줄 이순신 같은 스승이 필요합니다.”
절대적 ‘옳다’ ‘그르다’는 없어
법관은 대개 민·형사 좌우 배석재판관, 민·형사 단독부 재판관, 고등법원 좌우 배석재판관, 대법원 재판연구관, 지방법원 부장판사,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친다. 초임 판사로부터 민·형사 1심 단독부 재판관이 되기까지 대도시의 경우엔 6~7년, 중소도시에서는 4~5년이 걸린다고 한다.
-주로 형사재판을 많이 하셨더군요.
“(형사재판은) 결론을 내리는 게 머리가 아파요. 민사재판은 기록을 보는 과정에서 답이 나오거든요. 형사재판은 집행유예와 실형, 또 실형을 내린다면 몇 년으로 할까 등 판사의 재량이니 끝까지 고민합니다. 새벽에도 고민하고 밥 먹다가도 생각해요. 화장실에서도 고민하고요. 특히 단독을 맡으면 너무 외로워요.”
-재판에서 당사자들은 누가 잘못했는지 다 알고 있는데, 판사가 고민하는군요.
“맞아요. 당사자들은 다 알지요. 죄 지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판사가 판단해야 하는 난센스 제도가 바로 재판입니다.”
김 판사는 “판사도 이순신의 인품을 닮아야 한다”고 말했다. 판사가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아닐진대 이순신을 닮아야 한다는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판사의 고질 중 하나가 바로 과한 자부심입니다. 어느 조직보다 심한 편입니다. 판사의 권한이란 게 굉장하잖아요. 어떤 사람에게 ‘죽어라’고 할 수도 있고, 재산을 ‘저쪽에 줘라’ 혹은 ‘교도소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판사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그 밑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해요. 법정에서는 극단을 보잖아요. 양쪽이 ‘정의’의 탈을 쓰고 싸웁니다. 그들을 ‘나쁜 놈들…’ 하는 시선으로 봐선 안 됩니다. 우리 삶에 절대적으로 ‘옳다’ 혹은 ‘그르다’는 없어요. 시대의 선택일 뿐이지 ‘맞다’ ‘틀리다’가 없는 거죠”
-시비를 가려야 하는 판사가 철학적이고 추상적일 수 없잖습니까. 또 법정에서 판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고요.
“조정을 해야지요. 조정 한번 잘하면 재판 100번 하는 것보다 나아요.”
김 판사는 부산·경남 지역 법조계에서 ‘조정의 달인’이라고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자동차의 파산을 막고 ‘르노삼성’을 탄생시킨 일이다. 그는 ‘르노삼성자동차’의 탄생을 ‘국부유출’이 아니라 ‘국부유입’이라고 표현했다.
“2000년 부산고법에서 수석부장을 할 때였어요. 당시 삼성자동차가 정부 주도 M&A로 대우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지요. 소문이 나자 신용이 떨어져 부도가 나버렸어요. 삼성자동차측에서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회사정리절차를 신청해 왔어요. 회사를 정리하려면 정리계획을 짜서 모든 채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해요. 삼성자동차가 파산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르노’라는 프랑스 자동차회사가 인수하는 길밖에 없었어요. 삼성자동차에는 일본 닛산이 발주해서 만들어놓은 로봇이 있었는데 닛산을 르노자동차가 인수했기 때문입니다.”
“법에 어긋나는 얘기입니다만…”
-‘르노삼성’ 탄생은 국내 처음으로 법원이 회사정리사건에서 조정한 예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16개 은행으로 이뤄진 채권단이 약 3조원의 채권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2조원은 이건희 회장이 해결해줬어요. 르노가 1조원쯤으로 삼성자동차를 사면 문제가 해결되는데 르노는 5000억원밖에 못 준다고 했어요. 채권단으로서는 르노가 인수하면 돈이 다 회수되지 않을 테니 큰일난 겁니다. 그렇다고 삼성자동차가 파산한다고해서 1조원을 갚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삼성자동차가 파산하면 1200개의 부품업체가 모두 손들어야 했지요. 종업원이 1만여 명이나 되는데…. 지역경제에 미칠 파장이 엄청났지요. 부산 경제에 5년 동안 20조원의 마이너스가 발생하는 거예요.”
-판사로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나요.
“없었어요. 답답한 당사자들이 정리계획을 들고 오면 법에 어긋나지 않을 경우 도장만 찍으면 됩니다. 안 오면 파산선고하면 되고. 하지만 저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기자들을 모아놓고 ‘내가 삼성자동차의 회장이 아니냐? 회장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어요. 기자들이 ‘어떻게 해주면 됩니까?’ 하기에 ‘법정관리회사의 회장격인 재판장이 뒷짐 지고 있다고 법원을 무섭게 나무라다오’ 했어요. 다음날 부산일보 1면 머리에 ‘뒷짐 지고 있는 법원’이라는 기사가 실렸어요. 판사가 일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거죠.”
-르노에서 5000억원 받아봐야 채권단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삼성물산과 은행단을 설득하느라 힘들었겠군요.
“말도 마세요. 손톱도 안 들어갔어요. 제가 세 번이나 점심을 사면서 회의를 했어요. 채권단 중역들 걱정도 일리가 있었어요. 르노로 삼성자동차를 살리고 싶지만 빌려준 돈을 다 못 받으면 형사 처벌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그 책임 부분을 제가 털어줘야 했어요. 방법이 있었어요. 법원에는 ‘강제조정명령’이라는 게 있습니다. 중역들이 법원의 명령에 따라 했다면 고의가 없는 것 아닙니까. 결국 르노에서 5000억원을 받아 삼성물산과 은행단에 주면서 ‘채권 비율로 나눠가져라’고 했어요.”
김 판사의 조정 실력은 형사재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형사재판에서도 조정이 가능합니까.
“재판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 것이 ‘상생(相生)’입니다. 판결이라는 것이 판사가 법정 권한이 있다고 땅땅 때리는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주인 있는 땅에 움막을 짓고 살다가 주인과 시비가 붙었다고 가정합시다. 30대에 단독판사를 할 때는 ‘이사비용 달라’는 피고에게 ‘이사비용을 왜 줘야 하냐? 남의 땅에 들어와서 집 짓고 살았으니 나가는 게 맞지’라고 했어요. 지금은 그렇게 못해요. 주인에게 ‘법에는 어긋나는 얘기입니다만, 아이들도 있고 추운 겨울이라 이사비용을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라고 해요. 형사재판에도 합의가 있습니다. 검사에게 ‘재판 천천히 하자’고 해놓고 판사가 나서서 피해자와 피고인을 화해시킬 수 있어요. 판사는 상생의 결과를 위해 노력해야 해요.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며 법조문만 읊조릴 게 아니라.”
“재판은 하나의 게임”
-판결의 칼날이 세월과 연륜에 무뎌진 건 아닌가요.
“아니요. 사람과 인생을 이해하게 된 거죠. 요즘 범죄가 극단화하잖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누구에게나 자기 목숨이 걸려 있으면 사회적 가치로서의 정의는 소용이 없습니다. 살고 나서 옳고 그른 것이 있지, 죽는 마당에 옳고 그른 게 있겠습니까. ‘옳다’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옮음’이라는 것은 쌍방의 이해가 조화될 때 성립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쪽은 2000만원이 없어도 살 수 있고, 한 쪽은 2000만원으로 목숨 연장이 될 수 있다면 판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법질서에는 어긋납니다. 남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이 나중에 큰소리치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이제는 말 안 되는 것을 한번 더 생각하게 돼요. ‘바르다’라는 가치는 절대 고정적인 게 아닙니다.”
김 판사는 재판에 앞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일화 하나를 더 소개했다.
“간통죄 사건을 다뤄보면 당사자 중 한 사람이 법정에서 ‘안 했다’고 해요. 방청석에 자식이 앉아 있는 경우이지요. 판사는 ‘이 사람은 했다고 하는데 왜 안 했다고 합니까’ 하고 나무랍니다.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서 형(刑)을 더 덮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나중에 만날 자식 생각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거든요. 피고인이 자백을 안 했으니 1~2개월 형을 더 주면 됩니다. 판사 처지에서는 피고인이 거짓말을 해 (형을) 더 주는 것이니 괜찮고, 피고인은 피고인대로 많이 받을 각오로 거짓말한 것이니 괜찮아요. 법정에서 끝까지 부인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믿고 사는 겁니다(웃음).”
-파기율이 높으면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나요?
“그렇지 않아요. 판사가 중요한 것을 놓쳐서 형이 잘못됐다면 모를까. 대법원은 파기율을 근무평정에 반영하지는 않아요.”
-엄격한 증거재판주의가 정착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판사는 증거재판주의 속에서 몸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어요. 판사가 선언하는 진실은 법률적 진실입니다. 법에서는 증거로 확인되는 진실을 ‘진실’이라고 해요.”
김 판사는 “재판은 하나의 게임”이라면서 “증거에 의해 추론되는 하나의 결론”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확신이란 게 무서워요. 판사는 ‘사실 인정’을 두고 늘 고민합니다. 당사자들은 재판이 진행될수록 자기최면에 빠져요. 했어도 안한 것처럼 말하면서 점점 확신을 가져요. 판사는 신이 아니니까 고통 속을 헤매는 겁니다.”
-어떤 범죄를 무거운 범죄로 봅니까.
“공적인 이익을 크게 해치는 범죄입니다. 오염물질을 바다에 쏟아낸다든가, 불량식품을 만들어서 판다든가, 어린아이를 유괴한다든가….”
-사형선고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다행히 한 번도 없었어요.”
사형선고는 판사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다고 한다. 판사들은 “내 판단에 따라 사람의 생사(生死)가 좌우되니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고 말한다.
“법으로 생명을 침해할 수 없다”
-사형을 고려해야 할 만큼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요.
“1976년이었어요. 경찰서장 딸이었는데 친구를 토막냈어요. 술집에 다니며 함께 놀던 친구였는데, ‘같이 험하게 놀았는데 너는 왜 시집 잘 갔느냐?’고는 약 먹여 재워놓고 죽인 다음 토막을 냈어요. 그리고 사체를 옷장에 넣어놓고 평소대로 생활했어요.”
-왜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습니까.
“사형선고를 내리려니 처음이라 너무 떨렸어요. 피고인을 판사실로 불렀어요. 제 방에 와서 아무 말을 안 해요. 미모가 뛰어난 젊은 여자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안타깝더라고요. 20분간 얘기한 끝에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의식이 정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거죠. 죗값을 적게 받고 싶은 게 피고인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정신감정을 의뢰했는데, ‘정신병자는 아니지만 의식이 병적으로 가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15년을 선고했어요.”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십니까.
“네.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한이 맨 정신에 있는가? 그건 안 된다고 봐요. 우리 헌법에도 ‘인권은 공공의 필요와 복리를 위해 제한될 수 있다. 단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어요. 생명은 본질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자고 나라를 만든 건 아니거든요.”
-연쇄살인마 유영철 같은 범죄자를 세금으로 먹여 살릴 순 없지 않습니까.
“그놈을 죽이면 죽은 시민이 살아납니까? 그놈을 죽이고 싶은 건 복수감정입니다. 죽여야 속시원하다고 죽일 수는 없잖아요.”
-성선설과 성악설 중에 어느 쪽입니까.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사람은 무오염 상태입니다. ‘선하다’ ‘악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개념이죠. 애들 막 태어났을 때 자연상태잖아요. ‘순진무구’는 ‘착하다’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배고프면 울고, 좋으면 웃고, 동생이 미우면 때립니다. 자연 그대로입니다. 그러다가 욕심이 생기는 거죠. 한정된 지위와 물질 속에서 욕망이란 건 끝이 없어요. 치고 박고 싸우다가 법정까지 오는데 그것을 품위 있게 조정하는 제도가 필요해요.”
우리나라 법관은 대법원장을 비롯해 1800여 명이다. 지난 1월, 사법연수원 35기 수료식에서 92명의 예비판사가 탄생했다. 그중 여성 예비판사가 55명으로 59.8%에 달했다. 여성 판사가 남성 판사 수를 넘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이렇게 법관 생활을 시작한 판사가 지방법원에서 한 달에 책임지는 사건은 200여 건이다.
판사에게 양형(量刑)은 아킬레스건이라고 한다. 법원 판결이 논란이 되는 것도 유·무죄보다는 양형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양형시 판사는 피고인의 성장 환경, 범행 당시 상황, 사회적 가치관 등 피고인을 둘러싼 모든 것을 고려한다. 형사부 판사의 스트레스가 더 심한 이유가 바로 양형의 어려움에서 비롯된다.
법정서 소란 피운 후 청와대 진정
-일부에서는 ‘형량이 판사에 따라 다르다’면서 ‘고무줄 형량’을 비판하던데요.
“판사가 하나의 답을 내기 위해 재판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이 다르고 사연이 다르고 사건이 달라요. 사건이 같아도 판사가 다르면 형이 다르고 판사가 같아도 형이 달라요. 범죄에서 금액은 중요한 요소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민이 ‘액수가 같은데 왜 다르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어째서 다르다는 건지, 그렇다면 어째서 같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11월, 법원과 검찰은 고무줄 형량을 막기 위해 형사사건 재판에서 피고인의 구체적인 범죄 내용에 따라 형량을 규정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판사가 범행동기, 학력, 생활환경 등 양형기준에서 정한 범위를 이탈해 파격적인 선고를 할 경우 판결문에 양형 이유를 기재토록 하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형량이 도시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대체적으로 법조 역사가 깊은 도시가 엄한 편입니다. 대구가 대표적이지요. 대구는 오래전부터 제대로 된 법조 분위기를 익힐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어요. 법질서가 뚜렷했지요.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보수적이고 융통성 없는 것이고, 좋게 말하면 품위 있는 규격 속에서 질서가 딱 잡혀 있는 거죠.”
-선고 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주는 게 있다면.
“재판에 불복할 경우 항소하면 되는데, 정해진 절차를 따르지 않고 청와대에 진정한다든지 피켓을 들고 시위한다든지 하는 경우지요.”
김 판사는 1986년에 겪은 기막힌 일을 소개했다.
“60대 여성이 소란을 피우기에 ‘법정에서 시끄럽게 하면 안 됩니다’ 했어요. 이 여성이 일어서더니 ‘국민 여러분, 국민이 최고지 판사가 최고입니까?’ ‘나는 영부인과 친구다’ 하면서 마구 떠들더라고요. 그분한테 제가 10분간 수모를 당했어요. 판사 직권으로 영장을 발부했지요. 경찰이 잡으려 했는데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못 잡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여성이 청와대에 진정서를 보냈고 그것이 법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영장 발부를 철회하면 사건이 끝났겠지요. 일주일간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온갖 군데에 진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는 기도를 했어요. 할머니를 좀 편안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편안해지더라고요.”
-국민이 점점 법을 우습게 알고 법관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요.
“그런 것 같아요. 사회의 기본 가치가 혼란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어제 죄지은 사람이 오늘 출세하는 사회가 아닙니까. 법조계가 사면(赦免)을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법은 사회의 약속이잖아요. 그런데 죄짓고 형을 살던 사람이 얼마 안 돼 사면되고 심지어 지도자까지 된다면 다들 아무렇게나 살게 되죠.”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우리에게는 법말고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가 있어요. ‘한민족’이니 ‘도덕’이니 ‘효’니 하는 것이죠.”
도롱뇽과의 재판
-재판을 해보면 민족성이 나타나지요?
“맞아요. 미국처럼 장사를 주로 해온 나라는 정직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입니다. 우리나라는 몇천년간 농경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정직한 게 별 의미가 없어요.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데 하늘이 비를 적당히 내려줍니까? 홍수 나면 망하는 거고 오직 천명(天命)에 따를 뿐이니 계산이 정확하지 않아요. 또 농업사회라 집단생활을 해왔잖아요. 그래선지 민족성이 소집단적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집단 안에서 통하는 가치입니다.”
2005년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가운데) 시절.
“조정할 때 필요해요. 미국인이라면 계산을 정확하게 해줘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돈을 조금 손해 봐도 마음이 통하면 원수가 안 됩니다. 프랑스 르노자동차가 삼성자동차를 인수할 때 국민성이 드러나더군요. 삼성자동차는 ‘땅만 팔아도 1조원이 넘는데 왜 5000억원밖에 안 되느냐?’고 했어요. 하지만 르노에는 땅값 계산이 별 의미가 없었어요. 앞으로 자동차 생산에 1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장기 계획을 가지고 들어온 거지 땅 사자고 온 게 아니었거든요.”
김 판사는 “국민이 법을 귀찮게 여긴다”면서 “법이 생활 곳곳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어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법을 입 댈 때 안 댈 때 가리지 않고 마구 들이대면 품위가 없어져요. 남의 치마 속에, 바지 속에, 가정 속에 들어가면 안 돼요. 성매매특별법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 법은 우리나라 윤리수준에 비춰 느닷없이 엄한 법입니다. 법은 ‘이것만은 막아야겠다는 최소한’이 돼야 합니다. 법에서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과(過)하면 국민이 아무렇게나 살게 될 수도 있어요.”
김 판사는 “지난 30년 동안 맡은 재판 중에 경부고속철 천성산 터널공사 착공금지 가처분신청사건에 대한 재판이 가장 보람이 없었다”면서 “공익(公益)과 공익이 맞서 싸운 재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른바 ‘도롱뇽 재판장’으로 유명세를 탔다.
‘도롱뇽 소송’은 2004년 11월, 환경단체가 낸 경부고속철 천성산 구간에 대한 공사착공금지 가처분 신청사건을 말한다. 경남 양산 천성산의 고속철도 관통을 두고 지율스님을 중심으로 환경단체들이 고속철 터널공사가 도롱뇽을 비롯한 천성산의 동·식물, 고산습지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공사를 중단하고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사건이었다. 도롱뇽은 재판 신청자 중 하나였다. 김 판사는 부산고법 민사부에 있을 때 이 사건 항소심을 맡았다.
김 판사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법원이 조정권고안을 내는 등 끝까지 노력했지만 정부가 일방적으로 지율스님과 합의하는 바람에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양쪽이 서로 조금도 마음을 안 열었어요. 시민단체도 자연을 보호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고, 철도공단도 국민에게 좀더 편리한 교통수단을 제공하려는 것 아닙니까. 공익과 공익이 도무지 서로 이해하지 않았던 경우였어요. 환경단체들은 도롱뇽 사진을 들고 법정에 들어와서 ‘도롱뇽’에 대해 말하면 ‘맞다’ 하면서 피켓을 번쩍 들곤 했어요. 제가 ‘도롱뇽’을 상대로 재판을 한 겁니다. 동물하고 재판을 했으니…(웃음).”
-지율스님을 따로 만났다면서요.
“제 방에 불렀어요. 지율스님이 ‘단식중’이라면서 물도 안 마시더군요. 첫인상이 아주 정갈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스님한테 ‘스님이 보호하려는 도롱뇽도 중생이지만, 터널이 빨리 개통이 돼야 장사하고 돈도 벌 수 있는 사람들도 중생이다. 그 중생도 보호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니 지율스님이 미소를 띱디다. 저와 2시간가량 대담하고 나가면서 “당신이 내리는 판결에는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법원 무시한 청와대의 중재
-그런데 결국 조정이 안 되고 (가처분신청을) 기각했잖습니까.
“제가 한창 조정하고 있는 와중에 환경부 쪽에서 지율스님하고 합의를 해버렸어요. 환경부 차관과 문재인 청와대수석이 지율스님을 찾아간 거죠. 법원에서는 전문가들이 ‘환경에 치명적이다’고 판단하면 공사를 중단하고, ‘치명적이 아니다’라고 하면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법원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합의하고 공사를 중단시킨 겁니다. 환경부에서 일방적으로 법원에 통지가 왔어요. 기가 찼지요. 그래서 이번엔 법원이 환경부로 (의견서를) 보냈어요. ‘지금 상황으로는 환경 침해 우려가 적다. 일단 3개월 동안 국가비용으로 환경단체에서 요구하는 환경영향평가조사를 철저히 하자. 그리고 그 결과가 환경에 치명적인 것으로 나올 때는 (공사를) 중단하고, 치명적인지 아닌지 다시 논의하자. 국가는 협력하라. 그 대신 공사 중단은 해제한다. 한 달에 천억 손해를 내고 있으니 국민 원성도 높다’고 했습니다.”
-지율스님측은 환경조사 기간에도 공사가 계속돼야 한다는 것에 반발했군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변호사단체는 지율스님에게 ‘받아들여라. 안 받아들이면 설 자리가 없다’고 권유했답니다. 결국 ‘노’ 했어요. 일주일 후에 제가 선고했지요.”
-흔치 않은 가처분신청이었지요.
“말도 안 되지요. 법리적으로 안 돼요. 도롱뇽을 대상으로 무슨 재판을 합니까. 생태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도 순전히 감(感)입니다. 감을 증거화, 객관화하자는 건데… 선고 결과가 전국적으로 보도됐어요. 법원의 조정 노력은 묻혀버리고 ‘환경단체가 졌다’는 투의 보도였지요.”
김 판사는 김동규씨와 남상연씨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6년 탁양원(52)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사진작가 아내 덕분에 사진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그는 “내 삶은 비교적 윤택했다”면서 “월급의 9할을 저금할 수 있었던 것은 처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에겐 ‘누구집 아들’이라는 호칭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농업고등학교 나와서 제빙회사를 하셨는데, 회사가 송사에 휘말려 동업자들이 모두 거지가 됐어요. 어머니가 어린아이 옷을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고 팔았어요. 중하류층 자식이었죠. 장인어른은 은행지점장을 하셨는데, 제게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김 판사가 지역 법조계에서 ‘호탕하다’ ‘할말 다 한다’ ‘여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데에는 경제적인 여유도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낸 이른바 ‘8인회’ 회원이다. 8인회 구성원으로는 정상명 검찰총장, 조대현 헌법재판소 재판관, 서상흥 헌법재판소 사무차장, 이종왕 삼성그룹 법무실장, 법무법인 화우의 강보현 대표 변호사 등이 있다.
“노 대통령이 부산에서 살 때 몇 번 그 집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현관 앞에 애들 신발이 많았어요. 친구들이 ‘노무현’ 하면 아이 많은 집을 연상할 정도였습니다. 형님의 자식들, 조카들이었지요. 조카들까지 다 키웠나 봅니다. 권양숙 여사가 참 대단해요.”
김 판사는 “그때의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어떤 게 변한 것 같냐”는 기자의 물음에 아쉬운 듯이 “변했지만, 아직 그때의 따뜻함이 남아 있을 겁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판사 되는 순간 출세는 끝났다”
그는 판사의 자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판사는 얘기를 들어줄 자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모든 가치를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법정에서 사람들은 대개 쓸데없는 얘기부터 하지요. 누구나 그 처지가 되면 쓸데없는 얘기부터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판사는 설령 재판이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충분히 심리해야 하는 거죠. 그러면 당사자들이 판사를 신뢰하게 됩니다.”
김 판사는 요즘 개명(改名) 신청 재판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 ‘개명 요건을 완화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온 후 개명 신청이 늘어 지난해 12월과 1월에는 전국적으로 한 달에 1만여 건이 넘었다.
“단순히 성명철학적인 이유로 이름을 바꾸겠다는 사람이 많아요. 그건 힘듭니다. ‘김일성’ ‘김정일’과 이름이 같다고 바꿔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름이 족보상 겹친다든지 놀림감이 된다든지 하는 경우엔 다 고쳐줍니다. 개명 신청 건을 검토하면서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죽 읽어보면 인생이 참 재미가 있습디다.”
김 판사는 법정에서 인사하는 법관이다.
“판사가 들어서면 방청객이 다 일어서잖아요. 그건 판사에게 인사하는 겁니다. 판사도 같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앉으면 좀 좋습니까? 저는 후배 판사들에게 ‘인사하자’고 권해요.”
대법관 인선과 관련된 질문을 막 꺼내는 순간 그가 이렇게 말을 가로막았다.
“판사가 되는 순간 출세는 끝난 겁니다. 세상에는 4대 전문직이 있다고 해요. 교육자, 성직자, 의사, 판사입니다. 의사는 병을 잘 고치면 되지 과장이니 병원장이니 하는 게 뭔 소용이 있습니까. 성직자는 영혼을 인도해서 영생을 구원하면 되는 거지 추기경이면 어떻고 목사면 어떻습니까. 판사도 남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면 되지 부장판사니 법원장이니 하는 직급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욕심이지요. 저는 출세를 도모하지 않고 오직 정성껏 시비를 해결하는 판사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