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신해철1968~2014 / 오비추어리(Obituary)

  • 김작가 | 대중문화평론가 noisepop@hanmail.net

    입력2014-11-20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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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2014년 10월 27일은 서태지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고 김동률이 음악 차트를 올킬한 직후였다.
    • 신해철은 두발· 교복 자율화, 사교육 철폐라는 배경의 중산층 가정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40대의 욕망을 폭발시킨 시대적 아이콘이었다. 1990년대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한복판에서, 그가 떠났다.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싸이, 윤종신, 윤도현, 타블로, 이승철이 한자리에 섰다. 무대도 호텔 프레스룸도 아닌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굳은 표정으로 섰다.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신청하고자 그들이 함께 섰다.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음악인들이 신해철을 위해 기자들 앞에 섰다.

    동료 의식의 발로였을까. 5일간 이어진 조문 풍경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웅변했다. 형식은 가족장이었으나 내용은 그 이상이었다. 일반에 공개된 빈소에는 내내 수백 명이 줄을 섰다. 분향을 하려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웬만한 유명인사 빈소를 아득히 능가하는 화환들이 아산병원 장례식장 2층을 국화꽃 향기로 채웠다. 조용필부터 장기하까지, 한국 가요사에 흔적을 남긴 음악인들의 이름이 모두 리본에 적혔다. 권양숙 여사와 문재인 의원을 필두로 정치인들의 이름도 보였다.

    이 모든 것은 명백히 너무 이른, 게다가 석연치 않은 신해철의 죽음에 대한 허탈함이었다. 한 시대의 아이콘에 대한 그리움이자, 신해철이 개척하고 상징한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이었다.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

    뮤지션 신해철을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배경 시대이기도 한 1988년 겨울 대학가요제였다. 발라드 가수들이 대부분이던 당시 ‘그대에게’를 들고 나온 무한궤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미 시나위, 백두산 등의 헤비메탈 밴드가 그 전해부터 TV에 적지 않게 출연하던 터라 무한궤도보다 더욱 로킹(rocking)한 사운드에는 이미 익숙했다.



    문제는 리드 보컬을 맡은 사람이었다. 키보드를 치며 노래하는 것도 신선했는데, 세상에, 기타 솔로까지 하는 것이었다. 로커의 상징인 긴 머리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학생 머리를 하고 기타 속주를 구사하는 모습이란, 뭐랄까, 당시로서는 농구화를 신고 축구를 하는 것 같았다.

    무한궤도는 너무도 당연하게 대상을 차지했다. 다음 날 아이들은 온통 무한궤도 얘기만 했다. 평범한 중학생에게 TV 말고는 별다른 놀 거리가 없던 때였으니, 누구나 대학가요제를 지켜봤던 것이다. “야 어제 대학가요제 봤냐. 대상 받은 애들 죽이지 않냐” “보컬 하는 애 완전 캡짱이더라. 건반도 치고 기타도 막 쳐. 열나 잘 쳐.”

    음악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선희, 작품하나, 그리고 이상은까지 1980년대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이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무한궤도의 데뷔 무대에 있었다. ‘노래를 잘한다’를 아득히 뛰어넘는 ‘멋스러움’이 그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멋스러움은 한 시대의 욕망이자 축적이었으며 그리고 폭발이었다. 재능은 종종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주머니를 뚫을 정도의 재능이란 제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뚫을 만한 주머니를 만나야 한다. 신해철에게는 1980년대가 그 주머니였다.

    1980년대는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왔다. 쿠데타로 세워진 정권엔 국민의 관심사를 정치에서 돌리기 위한 몇 가지 장치가 필요했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3S정책’이 나왔고 대학입학 정원이 대폭 늘어났으며 사교육이 폐지됐다. ‘12시 통행금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석유파동의 후유증이 극복되고 수출이 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컬러TV와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1960년대 중반~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아이들은 2차 베이비붐 세대라 할 만큼 많았다. 이들은 1980년대에 이르러 청년이 됐다. 두터운 중산층과 두터운 청년층. 이런 사회적 조건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건 당연했다.

    저항과 자유의 공존, 양립

    대학생의 증가는 곧 일정 기간 생산을 유예받는 계층의 증가를 의미한다. 1980년대 학생운동이 정점을 찍은 것이 정치적 결과였다면, ‘신촌’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다운타운의 출현과 그 안에서 발현한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은 문화적 결과였다. 들국화와 김현식의 신화는 신촌의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저항과 자유의 공존, 또는 양립이 폭발했던 것이다.

    이 분위기는 20대에 그치지 않았다. 10대도 마찬가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로 불리며 심지어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던 시절, 20대의 정치적 고민은 10대에게 미치지 않았다. 아직 어렸던, 호기심과 감성이 발아하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주어진 건 해방감이었다. 두발 및 교복 자율화로 당시 10대는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세대였던 것이다. 시간도 많았다. 사교육 철폐는 오후와 주말, 그리고 여가를 선물했다. 인터넷은커녕 PC통신도 없던 시절이다. 문화의 보급 통로는 TV와 라디오, 잡지가 전부였다.

    TV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이 기성세대까지 아우르고자 했다면, 음악 프로는 명확히 청년 세대를 겨냥해 전파의 화살을 쐈다. 1980년대까지 음반시장에서 팝과 가요의 시장점유율은 8대 2였다. 사람들은 팝을 즐겨 들었고, 음반 구입이라는 능동적 소비를 주저하지 않았다. 밤마다 심야 라디오방송에 귀 기울이며 녹음 테이프를 만들었고, 주말이면 청계천을 누비며 불법 복제 음반인 ‘빽판’을 사들였다.

    당시 라디오 키드의 문화를 신해철은 이렇게 말했다. “음악 초보자는 ‘2시의 데이트’를 들으며 장르 구분과 명곡에 대한 기초를 배웠다. 김기덕을 통해 초급반을 마친 다음에는 중급반 격인 ‘황인용의 영팝스’로 건너가서 심장을 때리는 음악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다음 ‘전영혁의 음악세계’라는 마스터클래스로 넘어갔다.” 두터운 청소년층이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형성할 수 있는 시대였다.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1988년 겨울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그룹 ‘무한궤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해철이다.

    라디오 키드의 飛上

    모든 창작자의 출발은 마니아다. 바꿔 말하면 마니아는 곧 창작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팝과 록을 들으며 감수성을 키우던 청소년들은 하나둘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1970년대 욕망이 통기타였다면 80년대 욕망은 일렉트릭기타였다. 뒤늦게 소개되기 시작한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등 1960, 70년대 전설적인 밴드들과 동시대에 탄생한 헤비메탈은 음악뿐 아니라 ‘소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도대체 저런 소리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그래서 아이들은 기타를 잡았다. 그리고 시나위, 부활, 백두산 등 1세대 헤비메탈 밴드가 탄생했다.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을 중심으로 주말마다 20대 초반의 헤비메탈 밴드들이 ‘항쟁’을 벌였고, 웬만한 고등학교에선 속속 스쿨 밴드가 등장했다. 어쨌든 호기심은 왕성했고 시간은 많았던 것이다.

    신해철 역시 이런 라디오 키드이자 로큰롤 키드 중 하나였다. 중학생 때 1970년대 하드록에 꽂혀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수위를 달리던 성적이 곤두박질쳐 결국 아버지가 기타를 부수고 말았다는 스토리는 비단 신해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문화를 갈망하던 이들이 반드시 록만 소비했던 것도 아니다. 명동 뒷골목에서 유통되던 ‘논노’ 등 일본 패션잡지와 회현동 지하상가에서 몰래 거래되던 안전지대, 체커스 같은 최신 일본 음반은 거품경제의 최전성기를 누리던 멋스러운 일본 문화에 매료된 이들에게 교과서 구실을 했다. 팻 메스니를 필두로 한 동시대 재즈 뮤지션들이 소개되면서 지적이고 세련된 음악을 추구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소비가 창작으로 폭발한 해가 바로 1988년이다.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인 그해 여름, 강변가요제에서 이상은이 ‘담다디’로 대상을 수상했다. ‘담다디’의 주말이 지나고 온 월요일,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꺽다리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이 스무 살의 키 큰 아가씨는 단숨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대상을 받으면 으레 펑펑 울던 그 전 신예들과 달리 그녀는 “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부모도, 친구도 아닌 “마이클 잭슨”이라고 말했다. 후일 이상은은 ‘담다디’를 준비하던 과정에 대해 “음악은 비틀스를, 비주얼은 체커스를 연구했다”고 밝혔다. 팝의 클래식과 일본 음악의 트렌드가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무한궤도 신드롬

    이상은이 대상의 영광을 누렸던 그해의 강변가요제에 신해철도 참가했다. ‘아기천사’라는 그룹으로. 후일 자신의 솔로 앨범에 실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의 원곡 격인 ‘그리움은 기다림의 시작이야’라는 노래로 출전해 3차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탈락한 뒤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가요제에서 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고. 약관의 패기였을까.

    하지만 허세에 가까운 이 선언을 그는 반년도 되지 않아 지켰다. 그해 겨울 대학가요제 마지막 순서였던 참가번호 16번 무한궤도가 무대에 올라 ‘그대에게’를 불렀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조용필이었다. 들국화도, 시나위도 무한궤도만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것이다. 번듯한 학벌, 잘생긴 얼굴, 화려한 연주, 인트로부터 쉴 틈 없이 달리는 전개,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무한궤도는, 그리고 신해철은 아이돌의 자리에 올랐다.

    무한궤도는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가 담긴, 한 장의 앨범을 남긴 후 해체했다. 신해철은 솔로로 전향해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등 발라드를 내세운 이 앨범들로 신해철은 무한궤도의 성공을 이어갔다. 여고 앞 문방구에서 그의 브로마이드는 불티나게 팔렸다. 언변도 화려한 덕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MBC ‘우리는 하이틴’으로 DJ 활동을 시작했다.

    1991년 한국 최초로 전곡을 미디(MIDI)로 작업한 앨범 ‘Myself’는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10대 가수상을 안겨다줬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변진섭, 신승훈, 이승환과 더불어 이문세가 완성한 한국 발라드 가수의 계보 그 시점에 신해철이 있었다. 그가 아이돌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신해철의 모습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생활’ ‘일상’ ‘개인’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지난 7월 jtbc 예능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신해철.

    음악계에는 ‘10년 주기설’이라는 게 있다. 10년마다 한 번씩 판을 뒤집어 엎는 거물이 나타난다는 거다. 1960년대에 비틀스가 있었고 70년대에는 레드 제플린이 있었다. 80년대의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었다. 90년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에선 너바나가 등장해 얼터너티브 혁명을 주도했다. ‘X세대’라는 신조어가 너바나와 함께 등장했다.

    얼터너티브의 물결은 한국에도 상륙해 ‘록=헤비메탈’이라는 등식을 깼다. 긴 머리와 가죽재킷 대신 체크무늬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가 새로운 시대의 록 패션이 됐다. 70년대 펑크에 팝 멜로디를 결합한 너바나의 음악은 그전까지 헤비메탈을 경원시하던 음악 소비자까지 록 팬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노래하던 ‘허무’와 ‘자아’는 때마침 불어닥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최인훈의 ‘화두’ 열풍에 딱 들어맞는 시대정신 같은 것이었다.

    음악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1990년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는 더 이상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았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전대협이 해체되고 한총련이 등장했다. 1993년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표어와 함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활’을 전국 학생 조직의 어젠다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일상’이라는 단어가 교정 내 대자보의 단골용어가 될 즈음이었다. 즉, ‘집단’이 아닌 ‘개인’이 화두가 된 것이다.

    1992년 고 최진실과 최수종이 주연을 맡은 ‘질투’는 트렌디 드라마를 표방하며 20대의 연애 그 자체를 묘사했다. 편의점이 확산되면서 밤은 소비의 시간이 되었고, 노래방이 유행하며 굳이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서태지와 신해철의 공존

    갈 곳 잃은 운동권 인사들은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소비문화에 불과했던 대중문화를 담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1970년대 이탈리아 아트 록이 뒤늦게 소개되며 몇 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러시아 고전 영화들이 단관 개봉돼 역시 몇 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자크 라캉, 카를 융 등 현대 철학자의 이론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것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이와이 슈ㄴ지가 불법 복사 비디오테이프로나마 소개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역시 1992년에 나왔다. 시대적 격랑의 정점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모든 지형이 바뀌었다. 1982년 미국에서 MTV의 개국으로 음악이 ‘듣는’ 것에서 ‘보는’것으로 전환된 사건이 딱 10년 후 한국에서 일어났다. 발라드와 트로트로 양분되던 시장에 댄스음악이 순식간에 중심에 섰다. 음악의 주도권은 라디오에서 TV로 넘어왔고, 그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잡기 위해 쇼 프로그램 카메라맨들은 온갖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한국어로는 절대 안 될 거라던 랩이 ‘난 알아요’를 통해 한국화했다. 멜로디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음악이 리듬 중심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모든 요소는 음악시장의 주요 소비자를 20대에서 10대 중후반으로 급격히 끌어내렸다. 197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아이들이다. 한국 음악의 1990년대는 그렇게 1992년에 찾아왔다.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해철의 빈소는 신해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5일장 내내 붐볐다.

    ‘서태지 혁명’을 뒷받침했던 건 신해철의 변신이었다. “이제 솔로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며 그룹 넥스트를 결성한 것이다. 당시 시대적 풍경을 고스란히 담은 ‘도시인’, 무한궤도 시절부터 꾸준히 발전시켜온 존재론적 독백 ‘증조할머니의 무덤가에서’ 등이 담긴 앨범으로 신해철은 90년대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한다. 그리고 서태지와 더불어 90년대 전반기의 대중음악혁명을 견인하는 쌍두마차가 됐다. 팝과 가요를 동시에 듣는 세대의 뒷받침이 있었다. 새로운 것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세대의 층이 그만큼 두터웠던 거다.

    그러한 지지를 발판으로 신해철은 자신의 야심을 더욱 거대한 규모로 구현한다. 1994년,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넥스트 2집 ‘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으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결합한 이 앨범은 한국 록 초유의 블록버스터였다. 가사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깊어졌고,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불러와 다듬은 사운드는 이전의 한국 대중음악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굿바이 얄리’ 같은 발라드 이면에는 ‘껍질의 파괴’ ‘The Ocean’같은 대곡이 존재했다. 샤우팅 창법과 속주 기타는 ‘한국에도 이런 애들이 있다’는 선언이었다. 오직 서구 록만 듣던 도도한 마니아들은 넥스트의 이 야심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이 얼터너티브 록을 전격 수용하며 팝의 최신 트렌드와 한국 대중음악의 시제 일치를 이어갔다면, 넥스트는 1980년대부터 이어져오던 한국 록계의 열등감을 한 방에 청산했다. 염원을 이루어냈다.

    신해철의 음악적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테크노’라는 말조차 낯설던 1996년 윤상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노땐스’를 결성, 전자음악을 시도했으며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OST를 맡아 지금 들어도 웅장하기 그지없는 스코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의 야심과 재능이 뿜어내는 빛을 받아 안기에는 시대가 또다시 변하고 있었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후 생긴 공백을 메운 건 H.O.T.였다. 아티스트의 재능이 아닌, 기획사의 능력이 시장을 주도하는 세상이 열렸다. 홍대 앞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인디신에서 넥스트, 크래시 등은 공룡처럼 거대한 존재일 뿐이었다. 넥스트와 그 외 활동을 통해 쌓아온 예술성과 대중성은 또 한 번의 새로운 흐름 앞에서 흔들렸다.

    신해철이 택한 건 정면돌파였다. “밴드로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그는 1997년 넥스트를 해체했다. 그리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크롬’이란 이름으로 전자음악 앨범을 발표하고, 세계적 프로듀서인 크리스 탕가그리스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했다. 대중과의 타협 같은 건 없었다. 넥스트를 결성하며 그랬듯 그는 늘 자신의 음악적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신해철은 말한다. “오랫동안 하다보니 어떻게 해야 평론가들이 좋아할지 예측이 된다. 하지만 1997년부터 더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넥스트를 해산할 때 더 올라갈 곳이 없어서 해산한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평가와 판매를 원한 적이 없다. 이후부터는 철저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1997년까지의 내가 인기 있는 소설가였다면 이후부터는 논문을 썼던 셈이다.”

    하나는 분명하다. 그 실험들이 없었다면 2002년 월드컵 때 전국을 쩌렁쩌렁 울렸던 ‘Into The Arena’의 박력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21세기의 신해철 음악 중 가장 잘 알려진 곡이 이 노래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타난 mp3는 급격히 빠른 속도로 음반 시장을 몰락시켰다. 팬덤의 강력한 숭배로 아이돌은 건재했다. 20, 30대 여성을 주 소비층으로 삼는 ‘웰 메이드가요’ 역시 충분히 고난의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신해철을 위시한 장르주의 음악가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팬덤도, 유사 연애감정도 없는 시장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신해철은 자신의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미 1990년대 중반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통해 심야 라디오 프로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던 그는 자신의 간판 프로가 된 ‘고스트 네이션’을 통해 막강한 라디오 팬덤을 구축했다. 그의 ‘음악’보다 ‘말’이 더욱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미 라디오의 패러다임이 음악에서 토크로 넘어갔던 때, 그는 다른 DJ들은 하지 않는 말들로 자신의 시간을 장악했다. ‘마왕’이란 별명이 생긴 것도 그때다. 남들이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신문 배달하는 청년의 사연을 소개했다. 아이돌 음악이 라디오마저 장악했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인디음악을 틀었다. 기행을 주저하지 않았고 사회적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숭배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활자화하고 이슈가 됐다. 라디오를 통해 어젠다 세팅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DJ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신해철밖에 없다.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2002년 대선에서 그는 한 달 동안 방송도 접은 채 노무현 후보 당선을 위해 앞장서며 소셜테이너의 원형을 세웠다. 그전까지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음악이 민중음악의 역할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그는 가사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신의 세계관을 일치하려 활동했던 것이다. 신해철이란 가수의 탄생을 지켜본 세대가 사회 주체가 돼 뮤지션과 팬이 아닌,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원인이었다.

    꿈꿀 수 없는 시대

    그런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오랜 공백 끝에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 돌아오려던 찰나였다. 서태지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던 날, 김동률이 음악 차트를 올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갔다. 1990년대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한복판에서 그가 갔다. 그때를 추억하던 세대가 접한 이 갑작스러운 부고는, 그래서 그들의 시대가 황혼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나침반 같은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뮤지션의 죽음’ 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한 시대의 끝’이라는 함의로서 작용하던 밤. 그날은 2014년 10월 27일이었다.

    억압과 자유가 기묘하게 공존하던 1980년대를 자양분으로 성장한 세대가 1990년대 대중문화 혁명의 주체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대적 운동의 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모든 곳에 신해철이 있었다. 유행과 인기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때로는 대중이 그를 따랐고, 때로는 시민사회가 그를 지지했다. 한 시대의 감성을 만들어냈고, 한 시대의 표현 영역을 극단까지 확장했으며,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했던 신해철의 때 이른 죽음에 온 사회가 애도한 것은 ‘좋았던 시절’의 갑작스러운 종언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었을까.

    그만한 재능을 가진 스타는 또 등장할 것이다. 그만큼 노력했던 스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런 재능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재능과 취미를 발견하기도 전에 사교육의 노예로 살아간다. 심지어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철저히 교육제도의 틀 안에 들어가버렸다. 10대 혹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스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기획사의 시스템 안에서 아이돌로 키워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들이 꿈을 꾼다는 건 사치가 됐다. 그 꿈을 꿀 수 있는 아이들도 점점 줄어간다. 압도적으로 많은 기성세대의 벽에 부딪혀 그들의 꿈은 시대와 공명하지 못하고 막힐 수밖에 없다. 다시는 신해철 같은 아이콘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확신 비슷한 생각이, 그래서 그 누구의 장례식보다 짙었던 국화 향과 함께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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