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박동환 연세대 명예교수. 미국 남일리노이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2~2001년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 사이에선 ‘졸업 전 한 번은 도전해볼 만한 넘사벽 강의’라는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칸트 철학으로 시작해 미국 사회철학을 전공했지만 플라톤부터 사르트르까지, 노장사상과 명나라 말의 이탁오까지 동서 철학을 넘나드는 해박함이 그 첫 이유였다. 여기에 카프카의 문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진화생물학,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까지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으로 일종의 ‘지의 향연’을 만끽하게 해줬기 때문. 이는 이번 전집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런 박람강기를 자랑한 지식인 내지 철학자가 이 땅에 어디 한둘이었는가. 그럼에도 ‘한국산 철학의 탄생’이라는 찬사까지 듣는 이가 과연 있었던가.
우리 지성사에서 자랑할 만한 사상가를 떠올려보자. 통일신라시대의 원효,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수운 최제우…. 모두 빼어난 사상가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상이 원류(源流)가 아니라 아류(亞流)라는 한계에 부딪힌다. 아무리 빼어나다 해도 원효는 중국 불교의 아류, 퇴계와 율곡, 다산은 중국 유학의 아류다. 수운의 동학사상은 동서 사상의 융합을 꾀했다는 점에서 독창성과는 거리가 있다. 당시 동아시아에선 동도서기(東道西器), 중체서용(中體西用), 화혼양재(和魂洋才)로 요약되는 동서 사상 융합이 대유행이었다.
20세기 철학가 중에는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박종홍을 떠올린 분도 있겠지만 미국 프래그머티즘과 조선 실학을 뭉뚱그린 사상을 독창적이라 부르기엔 민망하다. 게다가 그의 사상에는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어른거리지 않던가. 그래서 2008년 서울에서 세계철학대회를 준비할 때 한국철학계가 내놓은 대안이 다석 유영모와 씨 함석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기독교 사상에 동아시아 사상을 접목했다는 점에서 수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박동환에 대한 찬사는 결국 원효, 퇴계, 율곡, 다산, 수운, 다석, 씨도 못해낸 것을 그가 성취했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미지의 철학자와 만남
선집이 출간되자마자 출판사(사월의책)에 인터뷰 주선을 의뢰했다. 박 교수의 대학 제자인 안희곤 대표는 반가워하면서도 “일체의 언론 인터뷰를 사양하셨다”며 난색을 표했다. “원래 낯을 많이 가리시는 데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셔서 책에도 사진은 못 싣고 캐리커처로 대신했습니다.” 대외활동을 워낙 안 해서 ‘얼굴 없는 철학자’니 ‘은둔의 철학자’라는 말까지 듣는다 했다.정 그러면 얼굴이라도 뵙고 싶다고 졸랐다. “방법을 모색해보겠다”고 하더니 “4월 초 선생님이 사시는 김포의 음식점에서 철학 전공 제자들과 조촐한 토론회가 열릴 예정인데 거기 참석해 귀동냥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책 읽고 열심히 공부 안 할 거면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χ의 존재론’을 정독하면서 다른 선집은 개론을 파악하는 정도로 훑었다. 약속한 날짜에 참석자들의 사정으로 모임이 무산됐으니 후일을 기약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낙담했지만 책 읽을 시간을 번 셈이라 여겼다.
그의 책은 얼핏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본문은 번호를 붙여가며 짤막한 단락으로 구성돼 있고 내용도 체험적 진리를 압축적으로 전하는 아포리즘 성격이 강하다. 담백한 문장이되 심오한 내공이 느껴졌다. 이는 각주 격으로 본문 뒤에 붙인 풀이말(해설문)과 따온말(인용문)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고전뿐 아니라 현대 언어학 심리학 자연과학 텍스트가 무수히 인용되면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해낸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할 부분이 많았고 궁금한 부분도 많아졌다.
수줍음과 올곧음 교차하는 χ
정확히 2주 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토론회가 열렸다. 기자까지 8명이 참석한 조촐한 저녁 모임이었다. 직접 만나본 박 교수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지닌 작고 깡마른 체구의 노인이었다. 베레모를 눌러써 감춘 벗겨진 머리, 시력 보호를 위해 살짝 색이 들어간 알이 큰 안경, 살짝 기른 구레나룻, 가늘고 긴 손가락. 멀리서 봐도 예민해 보이는 예술가의 풍모다. 하지만 처음 보는 기자의 등장에 살짝 긴장하면서도 반갑게 맞아줬다.저녁식사를 겸한 토론회는 4시간 넘게 진행됐다. 주로 ‘χ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과 답이 오갔다. 살짝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화기애애했다. 박 교수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자신의 저술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과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의 주인공임에도 맨 가장자리에 앉은 채 말하기보다는 듣고자 했다. 자신의 취지에서 크게 벗어난 지점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개별적 해석에 대해선 “해석은 자유”라며 오히려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전체적으론 ‘χ의 존재론’에서 “이 세상은 나에게 거의 언제나 소속하기 어려운 낯선 곳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각기 그 나름의 독선과 일방성을 가지고 나의 학습과 적응을 강요했다”고 토로하던 상처받기 쉬운 영혼의 체취가 느껴졌다. 하지만 χ의 존재론이 그동안 배우고 공부했던 주류철학에 대한 최종 결론이라면서 두 팔로 χ자를 만들어 보일 때는 학자로서 결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전자의 모습에서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하였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는 이탁오의 자조를 고스란히 자신에게 적용하는 선비의 염치를 보았다. 후자의 모습에선 “이 나라에서 철학자라 불릴 만한 분들은 오로지 외래의 언어와 사상의 전통을 모범으로 수행하며 아랫사람들을 다스리거나 길들이는 일에 종사하는 데 그쳤다”고 일갈하는 선승의 면모가 엿보였다.
긴 시간 얼굴을 맞대고 즉문즉답을 펼친 시험을 통과해서일까. “질문 내용을 e메일로 보내주면 성심껏 답해주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저도 50대 초반까지 학회 임원도 맡고 대외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그게 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란 걸 깨닫고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지금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밤부터 아침 시간을 이용해 책 읽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낮에는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자는 통에 사람들을 거의 못 만납니다. 그것 때문에 ‘뱀파이어’니 ‘은둔자’니 하고 놀려대듯 말하는 게 와전됐을 뿐입니다.”
박 동환 철학의 정수는 ‘χ의 존재론’에 담겼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2001년 발표된 ‘안티호모에렉투스’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χ의 존재론’을 태동시킨 일종의 방법론으로서 3표론(三表論)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철학적 천하삼분론-三表論
그에 따르면 세계철학은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뉜다. 굴절어인 인도유럽어권의 사고방식이 녹아 있는 1표의 철학으로서 서양철학과 인도철학, 고립어인 중국어권의 사고방식이 녹아 있는 2표의 철학으로서 동양철학, 그리고 한국어가 포함된 우랄알타이어권의 사고방식이 담긴 미완과 미지의 철학으로서 3표의 철학이다.핵심 기준은 언어다. 언어가 사상의 내용을 규정한다고 봐서다. 독일의 니체와 영국의 러셀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두 사람은 주어(임자말·subject)가 술어(풀이말)를 규정하는, 그래서 주술일치를 요구하는 인도유럽어의 특징에서 주체(subject)와 실체(substance)를 중시하는 서양철학과 인도철학이 탄생했음을 공통으로 지적했다. 니체는 임자말과 풀이말을 일치시키지 않아도 되는 언어권에선 세상을 전혀 다르게 들여다볼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를 동서양의 문명사와 철학사에 투영시키며 새롭게 구성한 것이 삼표론이다. 여기서 표(表)는 고대 중국에서 자연수리와 인문도덕 공통의 척도를 지칭한 용어에서 따왔다. 언어적 척도(표)에 따라 철학의 내용이 다르게 구성됨을 함의한다.
1표의 철학 핵심은 동일화의 논리다. 문장의 서두에 반드시 등장하는 임자말에 나머지 풀이말이 맞춰지듯 진리로 상정된 것에 맞춰 부합하지 않는 것은 버리고 부합하는 것만 택하는 논리다. 여기서 보편주의를 강조하고,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치열한 논쟁의 문화를 낳았다. 박 교수는 이를 ‘동일보존 및 모순배제 법칙에 의한 정체쟁의(正體爭議)의 체계’로 규정한다. 하나의 정의(正)로운 체계를 모색하고 이를 보편질서로 확립하기 위해 시시비비를 투철히 가리는 쟁론 지향의 철학체계를 뜻한다.
반면 2표의 철학의 핵심은 반구(反求)의 논리다. 이는 한자어가 문장의 위치와 문맥에 따라 의미와 품사가 정해지는 원리에 대해 박 교수가 이름 붙인 것이다. 반구는 ‘중용’에 나오는 ‘반구제기신(反求諸其身·문제의 원인을 돌이켜 그 자신에게서 찾는다)’에서 따온 것이다. 반구의 논리는 개체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집체(集體)주의를 형성했고, 사회적 대립을 싸움 없이 조화롭게 해소하려는 부쟁(不爭)의 문화를 낳았다. 박 교수는 이를 ‘반구화해(反求和諧)와 상반상성(相反相成·모순관계가 서로를 완성시켜준다)의한 집체부쟁(集體不爭)의 체계’라 설파한다.
미지와 미완의 철학, ‘3표의 철학’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론을 설파한 것은 당시 최강대국인 위(魏)와 그에 버금가는 오(吳)를 위한 설정이 아니었다. 아직 세워지지도 않았던 촉(蜀)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박동환의 삼표론도 마찬가지다. 철학의 종주라 할 서양철학(1표의 철학)과 그 대안으로 떠오른 동양철학(2표의 철학)을 목표로 삼은 게 아니었다. 미지(未知)와 미완(未完)의 철학인 3표의 철학을 모색하기 위한 포석이었다.그렇다면 3표의 철학의 정체는 뭘까. 가장 쉬운 대답은 1표도 아니고 2표도 아닌 철학이다. 그 둘을 철저히 부정하고 지양하는 철학이다. 이는 박동환 선집의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1권인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1987)이 1표 철학에 대한 회의의 발로라면 2권인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1993)는 2표 철학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그리고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3표의 철학’으로 이름 붙여진 새로운 철학의 모색에 나선 것이다.
박 교수는 “1표와 2표의 철학이 모두 대략 6000년 전쯤 시작된 고대 도시문명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고대 도시문명에선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에 투사되면서 절대 권력자가 탄생한다. 이때 폐쇄된 도시공간에서 이 절대 권력을 합리화하는 한편 사회정치적 모순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두 갈래 사유방식이 탄생했다.
주술관계의 일치를 추구하는 1표는 임자말의 자리에 권력자를 위치시키면서 보편성의 이름으로 모순과 차이를 제거하는 사유방식을 택했다. 주변 단어와 관계망에 의거해 의미와 지위를 획득하는 2표는 대립과 모순을 용인하면서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집체질서의 내면화를 강제하는 사유방식을 택했다.
이런 두 갈래 사유방식은 20세기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1표의 철학은 미지의 것이 기지의 것에 속박되고 종속되는 환원주의에 갇혀버린다. 폐쇄회로 속에서 빙빙 돌기만 한다는 비판이다. 2표의 철학은 개별자가 집단에 의해 억압되고 대세를 추종하는 것이 진리가 돼버린다. 출구가 여럿이지만 무엇을 택하든 제자리로 돌아와버린다는 일갈이다.
3표의 철학을 집어삼킨 χ의 존재론
박 교수는 이런 철학 전통을 “보편의 허구를 선전하는 패권의 철학”이라고 후려친다. 보편의 진리라는 것이 일시적 현상에 불과함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또 중심과 주변, 주류와 비주류를 구별하고 차별 짓는 사유방식을 확대 재생산해내기 때문이다. 이는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한 자크 데리다나 질 들뢰즈와 강하게 공명하는 부분이다.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 대안이 될 3표의 철학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다만 첨가복합어를 쓰는 언어권(한국어를 쓰는 우랄알타이어계 포함)에서 나오리라는 기대가 담겼을 뿐이다.
왜 그럴까. 첨가복합어는 굴절어와 달리 임자말이 생략된다. 또 고립어와 달리 임자말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풀이말이 먼저고 임자말은 나중에 따라붙는 식이다. 이런 언어권의 사유방식에선 주체가 아니라 사태 자체가 중요하다. 인공의 도시성벽 저 너머에서 압도적 힘으로 도래하는 미지의 것(진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도시문명 밖 ‘야생의 사유’에 가깝다.
이런 야생의 사유는 ‘해답의 논리’가 아니라 ‘물음의 논리’에 입각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문명의 사유는 폐쇄적인 도시문명 내부의 문제 해결을 위해 완성된 해답을 추구한다. 동일성의 논리(1표)나 반구의 논리(2표)도 결국 그렇게 해답을 찾는 논리다. 반면 “야생의 사유는 ‘인간의 척도’로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원시적이고 원초적 질문을 던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중심적 철학을 뛰어넘을 것을 주장한 ‘안티호모에렉투스’가 발표되고 15년 만인 올해 ‘χ의 존재론’이 발표됐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가능성으로만 제시됐던 3표의 철학이 χ의 존재론으로 완성됐다고 생각했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체성을 대표하는 임자말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유동성을 대표하는 풀이말들이 사태 판단의 주축을 이루는 계통에 소속하는 사람들에게는, χ의 존재론 또는 그에 따르는 자아 개념이나 세계관을 포용할 수 있는 토대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χ의 존재론’ 141쪽)
“한국말에서 많은 경우에 생략해도 괜찮은 임자말 자리에 상정되어 있는 존재 χ는, 그 자신에게 매겨지는 무한 변이가 가능한 마디들의 조합 곧 풀이말 χ에 의해 묘사된다.”(같은 책 346~347쪽)
하지만 박 교수는 e메일 인터뷰를 통해 “χ의 존재론은 3표의 철학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3표의 세계관에서 χ의 존재론으로 발전하면서 조금씩 ‘언어결정론’으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을 경계할 필요를 감지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3표의 세계관이나 χ의 존재론을 제시하기 위하여 반드시 한국말본이 소속하는 언어계통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미지의 존재 χ
3표의 철학은 χ의 존재론으로 비약하는 데 필요한 발판이나 사다리 정도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χ의 존재론은 ‘인간의 척도’에 맞춰진 일상언어로서 제2언어가 아니라 ‘우주의 척도’를 따르는 제1언어에 입각한 철학으로 탄생하게 된다. 3표의 철학이 제2언어에 입각한 철학이라면 χ의 존재론은 제1언어에 입각한 철학으로 차별화되는 것이다.장자는 말했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잊으라(得魚忘筌 得兎忘蹄). 이제 3표론은 잊고 χ의 존재론에만 집중해보자. 먼저 χ는 무엇을 말하는가.
서양철학사를 배울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아니다. 탈레스나 파르메니데스도 아니다. 고르기아스다. 서양철학사의 불멸의 화두가 된 그의 3불가론 때문이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존재한다 해도 알 수가 없다. 셋째, 안다 해도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다. 이는 각각 존재론(형이상학), 인식론, 언어론으로 진화해가는 서양철학사의 흐름과도 맞물려 있다.
χ는 이 모두를 아우르는 미지의 존재다. 분명 존재하지만 알 수가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무엇. 그래서 χ는 철학의 선각들이 말한 그 모두가 될 수도 있다. 노자의 도(道),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하지만 이들 개념이 “미지의 영토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면 박동환의 χ는 “현상계 또는 현재라는 삶과 운명의 격전지대로 뛰어나와 종횡무진으로 움직인다”는 차별성을 지닌다. 그래서 박동환의 χ는 그런 자의적, 상대적 이름이나 개념으로 수렴되거나 환원되기를 거부한다.
이렇게 말하면 노자가 말한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可道)를 또 다른 기호로 담아낸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χ의 존재론은 χ라는 하나의 기호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기호와 연관관계를 통해 수십억 년의 우주적 시간과 공간의 원리를 담아낸다. 바로 ¬χ와 Χ()다.
χ는 박동환의 표현에 따르면 “영원의 흐름을 타고 항상 현재 안에 침묵으로써 움직이는 기억으로 들어와 있고, 다시 불확실한 미래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내재하며, 동시에 자신을 지양하며 초월하는 운명의 메신저”다. 이를 인간의 척도로 이해하기 쉽게 기자가 바꿔 말한다면 “130억 년 전 우주가 탄생할 때 생긴 원자를 통해, 또 수백만 년에 걸쳐 이어져온 유전정보가 기록된 DNA를 통해 내 몸에 새겨져 있지만 내 자신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자 미래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발현하게 될지도 모를 그 무엇”이다.
상상의 ¬χ, 초월의 Χ()
Χ()는 Χ(χ&¬χ)를 생략한 표현이다. 여기서 Χ는 개체적 독립변수 χ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저항 불가능한 힘으로 χ를 강제할 수 있는 초월적 독립변수를 뜻한다. 따라서 ¬χ가 χ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내재적 몸부림이라면 Χ()는 χ와 ¬χ의 외부에서 쳐들어와 χ와 ¬χ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초월적 작용을 뜻한다. 한계격파 또는 한계초월이라고 표현된다. Χ()의 극명한 예로는 화산폭발과 지진, 소행성 충돌에 의한 대멸종, 돌연변이, 대제국의 침공이 있다. 누구도 면할 수 없는 죽음도 이에 속한다.
χ의 존재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개체생명의 일생을 요약하는 관계식으로 표출된다. 영원의 한 단위 기억체계인 χ로 시작해서 그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상상의 파격으로서 ¬χ를 모색하다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초월적 힘 Χ()에 압도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는 생명체가 출현해 모든 가능한 파격의 변이를 연출하다가 멸종에 이르는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 빅뱅이라는 격파의 경험 Χ()에서 그 영원의 기억의 일단을 간직한 χ가 탄생하고, 상상의 파격 ¬χ로 다채로운 전개가 펼쳐지는 우주론에도 적용가능하다. 도가도상가도(道可道常可道)의 경지가 펼쳐지는 셈이다.
저항의 χ, 예수의 χ
철학은 크게 존재론-인식론-실천론의 3가지 범주로 구별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χ의 존재론에는 존재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이 교차한다. 그렇다면 실천론은 어디에 있을까. χ의 존재론에서 χ가 미미해 보이는 것들, 가에로 밀려난 것들을 통해 출현한다는 점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미미하게 보이는 것들, 무시해도 괜찮을 만한 것들, 아니면 버거워서 외면해버린 것들, 그래서 가에로 밀려난 미지의 것들이 불변의 토대라는 실체 또는 주체라는 자아의 안과 밖에서 뜻밖의 반전과 파국의 계기를 일으키며 운명과 우주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든 χ를 포획해 통제가능하고 예측가능하게 만들고자하는 기성 철학의 시도가 패권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우주적 척도를 따르는 미지의 것(the unknown)을 사냥해 인간적 척도를 따르는 기지의 것(the known)으로 길들이려다보니 어느 순간 반전과 파국이 도래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그 누구도 영원으로부터 비롯하는 유일 고유한 존재 χ를 임의로 정의하거나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원리가 도출된다. 박 교수는 이를 ‘삼켜도 삼키는 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로 풀어낸다. 어린 살모사가 제 몸 크기에 버금가는 지네를 삼켰다가 그 지네에 의해 내장이 모두 먹히면서 오히려 먹이가 되어버리듯 χ가 다른 χ를 규정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이 큰 화를 부른다는 설명이다.
이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과 극적으로 공명한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게 유희와 파격을 즐기는 미지의 흰 고래 모비 딕을 사냥하려다 결국 모비 딕에 의해 격파되고 마는 피쿼드 호의 비극적 운명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목도하고 증언하는 이가 ‘신으로부터 버려져 가에로 밀려난 자’를 뜻하는 이슈마엘이라는 점도.
χ라는 기호에 담긴 부정과 저항의 메시지는 반평생에 걸쳐 공부한 기성 철학이란 것이 결국 패권의 철학에 불과하더라는 박 교수의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사람들은 두 손을 χ모양으로 교차해서 ‘아니다’ 또는 ‘거부’의 의사를 나타내기도 한다. χ의 모양은 서로 부정하는 두 가지가 한 점에서 만나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실현되어 있는 어떤 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을 χ의 모양으로써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에 χ에는 한 가지 중요한 함의가 하나 더 숨어 있다. 기독교적 통찰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다. 박 교수는 책에서 그 어떤 철학서보다도 기독교 성경의 ‘전도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한계격파 또는 한계초월의 개념을 설명할 때 카를 바르트의 신학을 즐겨 인용한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세상에서 말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온건한 예수주의자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크리스마스를 요즘도 ‘X mas’로 표기하듯 알파벳 X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 기호이기도 하다.
권재현의 심중일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