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실패한 노무현과는 다른 노무현 같은 대통령 필요”

다음 세대 위한 인명진 목사의 고언

  • 대담·구해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정리·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5-21 1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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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도 우리도 옳았다, 서로 존중해야
    • 보수 부패는 순진, 진보 부패는 정교
    • 美中 샌드위치 신세…남북경협이 돌파구
    • 당국자 ‘공 다툼’ 탓 MB 대북정책 실패
    • ‘朴 청와대’에 정신 박힌 참모 있는지 의문
    “실패한 노무현과는 다른  노무현 같은 대통령 필요”
    갈릴리교회는 ‘공공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사회선교에 힘쓰는’ ‘다음 세대의 희망을 품은’ 공동체를 지향했다. 이 교회 인명진(69) 목사는 사회에 참여한 목회자였다. 운동권이었으며 정치 논객이기도 했다.

    인 목사는 긴급조치 위반, YH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투옥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맡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윤리위원장도 지냈다.

    인 목사는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한국신학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난해 말 갈릴리교회에서 은퇴했다. 4월 6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 교회는?

    “아예 안 나가죠.”



    ▼ 방을 아예 뺀 건가요.

    “그럼요. 사랑의교회, 순복음교회도 물러난 사람 탓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얼굴을 일절 안 비쳐요. 이웃한 곳에 가더라도 다른 곳에 주차해요.”

    ▼ 멋있습니다.

    “역할이 끝났으니까요. 공식으론 지난해 말 은퇴했는데, 1년가량 안식년을 가졌으니 은퇴한 지 1년 3개월 됐죠. 호적 생일이 실제보다 1년 늦어요. 만 70세가 정년이니 3년 조기 은퇴한 겁니다.”

    “각박한 세태에 눈물이 나요”

    ▼ ‘신동아’ 5월호 ‘국가미래전략을 묻는다’에선 도법 스님을 만났습니다. 화쟁(和諍)의 길을 설명하면서 인 목사님 말씀을 하더군요.

    “도법 스님과 몇몇 일을 함께 했어요. 세월호 문제를 중재했고, 쌍용자동차 사태 때도 힘을 모았고요. 예전에는 종교인의 중재가 통했는데 요즘은…. 굴뚝에 올라가 100일 넘게 농성해도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변했어요. 세태에 눈물이 납니다. 각박해졌다고나 할까요.”

    ▼ 사회문제가 패거리 싸움, 정쟁거리가 돼버립니다.

    “무슨 일이든 다 이념으로 접근해 다툽니다. 학교 급식은 복지와 관련한 것인데도 이념 싸움을 하더군요.”

    ▼ 목사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1979년 8월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일입니다. YH사건은 부마항쟁(1979년 10월 16~20일 부산과 경남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으로 확산되면서 20년 가까이 이어진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박정희 정권을 현재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1969년 삼선개헌 반대부터 시작해 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선 후 박정희 정권에 각을 세웠습니다. 특히 집중한 게 노동자 문제였죠.

    누가 뭐래도 박정희 정권의 공은 경제 발전 아니겠습니까. 경제개발 과정이 남긴 가장 큰 상처가 노동자 인권 유린입니다.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삼은 권위주의 독재 체제라는 점이 박정희 정권의 가장 아픈 부분이죠. 약점인 노동자 문제에 각을 세운 사람이니 박정희 정권에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없죠.

    현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질문이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발전 방향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경제 발전도 때가 있다고 봐요. 중화학공업 육성도 옳았고요. 대기업 중심 발전도 단기에 나라를 성장시키려면 채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어릴 적, 하루 세끼 밥 못 먹고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요즘만큼 풍요를 누리는 것은 단군 이래 처음 아닙니까. 박정희의 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공이 큰 만큼 그늘도 짙은 겁니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을 어느 단계에서 해결했어야 합니다.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새로운 정책으로 전환했어야 해요. 유신을 통해 독재한 것도 큰 잘못이죠. 3선쯤 하고 끊었어야 했습니다. 박정희의 잘못이 우리 역사의 짐, 그늘로 남아 있습니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박정희 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인권운동은 매우 옳은 행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박정희도 옳았고, 우리도 옳았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진영 다툼이 심각합니다.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 있었기에 경제개발과 동시에 민주화를 이뤄낸 겁니다. 앞서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 훌륭했다고 평가한 것처럼 산업화 세력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과 헌신을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 미래의 대한민국이 반듯하려면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희생, 공헌에 대한 인정이 상당 부분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폄하되는 느낌이 있어요. 평형을 이루다가 거꾸로 뒤집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역사 발전의 후퇴죠. 인정하고, 상생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최근에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깎아내리면 또 다른 갈등, 반목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에 생선 맡긴 꼴”

    ▼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시위 지도부이던 국민운동본부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보 단일화 협상에도 참여했고요. YS·DJ의 분열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두 갈래로 나눴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지속되고 심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후보 단일화 협상이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 까닭은 뭐였습니까.

    “당시를 생각하면 통한을 느낍니다. 책임도 느끼고요. 6월 민주항쟁은 시민혁명이었는데, 투쟁의 산물을 정치인들에게 고스란히 넘긴 것은 정말로 어리석었습니다. 투쟁만 했지, 이긴 다음에 어떻게 할지 전략적 사고를 못했어요.

    첫째는 헌법 개정입니다. 시민단체가 참여했어야 하는데, 정치인들에게 통째로 넘겼어요. 현행 헌법은 3공화국 헌법보다 후퇴했습니다. 요즈음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번에도 정치인들에게 맡기면 굉장히 후퇴할 공산이 큽니다. 정치인은 기득권 중심으로 사고하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여당 때 주장하던 것을 야당 되면 반대하는 게 한국의 정치인이죠. YS·DJ는 그런 정치인들과는 다른 사람일 줄 알았습니다. 동지라서 맡겼는데 고양이에 생선을 맡긴 꼴이 됐죠.

    둘째, 후보 단일화입니다. 국민운동본부 지도부가 6월 민주항쟁에서 승리한 뒤 하나둘씩 헐값에 정치권으로 넘어갔습니다. 권력욕 있는 사람은 권력으로, 다른 욕심 있는 사람은 다른 것으로 유혹했죠. 30여 명 되던 상임집행위원회 인사들이 한두 달 지나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더군요. 정치 세력에 편입돼버린 겁니다. 목숨 걸고 싸운 이들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팔려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지도부의 상당수가 정치권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후보 단일화를 주장한 이들은 이단, 배신자 비슷하게 취급받았어요. ‘비판적 지지’(DJ 지지) 쪽에 서야 민주투사로 대접받았습니다. 후보 단일화를 주장한 이들은 숫자도 적었죠. 후보 단일화가 YS를 지지한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민주화 진영 10년의 집권 플레임을 짜자는 것이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김영삼 씨가 먼저 대통령 되는 게 좋다고 봤습니다. YS는 정당 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DJ는 그렇지 못하기도 했고요. 현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양김 씨가 뭐가 다르냐, 두 분 모두 대통령을 지내지 않았느냐고 얘기하겠지만, DJ는 당시 상당수 국민 마음속에서 기피 인물이었습니다.”



    “경제민주화가 ‘원칙’ 돼야”

    ▼ 색깔론을 말씀하는 것이군요.

    “독재 정권이 덧씌운 이미지지만 시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대중 씨가 이미지를 바꾸려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오죽했으면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손을 잡았을라고요. DJ가 정권을 잡은 건 YS가 집권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YS가 하나회 척결 등을 하지 않았다면 DJ 정권은 없었을 거예요.

    후보 단일화를 주장한 이들이 가졌던 현실적 대안인 ‘김영삼 먼저, 김대중 나중’대로 됐더라면 민주화 세력이 분열하지 않았을 겁니다. 노태우 정권이라는 과도기도 없었을 것이고요. 안 거쳐도 될 노태우 시기를 거치면서 민주 세력이 지역으로 분열됐습니다. 1987년 시민 항쟁에서 승리한 후 국력을 모아 분열을 막았으면 지금과 같은 지역주의 또한 없었을 겁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요. 굉장히 통탄스럽습니다. YS보다 DJ 잘못이 더 크다고 봐요.”

    ▼ ‘87년 헌법’이 3공화국 헌법보다 후퇴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경제민주화에서 후퇴했죠. 119조가 대표적 사례고요.”

    헌법 119조 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한 반면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헌행 헌법이 규정한 경제질서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라는 다수 견해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혼합 경제질서’로 봐야 한다는 소수 견해로 나뉜다. 다수설은 1항이 원칙, 2항이 예외라고 본다. 경제민주화를 규정한 2항은 원칙이 아니라 원칙인 1항을 보완한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원칙은 제헌헌법이 가장 강합니다. 거칠게 설명하면 현재의 1항, 2항 순서가 정반대입니다. 제헌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씨가 사회민주주의를 공부한 사람이죠. 헌법 개정을 거치면서 경제민주화 조항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앞서 말했듯 현행 헌법은 3공화국 헌법보다도 후퇴했고요. 경제민주화가 헌법에서 원칙이 돼야 합니다.”

    ▼ 김영삼 정부에 행정쇄신위원장으로 참여했습니다. 아들 현철 씨가 국정농단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경제위기를 초래했지요.

    “역대 대통령 인기 조사를 하면 김영삼 씨가 꼴찌에 가깝더군요. 역사가 언젠가 재평가하리라고 봅니다.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을 잡았지만 그것도 변절, 야합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김영삼 정부의 공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실명제 실시를 생각해보세요. 하나회 척결은 또 어떻습니까. 전두환, 노태우 잡아넣은 것도 그렇고 지방자치 확대 등 여러 개혁 조치가 있었죠. 이런 부분에서 높게 평가받아야 합니다. 어떤 정권보다 공이 덜하다고 보지 않아요.

    다만, 외환위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일부 있었더라도 김영삼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죠. 예방했어야 하는데, 관리를 잘못했으니까요. 아들을 그렇게 관리한 것도 흠이죠. 김대중 대통령도 아들 셋이 다 문제가 있었죠. 노무현 대통령도 형님이 탈을 일으켰고요.”

    준비 안 된 노무현의 비극

    ▼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을 함께 하셨더군요. 노무현 정부는 국정 운영과정에서 미숙한 점이 많았습니다. 임기를 마친 후 가족 비리 등으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꼽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 변신할 때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습니다. 부산에서 시국사건이 연거푸 터지는데 김광일 변호사 등을 제외하면 부산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변호사들이 계속 내려가야 했어요. 그래서 노무현 변호사를 추천받았고 그때부터 노 변호사가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에 가담했죠. 1987년 6월 항쟁 때 노무현 씨가 부산 집행위원장이었습니다. 국민운동본부 대변인 하던 나하고도 무척 가까웠죠. 그 후 노동자 대투쟁 때 노 변호사를 대구로, 울산으로 보내는 역할을 내가 했습니다. 현직 변호사로서 구속될 만큼 노동 현장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그 뒤로는 만난 적이 별로 없는데,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다고 연락이 왔더랬습니다. ‘노 의원은 대통령 할 만한 사람인데, 섣불리 출마하지 마시라. 대통령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대통령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준비가 덜 된 것 같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러고는 돕지 않았죠.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어요.

    노무현 씨가 품은 이상은 대단했다고 평가합니다. 실패한 노무현 씨와는 다르게, 제대로 준비된 프로그램을 갖춘 노무현 같은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필요합니다. 정신은 좋았는데 준비가 없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문제의 근본을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가졌는데 정책도, 전략도 없었고요. 여기저기서 툭툭 한마디씩 해 사람 화나 돋우고, 이거 건드리고 저거 건드리다 적만 늘어났죠.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인데 준비를 안 한 거예요. 그래서 실패했죠.”

    “MB 도운 것은 판단 잘못”

    “실패한 노무현과는 다른  노무현 같은 대통령 필요”

    인명진 목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 협상에 깊숙이 관여했다.

    ▼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으로 정당 정치에 참여해 보수의 혁신을 주도했습니다. 부패는 군사독재 정권, YS·DJ 정부, 노무현·MB 정부를 거치면서 늘 발생했습니다. 보수, 진보 어느 세력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진보, 보수 중 보수가 부패에서 훨씬 순진해요. 양 진영을 다 경험한 바에 따라 말하면 부패와 비리에서 보수는 단순하고, 진보가 정교합니다. 보수는 수법이 순진해 들키기도 잘합니다. 보수는 부패의 덩어리가 크고 뿌리가 깊어 해결에 어려움이 있고, 진보는 상당히 정교하게 부패해 해결하기 어렵지만, 정교한 진보 쪽의 부패 해결이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에서 윤리위원장으로 일할 때 강력한 조처를 내놓아도 당이 졸졸 끌려왔습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둬 그렇게 안 할 수 없었겠지만,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민주당에 가서 이런 식으로 일했으면 사람들이 절대로 당신 말대로 안 한다.’ 경험에 따르면 일리 있는 얘기예요.”

    ▼ 결과적으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도운 셈이 됐습니다.

    “내가 이명박, 박근혜 두 사람을 검증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대선에 임박해 비리가 드러나면 꼼짝없이 당하겠다 싶었죠. 노무현 정부가 국정 수행 능력을 웬만큼만 보여줬어도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안 했을 겁니다. 나라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패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한나라당 후보 중 이명박 씨는 정치 선진국 기준으로는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잡범 수준의 처벌을 받은 게 여러 번이었고, 검증해보니 이런저런 혐의가 100개 가까이 되는 겁니다.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었던 거죠. 박근혜 씨는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판단을 잘못한 것 같아요. 차라리 박근혜 씨가 하고 지나가는 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 지역주의를 완화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정치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다당제로 가야 해요. 지방분권이 필요하고요. 지방에 법률 제정권도 줘야 한다고 봅니다. 지역주의 하려는 사람은 지역정당을 조직해 지방 분권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앙정치에 와서 싸움하지 말고 지역 안에서 자기들끼리 해결해야 해요. 조금이라도 더 먹는 쪽이 완전히 싹 쓸어가는 대통령 5년 단임제 상황에서는 지역주의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꼬였을 때 목사님께서 남북 간 협상을 직간접으로 지원했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 씨가 개성공단에 억류됐을 때도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줬다고 들었고요. 남북 정상회담 사전 논의에도 발을 담근 것으로 압니다. 이명박 정부의 남북협상이 최종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 원인은 뭔가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오랫동안 북측과 관계를 맺으면서 신뢰를 형성했습니다. 유성진 씨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북측과 협의해 데려온 것처럼 돼 있지만, 북측에서 나를 통해 협상했습니다. 정부가 잘 뒷받침해줬어야 하는데, 혼자 여러 가지를 책임지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주선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간 적도 있는데 부처 간의 공 다툼,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적 대사가 망가지기도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어떤 곳에서 열심히 하면 다른 곳에서 방해하는 공 다툼을 많이 하더라고요.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과 남북협상에서 실패한 것은 남북문제 해결을 맡아 하려는 개인적 이기심, 기관의 조직적 이기주의, 공 다툼 탓이었습니다. 공 다툼, 이기주의, 영웅주의가 민족 문제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수년 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얘기를 지금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 민주화운동에 몸담았고 보수정당에도 참여했습니다. 지금 보수우파, 진보좌파 간 대립이 극심합니다. 감정적 충돌이 많고 인신공격까지 일삼습니다. 두 진영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책으로 경쟁하는 풍토를 만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양쪽 다 성숙해야죠.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일어나는 게 정치의 본질이죠. 충돌이 없으면 보수, 진보라고 따로 이름 지을 까닭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패거리 정치일 뿐이에요. 앞서 말했듯 다당제가 필요합니다. 보수세력 지지층 30~40%가 굳건합니다. 30~40%의 지분으로 독식하는 겁니다. 다당제를 생각해봅시다. 보수세력이 집권하려면 10%, 20%를 가진 정당 혹은 정당들과 연합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구애(求愛)가 아니라 협박”

    ▼ 보수 정권인 박근혜 정부 등장 이후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는 전보다 가까워진 반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전통적 동맹인 미국과의 관계는 삐걱거린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는 소극적인 반면 중국이 주도한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는 참여했습니다. 한중 FTA에는 적극적인 반면 안보적 차원에서 중요한 고고도미사일방어(THADD) 문제에서는 모호한 위치에 서 있고요.

    “한미동맹이 균열하는 것, 대일관계가 악화하는 것을 크게 걱정합니다.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 중 일본에 감정 좋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인데, 현실 인식에 감정이 섞인 것 같습니다. 전임 이명박 정권 때 미국과 너무 가까웠던 탓에 일어난 반작용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한미관계, 한중관계를 잘 다루면 중국, 미국을 각각 견인할 수 있겠지만, 잘못하면 미국에 차이고 중국에 굴종하는 아주 복잡한 처지에 있는 게 우리예요. 미국이 우리가 중국 쪽으로 경사되는 것을 우려하는 상황이 된 것은 우리 정부의 전략에서 비롯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이렇게 됐다’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양쪽에서 관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압력과 구애를 착각한 것 같아요. 중국에서 누가 왔다 가면 협박 받는구나, 미국에서 누가 온다고 하면 협박하겠구나, 이렇게 인식되지 않습니까. 협박받고 있는 거죠.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습니다. 걱정이에요.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할 방안 중 하나가 북한 이슈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 남북문제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남북문제를 풀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할 통로 또한 북한이라고 생각해요. 개성공단 같은 곳을 북한에 여러 개 만들어야 해요.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정종욱 부위원장이 흡수통일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는데, 그런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통일을 말할 때가 아니라 경제협력을 할 때입니다. 남북경협이 활발해지면 중국에 매달릴 까닭이 줄어듭니다. 북미수교, 북일수교를 우리가 앞장서 주선해야 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해요.

    박근혜 정부가 핵 문제 해결과 관련해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기대하고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그로 인해 미국이 우리를 의심합니다. 남북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남북 문제에 약점이 있으니까 미국, 중국이 우리를 깔보는 겁니다.”

    “기독교가 나서면 될 일도 안돼”

    ▼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분이신데, 현대사에서 기독교는 민주화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한미동맹을 뒷받침하는 주춧돌 구실도 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도 미국 정부에 대한 영향력이 줄고 있어요. 미국 교회도 보수화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일한 미국 기독교의 옛 주류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카터 행정부 때 그분들이 미군 철수 반대운동을 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더랬죠. 한국 교회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영향력 있는 인물이 없어요. 사회에 대한 역할도 크게 줄었고요. 앞으로 교회가 한미관계 이슈에 나서면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소지가 큽니다.

    과거의 기독교는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제헌국회 때 이승만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게 용인될 정도였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때도 기독교의 공이 컸습니다. 6·25전쟁 때도 활약이 대단했고요. 그런데 민주화운동을 한 이후에는 기독교가 공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일반 국민이 기독교에 신뢰를 보내지 않아요. 신뢰가 없는 집단이 한미관계에 어떤 도움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니까요. 가만히 있는 게 나아요.”

    “역사 문제에 몽골 활용해야”

    ▼ 기득권 이미지가 교회에 덧씌워져 있는 듯합니다.

    “그런 이미지가 아주 심하죠. 걱정하는 게 하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친미를 얘기하면 올드 패션, 촌놈, 고루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대놓고 미국이 좋다고 얘기하기가 상당히 어렵거든요. 미국도 반성해야 하고, 한국 정부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일어나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죠.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 쾌유 기원 부채춤을 추고…이래서 되겠어요? 정부도 과했습니다. ‘뉴욕타임스’ 등을 읽어보면 미국 사람들조차 거북스러워하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있는지 걱정입니다. 대통령이 왜 대사 병문안을 갑니까.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했습니다. 격에도 안 맞고요. 비공개로 전화 한 통 하면서 위로하는 정도였어야죠. 이런 행동이 국민으로 하여금 미국에 정 떨어지게 하는 겁니다.”

    ▼ 코리아몽골포럼 이사장을 맡는 등 한국과 몽골의 협력, 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몽골은 한국의 미래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미래의 의미뿐 아니라 역사적 관계도 소중합니다. 우리 뿌리를 찾아가면 몽골이 나옵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역사 논쟁이 적지 않습니다. 몽골로 거슬러 올라가면 과학적 해결 방안이 나옵니다. 현실적으로 몽골이 우리를 필요로 하고 우리도 몽골이 필요합니다. 남북관계를 해결하는 데서도 몽골이 구실을 할 수 있어요. 몽골은 북한과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맺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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