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내가 살아남아 1m짜리 농어 잡을 줄 빨치산 동지들이 짐작이나 했겠나”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07-30 10:4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삼천포 부잣집 막내딸은 아버지와 오빠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다.
    • 토벌대의 집중사격에도, 국군의 사살에도,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도 질기게 살아남아 열아홉 소녀는 이젠 일흔셋의 ‘역사’가 되었다.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엔 분홍빛 구름 같은 자귀나무 꽃이 산자락에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바람은 세찼고 간간이 빗발이 흩뿌렸다. 험한 날씨 속에서 자귀나무 꽃은 할말을 잔뜩 품고 아우성을 지르듯 비극적인 모습이었다.

    아까 고계연씨는 내게 저 붉은 꽃을 뭐라고 부르는지 물었다. “자귀나무요”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얼른 “그때 지리산에도 저 꽃이 있었더냐”고 물었다.

    “그때는 꽃을 들여다볼 새가 없었네요. 이제사 보이네요. 저 꽃이 저렇게 소란을 부리는 게….”

    때가 되면 꽃은 절로 피고 진다. 세월 따라 사람도 쉼 없이 나고 죽는다. 천지는 불인(不仁)하다. 그게 자연인 것을. 새삼 들먹이는 것조차 쑥스러운 노릇이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고민하다 나는 결국 발가락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기로 한다. 그것만이 또렷하게 남아 그날을 증거하니까. 다른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벗도 노래도 이념도 고통도.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발가락이 다 떨어져나간, 몽당하게 짧아진 못난이 발뿐이다.



    고계연씨의 오른발에는 발가락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왼발도 반 너머 뭉개졌다. 동상 후유증이다. 전쟁 나던 그 해부터 세 해 겨울을 산에서 양말도 없이 눈 속을 뛰어다녔더니 살은 얼고 뼈는 삭고, 그걸 반복하다 마침내 썩어버렸다.

    그렇게 생살이 썩는 아픔을 감당하면서 그는 20대의 전반부를 넘겼다. 포로수용소에 잡혀 들어갔을 때 참혹한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제 손가락으로 제 발가락을 툭툭 분질러 뽑아내 버렸다.

    “하니까 되데요. 감각이 없어 아프지도 않았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하지만 그는 이내 슬쩍 진저리를 쳤다. 이야기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상황이라 듣는 나도 숱하게 진저리를 쳐야 했다.

    발가락이 하나도 없는 발

    “그래도 이 발이 나를 구했네요. 포로로 잡히던 날 날이 저물자 군인들이 대충 천막을 치데요. 내 발에서 썩는 냄새가 지독하게 났제. 그러니까 ‘뭐 이런 게 있어?’하면서 날 천막 안에 들여놓지 않고 문 앞에 팽개치데요. 한밤중에 군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여자 몇 명을 끌고 나갔어요. 끌려나갔다 온 젊은 여자들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그게 뭔지 내가 다 알았네요. 내가 그런 일을 당했더라면 산에서 굴러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이 발이 날 살렸제요.”

    포로수용소에서는 동상 걸린 사람들이 모두 한방에 수용됐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으로 다들 말이 아니었다. 치료라고는 고작 머큐로크롬을 발라주는 정도였다. 약품이 귀한데다 굳이 살려낼 가치도 없는 포로들이었으니.

    “가끔 의사가 들어와서 이렇게 말하네요. ‘다리 잘라주기 원하는 사람!’ 그러면 사람들이 손을 들어요. 하도 고통이 심하니까. 내 곁에 누워있던 모스크바대학 나온 여자도 손을 들었어요. 다리를 몽땅 잘라 갖고 와서는 아프지 않아 살 것 같다고 좋아하데요. 나는 암만 아파도 다리 자르기는 죽기보다 싫데요.”

    내가 질문할 여지도 없이 고 선생은 이야기를 곧잘 풀어나갔다. 현재에서 전쟁 때로, 자식에서 친정오빠로, 낚시에서 이불집으로. 화제는 이리저리 점핑했지만 그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했다. 우리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한 사람의 개인사가 이렇듯 드라마틱할 수 있는 시대란 불운한 시대임이 분명하지만 이렇듯 사무치는 개인사가 한 인간을 커다랗게 키워놓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여느 할머니와는 썩 달라 보였다. 거침없고, 의연하고, 총명했다. 1932년생이니 일흔셋이지만 노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정정했고 열정에 넘쳤다.

    “우리 딸(둘째딸 김민정씨는 이탈리아에서 주목받는 화가로 활동중이다)에게 모스크바 전시를 한번 하라고 말해요. 바이칼 호수에서 낚시 한번 해보게. 내가 알래스카 연어낚시도 가고 세계 어느 곳 안 가본 데 없이 다녔는데 바이칼에만 못 갔네요. 젊어서 부르던 노래가사에 노상 나오던, 그 바이칼에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그의 자제들은 엄마가 낚시터에만 가면 기분이 좋아지는 걸 잘 알아 낯선 나라에 도착하면 일단 그를 낚시터부터 데려간다.

    “날 거기 부려놓고 저네끼리 실컷 놀다오면 나는 종일 꼼짝 않고 거기에만 앉아 있제요. 난 외국 가서도 어설프게 영어 씨부리지 않고 딱딱 한국말만 해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다 알아듣던데 뭘.”

    그는 빨치산이었다. 3년을 지리산에서 살다 군경합동 토벌대에 체포됐다.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었다. 산에 간 건 아버지와 오빠를 찾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선택이 아니었다.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갔다.

    고 선생의 이야기를 암만 들어봐도 인정 많고, 의협심 강하고, 오기 있고, 당차다는 것 말고 그에게서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되레 부잣집 딸다운 부르주아 근성, 이를테면 일상용품에서의 고급 취향, 빼어난 심미적 감각, 고위 인사와의 교분, 사립학교 선호 등 민중적 삶과는 거리가 먼 인생관이 읽힐 뿐이다.

    그런 그가 고집스럽게 전향을 거부하고 자수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한낱 우스개일 뿐인지도 모른다. 신념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존심에 의해 대세가 결정되는 일이 숱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리석고 두려움 많고 한계에 갇힌 인간일 뿐이고 시간은 가차없이 흘러가면서 운명의 무늬를 만드니까.

    고계연은 삼천포 ‘고기룡 백화점’ 막내딸로 태어났다. 요즘 같은 백화점은 아닐지라도 그 지역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고급만물상이었다. 부친은 백화점 말고도 제재소와 국정교과서 보급사업, 그리고 일본과의 무역까지 손을 뻗친, 경남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다.

    굶주리던 시대였지만 그의 집안은 모든 게 풍족했다. 아버지는 ‘딸이 더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분이어서 고계연은 여섯 살에 삼천포유치원에 들어갔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부경남의 최고 명문이었던 진주공립여중(현 진주여중고)에 진학했다.

    오빠가 셋, 언니 하나, 남동생 하나. 형제 많고 살림 넉넉하고 아버지가 트인 분이라 다복하기 짝이 없는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배구공을 선물할 만큼 ‘신식 인생관’을 가진 분이었고 집안 여자들이 서울에서 옷을 주문해 입는 사치도 허락하였다.

    고계연은 햇살 쏟아지는 마당에서 오빠와 올케들이 까르륵 웃으며 배구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아버지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고 집안에 늘 화가 손님을 청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재주 있는 화가들이 한번 오면 일년 이상 우리집에서 묵곤 했네요. 그림 그리는 데 몇 달, 풀을 쒀서 삭히는 데 몇 달, 삭힌 풀로 배접하는 데 또 몇 달…. 종종 그분들을 위해 주연을 베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흥에 겨워 화가들이 기생 치마폭에 그림을 그려주는 것도 여러 번 봤네요.”

    삼천포는 풍광이 아름답고 바다밭이 기름진 고장이었다. 날씨가 따뜻해 겨울에도 춥지 않았고 온화한 날씨만큼이나 사람들의 인심도 좋았다. 쾌활한 소녀 고계연은 곧잘 오빠들을 따라 바닷가로 낚시하러 가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낚시란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기던 그 시절에 그는 오빠들 곁에 앉아 볼락과 꽁치를 마음껏 낚아 올렸다. 더 어린 나이에는 복어를 잡아 배를 펑펑 터뜨리며 놀았다. 행복하고 찬란했다. 근심도 부족함도 전혀 없었다.

    양단이불 덮고 자는 ‘소공녀’

    진주여고 입학하던 해에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이 뭔지도 몰랐다. 같이 놀던 일본인 친구가 이사가게 된 것이 서러워 붙잡고 엉엉 울었다. 진주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집에서는 수시로 물 좋은 생선이며 떡, 과일을 기숙사로 보내줬다. 덕분에 고계연 학생은 걸레질 한번 하지 않는 특권을 누렸다. 다른 학생들이 후줄근한 무명이불을 덮을 때 그는 집에서 보내온 화사한 양단이불을 덮었다. 가히 ‘소공녀’의 호사를 당연한 듯 누렸다.

    “내 생전에 호강할 것을 그때 다 해봤지요. 산에 있을 때도 동지가 죽으면 나는 호사를 누릴 만큼 누려서 죽어도 억울할 게 없지만, 이 사람은 평생 고생만 하다 죽는구나 싶어 더 가슴이 무너졌어요.”

    학교 앞 등하교 길에는 중신애비들이 죽 늘어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신애비들은 그렇게 서 있다가 눈길을 끄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뉘집 딸인지 묻곤 했다. 그렇게 인물을 보고 집안을 확인한 다음 혼담을 넣으려는 현장조사였던 셈이다.

    그는 붓글씨를 잘 쓰고 수를 잘 놓는 학생이었다. 수줍어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친구들은 그에게 ‘오만해서 그렇다’고들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니 붙임성 없는 건 사실이었다. 중학 5학년 때 결핵에 걸려 요양차 삼천포 집으로 왔다. 그것이 학창시절, 아니 빛나는 청년기의 마지막일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둘째오빠 고경전은 부산상고를 다녔고 야구부 활동을 했어요. 활달하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데다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죠. 얼굴이 아주 고운 학교 선생님과 연애결혼을 했지요. 둘째오빠는 인물이 헌칠하고 언변이 좋아 사람들 마음을 금방 사로잡았어요. 오빠 연설을 들으려고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 많은 이들을 마음대로 웃기고 울리는 재주가 있었죠. 한번은 삼천포 극장에서 최승희무용단이 공연을 했는데, 둘째오빠가 다리를 놓아 진주여고 시절 무용을 했던 올케언니가 찬조출연을 하기도 했고….

    그런 둘째오빠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네요…. 일본 명치대 출신 사회주의자였던 장인의 영향을 받아 그리 된 거제요. 따지고 보면 그 오빠로 인해 우리집이 풍비박산 난 거네요.”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남편 김봉철(좌). 국민학교 시절 찍은 가족사진. 맨 앞줄 왼쪽이 고계연이다(우).

    아버지는 시국이 수상함을 재빨리 파악했다. 큰오빠를 시켜 둘째오빠를 일본으로 밀항케 했다. 독배를 한 척 사서 둘째오빠를 일본에 데려다 놓고 큰오빠가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 그날부터 삼천포 고기룡 백화점 대가족의 혼란과 참상이 시작됐다. 지난 시절 안락하고 부유했던 그만큼 시련은 더욱 괴롭고 모질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은 금세 삼천포까지 밀고 내려왔다. 피난지인 섬으로 기별이 왔다. 둘째오빠와 연락이 닿은 듯했고, 전세(戰勢)가 기울었으니 육지로 나와 협조하라는 기별이었다. 아이들과 올케, 어머니, 할머니를 빼고 모두 삼천포로 나왔다. 고계연도 함께 나왔다.

    인민군들은 형제들에게 감투 하나씩을 나눠줬다. 아버지와 오빠는 인민위원회, 그와 동생은 학생동맹, 언니는 여성동맹. 민요풍의 노래도 배우고 학습도 받았다. 젊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활기차고 쾌활했다. 재미도 있었다. 그러기를 한달 반 남짓. 삼천포 앞바다에 포탄 퍼붓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국군의 반격이었다.

    전쟁, 학생동맹, 그리고 피난

    전세가 뒤집혔다. 인민군이 후퇴를 시작했다. 마을 분위기가 갑자기 뒤숭숭해졌다. 어느 마을에선 부역자들이 전부 처형됐다는 둥, 산청이나 거창에선 보도연맹 사람들이 개처럼 끌려나가 죽었다는 둥 끔찍한 소문이 나돌았다. 아버지도 오빠들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열아홉 고계연도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남아있으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날이 어머니 생신이어서 외갓집에서 밥을 먹었네요. 낮부터 함포사격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들려오데요. 사방에는 피난민 천지고. 학생동맹 사무실로 다급하게 갔더니 다들 산으로 갔다고 해요. 나더러도 얼른 가지 않으면 개죽음을 당할 거라고…. 놀라서 여맹으로 언니를 찾아갔어요. 언니는 갓 태어난 조카에게 젖을 물린 채 앉아 있었는데, 같이 가자고 해도 한사코 애기 때문에 못 가겠다고 해요. 그럼 언니는 여기서 죽어라, 나는 간다. 모질게 말해놓고 길을 나섰어요. 아버지와 오빠들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제….”

    흰 블라우스와 몸뻬바지, 배낭 하나 걸머지고 산청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추석을 앞둔 8월 열사흘이었다.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밤에는 대낮처럼 환한 달이 떴다. 피곤하면 그냥 길가에 쓰러져 잤다.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여고 시절 삼천포로 놀러온 친구들과 함께. 한 가운데가 고계연.

    “다리가 아픈 줄도 몰라. 밤에 잠깐 눈 붙이는 거 빼고는 사흘째 걷기만 했제. 자꾸 콧물이 흘러. 닦아보니 피야. 대열에서 떨어지면 죽는 거니까 피가 나든 말든 그냥 걷는 거야.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총을 쏘아대고, 부상병은 길가에 드러누워 있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지. 그런데 누가 ‘계연아’ 하고 불러서 돌아보니 큰오빠 친구야. ‘길에 떨어진 그게 니 피드나’하더니 길가에 누우라 카더라고. 수건을 물에 적셔 머리에 얹어주고 뒤통수를 쳐서 지혈을 해줬어. 그래놓고는 어깨를 한번 툭 치더니 제 갈길 가데…. 그 오빠도 나중 지리산에서 죽었다네요.”

    그는 더 이상 부잣집 막내딸이 아니었다. 남원으로 가다 국군이 있으면 돌아오고, 산청으로 가려다 또 포기하고…. 대열은 가을 내내 우왕좌왕했다. 남원, 운봉, 인월, 함양 사이를 넘나들다 함양군 마천마을에서 겨울을 났다. 이 마을로 들어간 피난민은 대략 100여명. 시간이 나면 노래를 부르고 오락하고 노어(露語)공부도 하고 학습이나 회의도 했다. 이듬에 봄에는 아지트를 지리산으로 옮겼다. 대열은 처음보다 훨씬 조직화되고 가지런해졌다.

    아버지와 오빠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싸리나무로 집 짓는 법을 배우고 추울 때 연기 나지 않는 비사리나무로 돌 데우는 법을 배우면서 그는 점점 빨치산이 되어갔다.

    그는 여맹위원장 조복애의 휘하에 있었다. 산청의 천석꾼집 딸인 조복애는 소련 유학을 마친 인텔리였다. 김지회 부대 소속 구빨치였던 김필호와 다람쥐같이 심부름을 잘하던 김상전은 모두 총명하고 의지가 강한 여성들이었다. 그가 맡은 직책은 기술서기. 공문서를 작성하고 문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노어단어 외우고 사상학습 하고 바느질도 하고…. 날마다 바빠. 걸핏하면 모여서 오락회를 하고…. 지금 생각하면 잡념을 없애려고 일부러 그랬던 것 같아. 이는 왜 그리도 많은지, 이 잡는 게 더 전쟁이었제. 딴 사람들은 안 그런 모양이지만 난 자랄 때 참말로 이라는 걸 구경도 못해봤거든….

    사령부에서 기록을 맡았으니 보급투쟁은 한 번밖에 안 나갔제. 밤에 조를 짜서 산밑으로 내려가는데 총을 탕탕 쏴싸서 겁이 나서 못 가겠더라고. 그냥 오긴 미안해서 달밤에 밭에 뭔가 시퍼렇게 자라는 게 꼭 시금치같아 배낭이 빵빵하게 뜯어왔제. 동지들이 내 배낭을 열어보더니 ‘고 동무는 삶아 묵을라꼬 담뱃잎을 이리도 많이 따왔노’하며 웃어싸.”

    실수를 해도 산에서는 서로 타박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주리고 헐벗고 이가 들끓어도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분위기여서 마음만은 따듯했다. 토벌대의 공격이 종종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총알은 그를 비켜갔다. 집중사격 속에서도 살아남기를 몇 차례 거듭했다.

    “밤에 산에서 아랫동네 불빛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자꾸 약해지제. 처자식을 떼놓고 올라온 남자들이 그때 많이 내려가. 자수하면 대한민국 품속으로 받아준다는 선무방송이 날마다 나오거든. 여자들은 거기에 잘 안 넘어가제. 나도 자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내려가도 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싶었제.”

    조복애가 어디론가 떠난 뒤 그는 이현상이 사령관으로 있던 남부군으로 소환되어 갔다. 1952년 봄이었다. 구빨치들은 점점 지쳐가고 토벌작전은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졌다. 백선엽 토벌대가 지리산에 뜨면서 산중생활은 더욱 힘겨워졌다. 전투 때마다 동지의 숫자는 쑥쑥 줄고 토벌의 일환으로 비행기로 재귀열(이, 벼룩, 진드기를 매개로 발병하는 급성 전염병의 한 가지) 병균을 뿌린다는 소문도 돌았다.

    “산에서 낯선 부대를 만나면 늘 물어봤지요. 삼천포에서 올라온 고기룡씨 소식을 모릅니까? 한날은 어디서 본 듯한 사람 하나가 날 가만히 보더니 “아버지와 큰오빠가 돌아가셨네” 하더라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제. 하동 쯤에서 장티푸스 비슷한 병으로 토하고 싸고 하다 돌아가셨다는 거야. 큰오빠는 산 생활을 그렇게 못 견뎌 하셨다고 하고…. 그 병이 바로 재귀열이었어. 그전까지는 난 산 생활이 힘든 줄 몰랐어. 소식을 들은 후론 기운이 쫙 빠져서 뭐든지 힘이 들었어.”

    마침내 그해 겨울 그는 생포되었다. 이미 발은 동상으로 부어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상태였다.

    “까마귀야 울지 마라”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날 국군이 포로를 잔뜩 잡아놓고는 자기 앞에 구덩이를 하나씩 파라고 해. 그 앞에 우리를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는 거야. 그러면 방금 제가 파놓은 구덩이 안으로 툭툭 떨어지네요. 무섭지도 분하지도 않아. 아무 생각이 없었어. 나는 대열 중간쯤 있었제. 빨리 내 차례가 왔으면 싶었지. 발이 아파 우는 일도 더 이상 없겠지 싶고…. 내 앞에 있던 동지들이 모두 구덩이 속으로 처박힐 때쯤 산 아래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어. ‘사격 중지! 생포!’ 그래서 난 구덩이에 안 묻혔제. 안 죽고 또 살아났네요.”

    걸음을 못 걷는 그는 한 노인의 지게에 얹혀 지리산을 내려왔다. 사방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노인의 발걸음이 휘청거릴 때마다 ‘차라리 이대로 저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릴까’ 싶었다. 모든 것이 다 싫었다.

    산에는 까마귀가 까맣게 덮여 있었다. 노인에게 ‘저게 뭐예요’라고 물으니 ‘시체 파먹을라고 온 까마귀 아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산에서 늘 부르던 노래가 있었제. ‘산에 사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지만 혁명정신 살아있다.’ 고작 날짐승의 밥이 되려고 그렇게 힘들게 버텼던가 싶고, 살아서 이 일을 증언해야 된다 싶고,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 싶고…. 뛰어내릴 생각을 그만 거뒀지. 까마귀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카이.”

    그렇게 포로가 되었다. 수용소를 전전했다. 남원수용소에 있을 때 미8군 펠프라이트 장군이 시찰을 나왔다가 고계연을 지목해 왜 전향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제까지 서로 총을 겨누다 지금 전향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포로수용소 생활은 학대의 연속이었다. 산에서는 신뢰와 희망이 있었지만, 땅에서는 모욕과 수모뿐이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전향은 불가능했다.

    일단 수용소에 들어온 포로는 협정에 의해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재판을 해야 했다. 광주도청 앞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저 뒤로 어머니 모습이 보였어요. 늘 그랬던 것처럼 한복을 얌전하게 입고 오셨지. 그날, 하얀 모시옷을 입고 울어쌓는 어머니 모습이 어째 두고두고 안 잊혀지노?”

    어머니와 올케들이 갖은 방법으로 손을 썼던 모양이었다. 그는 징역 3년을 언도 받았다. 형량이 너무 작아 그는 깜짝 놀랐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육군본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또 사람들을 모아 구명운동을 벌인 어머니의 노력으로 그는 50여일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행운은 늘 그의 편이었다.

    “대한민국의 따뜻한 품에 안긴 거지. 하도 따뜻해서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내가 늘 농담을 하지. 돌아온 집에는 남자가 하나도 없데요. 그 잘났던 아버지와 세 오빠들과 남동생까지 모조리! 할머니, 어머니, 올케들과 언니, 그리고 고계연. 여자들만 소복하게 남았더라고. 전쟁 전에 점쟁이가 우리집을 지나가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예언이 맞은 거지. 살림은 물론 거덜나버렸지. 부잣집 딸들로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올케들을 대신해 조카들을 내가 맡아야 한다 싶었네요. 오빠들은 없어도 다행히 자식만은 두엇씩 떨구어놓고 갔거든.”

    다시 삶은 시작되고

    다시 삶이 시작됐다. 별의별 일에 다 뛰어들었다.

    “나는 살고재비야. 무슨 일이든 다 잘해. 가만 보면 아버지의 사업 수완을 내가 물려받은 것 같애. 내가 부잣집 딸 노릇만 했다면 바보가 됐을 텐데, 산 생활이 나를 야물게 만들어놓았다니까. 여자라고 해서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고, 또 운명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오빠들이 남긴 조카들을 거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강하게 담금질했다. 광주 호남여객에도 취직하고, 교통관제협회에도 취직하고, 편물 일을 배워 일본 디자인을 본떠 옷을 만들어 팔고, 한때는 약국도 운영했다.

    그러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여자 빨치산에게 세상이 관대할 리 없었다. 경찰은 따라다니며 감시했고 자리잡을 만하면 도망쳐야 할 일이 생겼다. 지하 조직운동의 꿈틀거림이 있을 때마다 여러 군데서 선을 대왔다. 아무런 관련이 없다해도 곧이 들어주지 않았다. 철창 속은 아니었지만 쫓기는 생활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다.

    “이사를 서른여덟 번 했어요. 이 집이 마흔 번째 집인데 이제 쪼매 안정되는 거 같아요. 환갑이 넘으니까 비로소 발자국이 제대로 떼어지는 것 같드만요. 애들을 데리고 얼마나 돌아댕겼는지 그 말을 어찌 다 하겠소. 그래도 애들 기 죽이지 않으려고 초등학교는 다 사례지오(명문사립학교)에 넣었지요.

    어려서 살던 가락이 있어서 암만 없이 살아도 양단이불을 덮었지요. 그러자니 살기가 더 힘이 들 수밖에. 방학만 되면 아예 집을 비워버리고 온 식구가 천막을 가지고 강가나 바다로 나갔어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싶으면 얼마나 맘이 편한지. 애들 아버지하고 같이 낚시를 하고 애들은 물가에서 놀고…. 그때가 참말 제일 좋았네요.”

    아참, 그의 결혼에 대해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고계연은 형무소를 나와 동상으로 망가진 발을 수술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통증은 그만두고 악취 때문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지리산에서 함께 지내던 아버지의 동무라는 구빨치 한 사람이 문병을 왔다. 그를 따라 낯선 젊은이가 왔는데, 고계연에 대한 풍문을 익히 들었던 모양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딸이 산에서 3년을 버티고 동상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것, 부르주아 집안이 엉망진창이 됐다는 것.

    청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더니 그날부터 날마다 편지를 보내왔다. 잔잔하고 진지한 편지였다. 장흥 출신으로 원래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유치’라는 곳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잡혀왔다는 이야기, 자신의 사상 때문에 가족이 고통을 겪게 돼 가슴 아프다는 이야기, 산에서 내려온 이후의 심경들을 자세하게 적었다. 격조 있고 시적인 편지였다. 동병상련의 고통이 담겨있었기 때문일까, 병실에 누운 그에게 편지는 큰 위안이 되었다.

    그 무렵 경찰은 걸핏하면 좌익 일제소탕을 벌였다. 아무런 혐의가 없어도 잡히면 다시 감옥행이었다. 우선 피하는 게 상수였다. 퇴원 후 호남여객에 다니던 고계연은 일제소탕령이 내리자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있던 그 청년, 김봉철에게 피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도망치기에는 아직 발이 온전치 않았던 것이다.

    김봉철은 고계연을 밤새 업고 걸었다. 덕분에 여주까지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당시 이화여대에 다니던 단짝 친구는 여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요주의인물’인 고계연을 따뜻하게 맞아줬다. 친구 어머니는 한복 한 벌까지 장만해줬다.

    “세상은 다 남이 도와줘서 살아가는 거제요. 눈물 한번 훔쳐주고 콧물 한번 닦아준 게 다 나중에 저한테로 그대로 돌아오네요. 남에게 베풀면서 살지 않으면 그건 사는 게 아니네요.”

    소학교 교사 출신 빨치산과 결혼

    그 날 도피를 도와준 김봉철과는 연락이 끊겼다. 나중에야 그 일로 3년 옥살이를 치른 것을 알게 됐다. 출옥 후 둘은 다시 만났다. 김봉철은 광주에서 인쇄소를 차렸다며 청혼했다. 망설였다. 어린 조카들을 두고 어떻게 결혼을?

    그러나 어머니가 적극 권했다. 그의 나이 벌써 스물일곱. 결혼을 안 한다면 몰라도 한다면 이 사람과 해야지, 생각했다. 가난한 집안의 아홉 남매 중 장남. 그러나 그게 장애가 되진 않았다. 결혼식은 삼천포 집에서 치렀다. 당시엔 보기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몽땅 망해도 남은 끄트머리가 있어 결혼식만은 성대했다.

    그러나 형제 많은 가난한 집안의 맏며느리 역할은 일생 그의 허리가 휘청거리도록 만들었다. 시동생들까지 한 집에 열 식구가 복작거렸다. 더구나 바늘 떨어지는 소리만 새나가도 이삿짐을 싸야했다. 남편의 인쇄소는 허울뿐이었다. 부부의 전력이 빨치산이니 ‘1급 비밀 취급인가’가 나올 리 없었다. 그게 없으면 관공서 일을 할 수 없고, 관청 일을 하지 못하면 돈이 생기지 않았다.

    곤궁은 필수였다. 그러나 그는 의연하게 버텨냈다. 사회주의자로 쫓기던 그가 양색시의 아이보리 비누, 초이스 커피를 보따리에 담아 팔러 다녔다는 얘기는 코미디 중에서도 상급 코미디이다. 집을 지어 팔기도 했고, 부산의 부자친척이 만드는 이불을 갖다 팔기도 했다. 다른 이불이 백원이면 천원을 받는 고급이불이었다. 사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광주와 부산의 엄청난 생활 수준 차이를 느꼈다. 그러던 어느 해 ‘밍크이불’이란 게 크게 유행했다.

    “그해 겨울 밍크이불 1000개를 팔았어요. 그랬더니 도대체 고계연이 누군지 보러오는 사람도 있데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친화력은 대단했고 사람에게 신뢰를 주었다. 덕분에 세일즈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지리산 빨치산부대의 명랑한 소녀가 땅으로 내려와 유능한 세일즈우먼으로 변신한 것이다. ‘화성이불’이란 상호가 붙은 고급이불 가게를 찾는 고객이 차츰 늘어났다. 이를테면 부르주아를 대상으로 하는 장사였다. 차도 샀다. 고급 자동차로 배달되는 이불이라야 고급상품으로 인정받는다는 상술을 금세 터득한 까닭이었다.

    고계연은 지금 30년째 이불집 할머니로 살고 있다. 해마다 얼마나 많은 이불이 필요한 사람에게 몰래 전해지는지, 그건 아는 사람만 안다. 제 손에 든 게 없으면 주변의 넉넉한 사람들을 독려해 거둬들이는 재주도 남다르다.

    “옷이고 이불이고 집에 쌓아두면 뭐해요. 물난리 만난 사람들, 당장 아쉬운 사람들에게 전해주면 얼마나 요긴하게 쓰이는데. 그리고 그게 돌고 돌아 결국 다 내게로 되돌아올 건데요.”

    이게 그의 철학이다. 그건 온정주의이지 사회주의는 아닌 것 같다. 사회주의 때문에 평생 죄인처럼 쫓겨다니며 살았지만 온정주의는 더욱 넓게 확장됐다. 어려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싫은 내색 없이 그를 도와줬으니까. 인간성이란 아름답다는 것을 매번 뜨겁게 믿게 됐으니까. 자녀들이 어려 젖이 흔할 무렵 아기를 업고 다니는 동네 과일장사나 생선장사들은 그에게 아기를 맡기곤 했다.

    “씻기면 땟국물이 열두 바가지가 나오지. 내 젖이 흔하니 한 통 먹여 재워놓으면 종일 울지도 않아.”

    그가 젖을 선뜻 내어주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둘째를 낳고 한달 만에 그는 경찰서로 붙들려갔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가 이유였다. 젖이 불어 앞섶으로 넘쳐흘렀다.

    “히야, 젖도 언다는 걸 그때 알았지요. 기름기가 있어 얼지 않는 줄 알았는데, 하도 추우니까 젖도 얼더라고. 젖이 얼어서 앞섶이 장판같이 되더구만.”

    곧 풀려났다. 그 이후 넘치는 젖을 얼른 남에게 줬다. 장사하는 아낙들의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고 선생은 독설도 썩 잘한다. “내사 박사는 벅수라 칸다. 도대체 머리 못쓰는 것들이 박사 아이가”라고 하기도 하고, “나는 대한민국 경찰을 먹여 살린 건 좌익이라 생각한다. 정기적으로 몇 푼씩 집어줘야 했거든. 어데 우리만 그랬겠나?”라고 하기도 한다.

    광주 백오푼다리 근처에 있는 고계연 선생 댁에는 어른 키를 넘는 치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거기에 수백 송이의 치자꽃이 피어있다. 치자꽃이 풍기는 향기는 값비싼 향수 대여섯 병을 한꺼번에 엎지른 듯 현란하다. 고 선생은 그 치자나무 앞에 화장대를 옮겨놨다. 그리고 매일 아침 거기서 머리를 빗는다.

    그는 꽃을 말려 압화(押花)를 만들고, 잡은 물고기로 어탁(魚拓)을 한다.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혼자 심심해서 해보는 일이다.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참 아름답다. 이러한 생활 속의 호사가 그에겐 사치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조건이었건만, 그는 지금껏 탁월한 심미안을 저만치 던져두고 인생의 굴절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이제 자식들의 시대가 됐다. 남편은 1남3녀를 남기고 쉰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돈 벌 줄은 몰라도 뜻이 깊고 대화가 잘 통하고 멋을 아는 남자였다. 자식들은 부모의 피를 이어받아 모두 예술가 기질이 농후하다.

    “우리는 참 좋게 살았어요. 그 사람이 가고나니까 진짜로 살기 싫어지데요.”

    바둑을 좋아해 기원에 박혀있는 남편에게 그림을 배우라고 등 떠민 것도 그였다.

    “애들 아빠는 고문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어요. 당신이 죽은 후에도 애들이 볼 수 있게 그림을 그리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림 그리는 중에라도 아픔을 잊으라고….”

    그러나 부부가 진정 즐긴 건 낚시였다. 함께 물을 바라보고 앉아있으면 모든 시름이 잊혀졌다.

    “참 숱하게도 강가에 앉아 밤을 새웠어요. 찌를 보고, 물을 보고, 하늘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아버지, 오빠, 산에서 죽은 사람들이 생각나 미칠 것 같으면 다 싸짊어지고 강으로 낚시를 떠났어요. 나중에는 다른 나라까지 가서 낚시를 했지요.

    내가 지금 일본의 떡밥회사인 마리큐사의 필드스태프예요. 낚시연합회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나가지요. 낚시가 없었다면 나는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렸을지도 몰라요.”

    낚시로 상처 잊는다

    그에게 낚시는 취미가 아니라 생존의 방법이었다. 상처난 마음에 약을 발라주는 것이 바로 낚시였다.

    남편은 늦깎이로 그림을 시작했지만 전남도전에서 최고상을 받고 국전에도 입선했다. 지금 그의 집 곳곳에 남편 김봉철의 먹그림이 걸려있다.

    고 선생의 아들 김성진은 전남대 의대 피부과 교수다. 법대에 진학하려다 부모의 전력을 알게 되고는 며칠을 울다 포기했던 아들이다. 고 선생은 “의사가 되면 어느 세상에서나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며 은근하게 아들에게 의대 진학을 권했다.

    큰딸 연희는 어머니의 ‘화성이불’을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마음이 한없이 어질고 솜씨가 빼어나다. 둘째딸 민정은 이탈리아 최고의 상업화랑 카피소의 전속화가로 세계를 누비며 독특한 동양적 신비와 미를 드러내는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자신이 펴낸 화집 맨 앞장에 ‘내 어머니에게(To my mother)’라고 써넣어 어머니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막내딸 수연은 이탈리아로 언니에게 놀러갔다가 기어이 눌러앉아 복원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지금은 미국 백악관 내 미술품 복원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막내딸이 손주를 낳아 뉴욕에 갔다왔어요. 사위는 영국사람이에요. 박사학위를 세 개나 가진 아주 잘생기고 멋진 녀석이지요.



    내가 뉴욕까지 가서 그냥 올 리 있나요. 자메이카 베이에서 바다낚시를 했네요. 세상에! 생전 잡아본 고기 중 가장 큰 걸 그때 잡았어요. 길이 1m짜리 농어를! 무게가 10kg이나 되는 놈을! 내가 일흔 살 넘도록 살아남아 뉴욕 앞바다에서 이렇게 큰 고기를 잡아올릴 줄, 그때 지리산에 있던 동지들이 짐작이나 했겠어요? 인생은 참 신비해요.”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의 집 식탁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었다. 나는 그걸 얼른 외워왔다. ‘대화에서 피를 얻고 독서에서 삶을 얻어라. 옥을 갈 듯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라.’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