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을 지정한 미국. 3000년 된 나무들이 무성한 대자연의 보고(寶庫) 캘리포니아 요세미티가 그 첫 번째 영광을 안았다. 국립공원을 향한 미국인의 무한한 애정과 신뢰는 지금도 여전하다. 자연에 대한 낭만적 동경 뒤에 사회·경제공학 이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미국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머세드 강’ 양안에 펼쳐져 있는 요세미티 공원.
이틀 전 그는 골치 아픈 정무를 잠시 접어두고 나흘 예정으로 요세미티를 찾았다. 텐트도 치지 않고 방수포만으로 하늘을 가린 채 이틀 밤을 야영했다. 동행자인 환경운동가이자 시에라 클럽의 창설자요 저명한 자연문학 작가인 존 뮈어(John Muir) 또한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6시15분, 두 사람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해돋이를 보기 위해 글레이셔 포인트로 올라갔다.
‘벼랑 위에 걸린 바위(Overhanging Rock)’에 오르자 흰 눈이 뒤덮여 더욱 눈부신 요세미티 계곡의 장엄한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눈 덮인 산정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계곡 밑바닥으로부터 자그마치 1000m 높이의 벼랑 쪽에 고개를 내민 바위에 서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루스벨트는 카키색 보이스카우트 복장에 해어진 군모를 쓰고 목에는 손수건을 두른 모습이다. 그의 옷 단춧구멍에는 뮈어가 골라준 세다 나뭇가지가 꽂혀 있다. 안내를 맡은 뮈어는 예의상 평소의 낡은 작업복 대신 양복을 걸치고 중절모를 썼다. 그의 옷깃에도 역시 푸른 나뭇가지가 장식 핀처럼 꽂혀 있다. 미국 환경운동사나 국립공원 안내책자의 한 페이지를 으레 장식하곤 하는 이 유명한 사진은 이렇게 찍혀졌다.
눈보라 속의 야영
미국 국립공원의 지정과 관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자연환경 관리에 대한 미국 사회의 상반된 의견의 역사를 예감케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역사적이다. 루스벨트의 요세미티 방문 계획이 알려지자 뉴욕에서 발간되던 유력한 월간지 ‘센추리’의 편집자인 로버트 존슨(Robert Underwood Johnson)은 대통령에게 안내역으로 뮈어를 추천했다.
1890년 요세미티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한 뮈어의 선도적 노력과 그의 자연 에세이에 관해 잘 알고 있던 루스벨트는 이에 곧장 동의하고 뮈어에게 동행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뮈어는 이때 러시아, 만주, 일본의 숲을 돌아보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는 계획된 일정 때문에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러나 날로 훼손되는 서부의 산과 숲을 보호하는 데 연방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대통령에게 요청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 일정을 미루고 동행 요청을 수락했다.
요세미티 남쪽 입구의 작은 도시 레이먼드에서부터 마리포사의 세쿼이아 숲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함께 루스벨트의 옆자리에 동석한 뮈어는 아직 주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요세미티 계곡의 심각한 훼손 실상을 설명하고 요세미티 전체를 연방정부가 관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마리포사의 세쿼이아 숲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그리즐리 자이언트(Grizzly Giant) 세쿼이아 나무 근처에서 함께 야영하며 서부의 숲과 강, 그리고 그 보존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며칠간의 친교로 두 사람은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사냥과 낚시, 등산을 즐기던 루스벨트는 텐트도 없이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눈보라 속에서 야영한 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두고두고 술회하곤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06년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세미티 계곡을 연방정부로 다시 이관하는 법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하면서 요세미티는 명실상부한 국립공원으로 거듭났다. 국유림 관리에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적극적이었던 루스벨트는 1901년부터 8년의 재임 기간에 5개의 국립공원과 51개의 야생조류 피난처를 지정하고, 총 1억5000만에이커에 이르는 숲을 보존지역으로 설정했다.
뮈어가 루스벨트 대통령(오른쪽)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둘러보고 있다.
국립공원과 민주주의
공원을 위해 일하는 삼림감시인(ranger)도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다. 절실한 필요가 반드시 호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무튼 공원과 그것의 효율적 관리가 미국 사회의 중요한 관심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2005년 현재 국립공원 지역은 모두 388개다. 델라웨어 주를 제외한 미국의 전 주는 물론 푸에르토리코, 미국령(領) 사모아, 괌, 버진아일랜드 등 4개 영지에도 걸쳐 있다. 좀더 세분하면 전쟁사적지 24개, 역사유적지 120개, 호수 연안 4개, 기념관 28개, 기념탑 78개, 국립공원 58개, 공원로 4개, 보존 및 보호지 20개, 레크리에이션 지역 18개, 강과 수로 지역 15개, 트레일 3개, 해안 지역 10개, 기타 지역 11개다.
이들 관리지역의 총 면적은 약 8400만 에이커에 이르는데, 이 중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58개의 국립공원으로, 전체의 62%에 해당하는 5200만에이커다. 이 방대한 지역을 관리하는 직원만 2만명이고, 이밖에 12만5000명의 자원봉사자가 이들을 돕는다.
2005년 통계에 의하면, 국립공원 관리지역의 연간 방문자는 약 4억2300만명인데, 이 중 레크리에이션 목적의 방문자는 2억7300만명, 그밖의 다른 목적의 방문자는 1억5000만명이다. 그 가운데서도 요세미티, 옐로스톤, 그랜드캐니언을 비롯한 국립공원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지역이다. 방문 인원 수만 보더라도 국립공원을 비롯한 미국의 공공 사적지가 미국인의 일상적 삶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국립공원관리국은 수준 높은 서비스와 효율적인 관리로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지만, 이런 관리체제를 정립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 원래 국립공원 지역은 그 특성에 따라 관리 부처가 서로 달랐다. 예컨대 전쟁 사적지는 국방부, 숲과 해안 보존지역은 농무무, 공원은 내무부 관할이었다. 업무의 중첩과 비효율성은 늘 문제였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1916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때 국립공원법이 제정됐고, 이 법에 입각해 모든 국립공원 지역을 통괄하는 국립공원관리국이 연방정부 기구로 내무부 안에 설치됐다. 국립공원관리국은 기구를 정비해 나가면서 더 많은 지역을 공원으로 지정하고, 그렇게 지정된 공원의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립공원관리국은 가령 연방 삼림청(National Forest Service) 등과 같이 이해관계가 겹치는 기관과 끊임없이 충돌했고, 그때마다 이들 기관들과 업무 영역을 조정하고 이해를 구해야 했다.
국립공원의 사회적 기능과 의의는 ‘공원이나 기념비 혹은 보존지역의 본래 목적, 곧 자연 경관과 그 안의 자연적 및 역사적 대상은 물론 야생동식물을 보존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들을 즐길 수 있도록 하되, 후세대 사람들도 향유할 수 있도록 훼손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이들의 활용을 증진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천명한 설치령에서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국립공원은 귀족이나 왕족과 같은 소수의 특권층만이 즐길 수 있는 유럽의 왕립 공유지 개념과 달리, 현재는 물론 후세의 국민 모두가 향유할 공간이라는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지정된 것이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월리스 스테그너(Wallace Stegner)는 이런 시각에서 미국의 국립공원 창설은 미국 사회가 창안해낸 최상의 생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국립공원 관리지역에는 역사적 명소와 사적지, 각종 기념관과 기념탑, 자연보호지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핵심은 물론 58개의 국립공원이다. 미국 국립공원의 역사는 공식적으로는 1872년 옐로스톤 국립공원 지정과 더불어 시작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나라의 보석’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존 뮈어.
이로써 미국 최초의 공원이라고 할 요세미티 공원이 탄생했는데, 그 관리 감독이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소관이라는 점에서 ‘국립’공원은 아니었지만, 그 목적과 정신에서는 공원의 전범이었다.
미국이 옐로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이를 본받아 국립공원을 만들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는 1879년 시드니 남부에 왕립공원을, 캐나다는 1885년 캘거리 서쪽의 로키산맥 지역에 반프 국립공원을, 뉴질랜드는 1887년 통가리로 화산 일대를 통가리로 국립공원으로 각각 지정했다. 한국도 1967년에 지리산을 시작으로 국립공원 지정에 나섰다.
이렇듯 오늘날 세계 100여 개 국가에 약 1200개의 국립공원이 지정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대부분이 결국 미국의 국립공원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니 미국은 국립공원의 종주국인 셈이다. 미국 사회가 국립공원을 ‘나라의 보석(crown jewels of America)’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국립공원이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창출된 소비문화의 부산물임은 특기할 만하다. 소비문화는 기술공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상품의 대량생산이 이뤄지고 이민의 증가와 노동력의 도시집중, 그리고 교통의 발달로 상품의 대량 소비가 가능해지면서 태동했다.
1869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대륙횡단철도의 완공은 그 중요한 전기였다. 철도교통망이 정비되면서 미국 사회는 이제 단일한 생활문화권을 이루며 하나의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동부에서 제조된 공산품은 철도편으로 서부로 신속히 배달됐고 서부의 농산물과 철광석을 비롯한 산업 원자재 또한 적기에 동부의 공장으로 보내졌다.
철도는 지방을 연결하는 수송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촉매제 기능도 했다. 그리하여 미시시피 너머 서부 지역은 원자재의 공급창으로 혹은 잉여자본의 투자처로 각광을 받으면서 동부 사람들을 유혹했다.
급속히 보급되던 사진술 또한 서부에 대한 관심을 부채질했다. 서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담은 사진 이미지는 서부에 대한 흥미를 한층 자극했고, 이러한 관광 욕구와 철도 교통망의 확충이 맞아떨어지면서 서부 관광 붐을 일으켰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서부 관광 열기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누구든지 관광에 나서는 국민관광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징후였다.
1871년, 70세를 눈앞에 둔 에머슨이 노구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요세미티와 레이크 타호 지역을 둘러보는 여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소비문화를 창출한 이 같은 제반 여건이 성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관이 아름다운 명승지의 보존과 유지의 필요성은 이런 정황 속에서 자연스레 대두한 것이다.
자연 경관은 사람들의 잦은 발길과 무분별한 상업적 이용으로 훼손되거나 파괴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밀려드는 관광객의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그것의 보존과 관리가 절실하게 요청됐다. 이처럼 미국 국립공원의 태동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기는 심미적 동기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자연에 대한 낭만적 동경 못지않게 사회적, 경제적, 기술공학적 메커니즘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자연 보존, 그 이상의 과업
자연 보존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1872년 옐로스톤 국립공원 창설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원주민 인디언의 풍물을 즐겨 그린 조지 캐틀린(George Catlin)은 1830년대에 이미 인디언의 생활 습속이 서려 있는 지역의 경관을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월든’의 작가 소로(Henry David Thoreau) 또한 1850년대에 뉴잉글랜드의 도시마다 적어도 500 내지 1000에이커의 숲을 보존지역으로 지정하자고 호소한 바 있다.
이런 주장들에도 기술 문명의 급속한 침투로 인한 자연 훼손에 대한 불안감이 어른거린다.
캘리포니아 마티네즈에 있는 존 뮈어의 집.
미국에서 공부하던 10여 년 전 어느 초여름, 서부의 3대 국립공원을 모두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식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요세미티를 구경하고, 북동쪽으로 네바다와 유타를 지나 그랜드 테튼 국립공원을 거쳐 옐로스톤을 둘러보고, 이어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브라이스 캐니언, 자이언 캐니언을 거쳐 그랜드 캐니언을 보았다.
물론 나는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거기에서 보았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었다. 자연의 나라라는 제퍼슨의 표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쁜 시간을 쪼개 떠난 일정이어서 번쇄한 일상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아쉬움 때문에 2006년 여름방학을 보스턴에서 보내고 돌아오면서 일부러 샌프란시스코를 들러오는 일정을 잡았다. 여유 없는 일정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여름철이면 흔한 패키지 투어에 끼어서라도 요세미티에 다시 가보고 싶었고, 아울러 버클리의 북쪽 마티네즈에 있는 요세미티의 수호자 존 뮈어의 생가 터를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심으로는 그동안 틈틈이 읽어온 뮈어의 에세이를 통해 얻은 요세미티에 관한 인상이 짧은 일정의 아쉬움을 상쇄해 주길 기대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세미티는 200마일, 차로 3시간 반 거리다. 나는 요세미티를 거쳐 인근의 세쿼이아 숲도 들러오는 당일 관광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아침 7시에 호텔 앞에서 기다리니 미니버스가 왔다. 동부 볼티모어에서 온 중년 부부, 샌프란시스코에 학회 참석차 왔다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소재 농업연구소의 연구원, 과테말라 출신의 젊은 여자 둘, 그리고 어학연수를 왔다는 일본 여학생과 그녀의 룸메이트인 스위스 여학생. 일행 여덟 명 중 여섯이 국적이 서로 다른, 그야말로 국제 관광단이었다. 1984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요세미티는 이제 ‘세계의 공원’이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베이 브리지를 건너 오클랜드를 경유해서 산 호아킨 계곡을 관통하는 120번 도로를 탔다. 도로변에 과수원이 많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 지역이 미국 내에서 아몬드와 살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고, 특히 아몬드는 캘리포니아 농산품 수출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는 설명이다.
그로브랜드 근처의 슈퍼마켓에 잠시 들러 점심거리를 산 후 얼마 달리지 않아서 쭉 뻗은 소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한 산들이 펼쳐지고 이렇게 산길을 얼마쯤 달리니 이내 공원 입구다. 8월 초순의 휴가철이라 혼잡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다행히 교통 체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근래 요세미티의 연간 방문객은 350만명 안팎이다. 약 400만이 찾은 1996년을 정점으로 방문객 수가 약간씩 줄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여름에 방문하니 관광객 수가 적지 않을 터인데도 그다지 혼잡하지 않은 것은 공원 관리체제의 꾸준한 개선 덕분이다. 지금보다 방문객이 적었던 1960년대에는 효율적 관리 활동의 부재로 공원은 히피들의 고성방가, 무질서, 쓰레기더미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캠프장과 도로를 포함해 공원 전체가 방문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요세미티 시(市)’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니 그 복작거림이 짐작된다.
보전과 보존의 접점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공원관리국은 큰 주차장 두 곳을 폐쇄하고, 숙박시설을 줄이고, 캠핑을 통제하는 한편 셔틀버스를 도입했다. 셔틀버스도 배기가스 오염을 줄이기 위해 하이브리드 카를 도입했다. 그 결과 공원 내에서는 원거리를 이동할 때 셔틀을 이용하고 단거리는 걸어다니는 탐방 방식이 정착되면서 한결 쾌적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투올로미 숲에 있는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 중 하나.
소비문화의 태동과 더불어 관광과 여행이 일상적 삶의 일부가 되면서 국립공원이 그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부상한 것이다. 자연 공원은 명상과 심미적 즐거움의 장소여야 한다는 생각은 1864년 요세미티 공원 창설과 함께 초대 공원관리위원장을 지낸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가 1865년에 낸 ‘요세미티 계곡 보고서’에서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설계자로 이름높았던 옴스테드는 공원은 무엇보다 현대 대중사회에서 맛보기 어려운 정신적 성취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시각에서 자동차처럼 신체적 노력을 수반하지 않는 동력에 의한 자연 경관 접근은 최소화하고, 공원 내의 숙박도 검소하고 소박한 것으로 해서 공원 방문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어야 하며, 공원 출입도 그런 의도를 갖는 사람에게만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생태환경 보존 또한 국립공원이 고려해야 할 또 다른 과제가 되었다. 도시 환경이 열악해질수록 생태환경 보존이나 자연의 심미적 가치 수호가 공원의 중요 기능으로 강조되지만, 여가 기회 제공이라는 목적 역시 다른 곳에서는 충족되기 쉽지 않기에 그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칫 상반될 수 있는 목적들 자체가 국립공원 관리가 안고 있는 근원적 문제점이다. 기실 보존과 이용이라는 목표에는 환경의 세기로 일컬어지는 21세기에 가장 첨예한 이념적 갈등을 야기할 소지가 내포되어 있다.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지를 고려하다보면 자연은 인간적 효용성과 상관없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 인간이 배제된 자연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 환경 문제는 지속적인 기술 개발로 극복할 수 있다는 기술개량주의, 그리고 그런 기술만능주의가 곧 생태환경 악화의 근원이라는 근본생태론의 대립 등이 곧바로 불거질 수 있다.
자연을 보는 이중적 시선
인위적 관리를 배제하고 자연의 고유한 상태를 간직하자는 보전주의(preservation)와 생태계의 효율적 관리를 주장하는 보존주의(conservation)는 이미 19세기말 국립공원 운동과 동시에 태동한 환경운동 초창기부터 서로 대립했다. 물론 1890년 요세미티의 국립공원 지정이나 1906년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관리하에 있던 요세미티 계곡의 국립공원 재편입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선 이런 대립이 관찰되지 않았다. 자연의 무분별한 남용과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 데는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환경운동은 ‘보전주의’와 ‘보존주의’로 이내 양분됐다.
양자의 견해 차이가 첨예하게 노정된 계기는 요세미티 공원 북쪽에 있는 헤츠헤치 계곡(Hetch Hetchy Valley) 댐 건설이었다. 20세기 초, 인구가 늘면서 샌프란시스코 시의 식수 부족이 문제가 되자 이 계곡에 댐을 건설해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하자는 방안이 제시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치적 후원을 받던 삼림청장 핀쇼(Gifford Pinchot)를 중심으로 한 보존주의자들은 공공복리를 위한 자원의 효율적 관리라는 공리주의적 시각에서 이에 찬성한 반면, 뮈어를 중심으로 한 시에라 클럽은 반대했다. 대립이 격렬해지고 장기화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고, 보존주의자들이 여론몰이에 성공해 1923년 결국 댐이 건설됨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됐다. 이 일은 오늘날까지도 보전과 개발의 갈등이 재연될 때마다 참고 사례로 인용되고 있다.
핀쇼와 루스벨트로 대변되는 보존주의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최대 다수의 사람을 위해 환경의 유용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이었다. 요컨대 자연의 유용성과 효율성이 이들의 일차적 관심사였다. 특기할 것은 이들은 환경 문제를 결국 부유층의 낭비와 과소비, 빈부의 격차, 노동 문제와 연계된 혁신주의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뮈어는 헤츠헤치 계곡과 같은 천혜의 경관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위해서 보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보전주의자들은 그 나름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을 관리하고 ‘문명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장엄한 자연 경관 또한 훼손 없이 후손에게 물려 줘야 할 소중한 유산이라는 것이 이들의 논지였다.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은 자연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지녀왔다. 한편으로 야생의 자연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아내는 외경감과 숭엄미 또한 선양되어왔다. 혹자에게 공원은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시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비쳤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영혼을 정화하고 신과 대면할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였다.
자연 스스로 만든 공원
이런 미국적 특수성 또한 공원 관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도 잠복해 있다.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기실현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 복리가 우선이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국립공원의 운영과 관리는 이처럼 단순한 정책이나 행정 지침의 차원을 넘어서서 여러 상반된 사회적 이념과 가치관 및 국가의 정체성까지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다. 미국 사회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국립공원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일행은 방문자 안내 센터에서 하차하여 엘 캐피탄, 세 형제 바위, 보초 바위, 요세미티 폭포 등 널리 알려진 이곳의 랜드마크 경관들을 완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각자 자유롭게 점심을 먹고 다시 모이기로 했다. 나는 트레일을 따라 머세드 강가로 나갔다. 강물은 맑고 잔잔했다. 고무 보트를 타고 한가로이 노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수량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물의 수위가 일정량 이상으로 불어나면 보트 놀이가 일절 금지된다고 안내서에는 적혀 있다.
강물이 조용히 흘러서 이곳이 심산유곡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이렇게 조용히 흐르는 강이 실상은 동편 네바다 폭포에서 181m, 이어 버날 폭포에서 97m 아래로 요란한 굉음을 내며 떨어진 폭포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요세미티 계곡은 길이 11km, 폭 2.5km의 평탄한 분지이다. 분지라고 하나 평균 해발 고도는 약 1300m이다.
첩첩산간 능선 1500m 아래의 골짜기에 숨은 듯이 펼쳐져 있으니 초창기의 백인들은 근처에 와서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1864년 옴스테드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야생화가 피어난 널따란 계곡을 처음 보고서 다른 무엇보다도 공원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분지의 양쪽에 잿빛 화강암 절벽과 각양각색의 높은 돔 혹은 첨탑 모양의 산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이다.
존 뮈어는 이 빼어난 경관에 대해 신이 산간 맨션에 정선된 보물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달리 말해 요세미티 계곡은 옴스테드의 첫인상 그대로, 자연이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만든 야생 공원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 공원은 어떻게 형성됐는가. 독특한 지형과 산재한 기암괴석 때문에 요세미티 계곡의 기원과 형성과정은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원인으로 홍수, 화산 폭발, 지진, 침강, 침식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결정적인 해답을 제공한 것은 이곳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세밀하게 관찰한 뮈어였다.
그는 1868년 이곳을 처음 찾은 이래 공원의 곳곳을 답사하면서 빙하의 흔적을 발견하고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이곳 지형이 빙하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당대의 저명한 지질학자들은 그것을 아마추어적 발상이라고 무시했다.
가령 하버드대 지질학 교수이자 캘리포니아 지질탐사단 단장이던 조사이어 휘트니(Josiah Dwight Whitney)나 그의 제자 클라렌스 킹(Clarence King)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는 빙하가 없었다고 단정짓고 지각격변설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70여 년간 지속되다가 20년에 걸친 종합적인 탐사 끝에 1930년에 발표된 한 연구 결과에 의해 뮈어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렇게 요세미티에는 뮈어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의 이름을 붙인 트레일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소나무도 있다. 캘리포니아는 물론 미국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도 수십개이고, 거리 이름도 많다. 2006년에 발견된 소행성에는 평생에 걸친 자연 보전을 위한 노력을 기려 그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곳곳에 뮈어의 자취
그는 젊은 나이에 우연히 찾은 요세미티의 장엄한 경관에 매료되어 결국 이곳을 안식처로 삼아 자연을 진지하게 탐구했다. 뮈어는 요세미티를 통해 지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고, 요세미티는 그로 인해 그 아름다운 진면목을 뽐내면서도 훼손을 면할 수 있었다.
뮈어는 1838년 4월21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던바에서 태어났다. 뮈어가 11세 되던 1849년, 뮈어의 아버지는 솔가하여 위스콘신으로 이민했다. 뮈어가(家)는 위스콘신 변방의 호숫가 80에이커의 땅에 농장을 일구고 정착했다.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의 독려로 뮈어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열심히 읽고 찬송가를 암송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1년 뮈어는 위스콘신 대학에 입학해 식물학과 지질학을 공부했다. 식물에 대한 일생에 걸친 관심과 애정은 이때 길러진 것이다. 그러나 학업에서 그다지 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뮈어는 2년 만에 대학을 그만두고 인디애나 일대를 전전하면서 목공소와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식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틈만 나면 산과 들로 채집을 나갔다.
1867년 제재소에서 일하다가 눈을 다친 후 그는 노동자 생활을 그만두고 ‘빛으로 충만된 생활’인 자연탐구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쿠바와 아마존의 원시림으로 탐사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그 일환으로 루이빌을 출발하여 켄터키, 테네시를 거쳐 플로리다에 이르는 1000마일의 도보 여행을 떠난다. 이때 쓴 일기가 그의 사후 ‘멕시코 만으로의 1000마일 도보 여행(A Thousand Mile Walk to the Gulf)’으로 출판되었다.
1871년 ‘뉴욕 트리뷴’지에 요세미티 계곡이 빙하 작용에 의해 형성됐음을 밝히는 글을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뮈어는 요세미티와 캘리포니아의 산들을 주제로 한 자연 에세이를 본격적으로 집필하는 문필 생활에 들어간다. 위스콘신대 은사 에즈라 카(Ezra Carr)의 부인 진 카(Jeanne Carr)의 소개로 요세미티를 방문하는 여러 명사와 교유하면서 그의 이름은 학계와 언론계에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 1871년의 에머슨과의 만남도 진 카의 소개로 이뤄졌다.
1880년 뮈어는 오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진 카의 소개로 알게 된 루이 스트렌젤(Louie Wanda Strentzel)과 결혼해 버클리 북쪽의 마티네즈에서 새살림을 시작한다. 폴란드 출신인 그의 장인은 부유한 의사이자 북캘리포니아 지역 원예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뮈어는 과수원 일에 전념해 장인과 자신의 과수원을 마티네즈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농장으로 키웠다. 뮈어가 살았던 마티네즈의 집은 오늘날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서, 또 환경운동의 주창자로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시에라 클럽’을 열다
1889년 ‘센추리’지 편집자인 존슨과의 만남은 뮈어의 삶에 또 다른 전기가 되었다. 그와 함께 요세미티 계곡을 여행하면서 곳곳이 방목과 남벌로 훼손되어가는 것을 목격한 존슨은 요세미티의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해 요세미티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운동을 펼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동의한 뮈어는 존슨의 요청에 따라 ‘센추리’에 요세미티의 자연 경관을 소개하는 두 편의 글을 게재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요세미티 국립공원 결의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요세미티는 마침내 국립공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 보전을 위해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여론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한 뮈어는 캘리포니아 지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1892년 6월4일 시에라 클럽을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오늘날 미국의 환경운동을 선도하는 강력한 환경운동 단체인 시에라 클럽은 이렇게 태동한 것이다.
시에라 클럽의 활동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태평양 연안의 산간 지역에 관한 생생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곳을 탐구하고 향유하고 방문하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둘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숲과 자연 경관이 보존될 수 있도록 일반인과 정부의 지원 및 협력을 이끌어낸다.
시에라 클럽은 1892년 축산과 목재업 및 광산 채굴의 편의를 위해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규모를 축소하자는 내용으로 의회에 제출된 결의안에 대한 부결을 이끌어내면서 환경운동 단체로서 성공적으로 출범한다. 이후 1914년 사망할 때까지 뮈어는 22년 동안 시에라 클럽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미국 환경운동을 선도한다.
점심식사 후 다시 모인 우리 일행은 공원의 서쪽에 있는 투올로미 세쿼이아 숲 탐방에 나섰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달리니 투올로미 숲 입구다. 곧추선 침엽수들이 하늘을 가리다시피 늘어서 있어서 공원의 길은 그야말로 숲의 터널이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트레일을 따라 걸었다. 우듬지(나무의 꼭대기 줄기)가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쿼이아가 계속 이어진다. 해발 고도가 높다보니 요세미티 공원의 숲을 이루는 나무의 주종은 소나무, 전나무, 삼나무, 세쿼이아 등 침엽수들이다.
이중 요세미티를 상징하는 나무가 바로 자이언트 세쿼이아(Sequoiadendron giganteum)이다. 레드우드(redwood)를 비롯한 비슷한 종의 나무들이 전세계에 분포해 있으나 자이언트 세쿼이아 종은 오로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서편에서만 자란다. 자이언트 세쿼이아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지구상에서 몸체가 가장 큰 나무다. 보통 50m 이상 자라고 밑둥치의 직경은 5~7m에 이른다.
3000년 묵은 나무들 즐비
가장 널리 알려진 마리포사 숲의 그리즐리 자이언트는 높이가 63m이고, 아래 밑둥치 둘레는 28m, 직경은 9m이다. 몇몇 나무의 경우 밑둥치를 뚫어 마차와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터널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중 가장 유명했던 마리포사 숲의 와오나 트리는 1969년에 그만 죽고 말았다.
이런 반(反)생태적 행동은 더 이상 자행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의 증거인 이 구멍 뚫린 나무들을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여전히 구경거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숲의 이곳저곳에 산불에 탄 나무들이 눈에 띈다. 껍질이 두껍기 때문에(평균 60cm) 자이언트 세쿼이아는 불에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밑둥치 근처에 산불에 그을린 상처를 지니고 있다. 무려 47개의 불탄 상처가 확인됐다는 나무도 있다. 이 강인한 생명력! 자이언트 세쿼이아는 그래서 3000년 정도는 살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요세미티 공원에서 자라고 있는 세쿼이아 나무들은 15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놀라운 일이다. 이들은 이제는 이름조차 잊힌 무수한 원주민 인디언 부족들의 영고성쇠를 모두 지켜본 것이리라. 가히 불멸의 현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뮈어는 에세이 ‘요세미티 공원의 숲’(1901)에 이렇게 썼다.
요세미티와 시에라 산맥의 침엽수림은, 나무의 크기와 아름다움에서뿐만 아니라, 모여 있는 나무의 종류 수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자라고 있는 산의 위용에서, 미국의 그 어떤 숲, 아니 전세계의 어떤 숲보다도 훌륭하다. 나무들은 마치 다른 별에서 갓 도착한 어떤 초월적 존재자들인 양, 그처럼 고요하고 화사하고 신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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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닿아 있는 듯한 이 거대하고 곧은 나무들이 불러일으키는 외경심, 올곧음, 당당함, 무애로움, 심오한 단순성을 생각하면 이들이 신적 존재라는 뮈어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몸은 피곤했으나, 더할 수 없이 정갈하고 장엄한 산간에서 산신령의 현신과도 같은 세쿼이아 나무들과의 대면이 가져다준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은 돌아오는 여정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