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 살 최순애는 서울 가서 소식 없는 오빠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오빠 생각’을 어린이 잡지에 투고했다. 이 시에 감동받은 이원수가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냈다. 10년간의 연애편지 교환 끝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이원수는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과 동시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오빠 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은 생전에 최순애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만년의 최순애와 이원수 부부. 최순애는 ‘오빠 생각’을, 이원수는 ‘고향의 봄’이란 국민노래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노래를 뛰어넘는, 이른바 한국인의 가을 노래가 있다. ‘오빠 생각’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이 노래보다 한국인의 가을을 절절하게 읊은 노래가 있을까. 딱 잘라 말해 없다고 봐야 한다. 노래는 ‘비단구두’ ‘말 타고 서울 가시고’ ‘뜸부기’ 등 토속적인 말과 더불어 우리 민족 서러움의 감성을 ‘오빠’라는 아늑한 이미지로 대변한다. 그래서 반세기가 넘도록 많은 사람이 애창했다.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줄게”
10대 소녀들이 대중스타에게 무조건 갖다 붙이는 ‘오빠’와는 전혀 다른 이 노래 속의 ‘오빠’는 누구일까. 가장 한국적인 비애와 그리움의 표상이 오빠가 된다. 그래서 노래는 동요로 출발했지만 조용필, 송창식, 이선희, 구준엽을 비롯해 소프라노 조수미 등 수많은 쟁쟁한 가수가 저마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불렀다. 이는 ‘오빠 생각’이 곧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 ‘애국가’나 ‘고향의 봄’ 못지않게 대중적인 인지도와 호소력을 가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노래 속의 오빠는 과연 무엇 때문에 서울로 갔을까. 일제에 논밭을 빼앗긴 농촌의 젊은이가 어린 누이동생을 두고 돈 벌러 갔을까, 아니면 공부하러 갔던 것일까, 또는 독립 투쟁하러 만주로 떠났을까. 돌아올 기약 없는 오빠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이의 가슴속에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지는’ 이 노래는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렇듯 슬프게 작곡됐을까.
그러나 노래의 풍경은 상상은 가지만 구체적으로 그려내기는 어렵다. 특히 1925년이라는 작사 연도가 나타내듯 이 노래의 연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기록으로 보면 가사는 아동문학가 최순애 선생이 만들었고 멜로디는 박태준 선생이 붙였다. 1990년대 말 타계한 최순애 선생은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고(故) 이원수 선생의 부인이다. 1925년 늦가을, 최순애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당시 방정환 선생이 펴내던 잡지 ‘어린이’에 한 편의 동시를 투고했다.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시작(詩作) 동기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당시 나에게는 오빠 한 분이 있었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우리 집에서 오빠는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 인물로 보고 따라다녔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 왔는데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줄게’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다. 그런 오빠를 그리며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보면서 울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쓴 시가 바로 ‘오빠 생각’이었다.”
동시 ‘오빠 생각’을 지은 최순애가 살던 수원 장안문 근처. 수원성 복원사업으로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박태준의 노래비 앞 탐방객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오빠 생각’을 유장하게 그리고 구성지게 불렀다.
그러나 10여 년간 연애편지를 교환한 끝에 1935년 첫 대면을 약속한 날 이원수는 문학 서클의 독서회 사건으로 일본 고등계 형사에 체포당해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최씨는 이 대목에서 “서울에 간 오빠를 기다리며 부르던 노래 ‘오빠 생각’이 옥에 갇혀 있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노래로 변해, 남몰래 부르며 울었다”고 회고했다. 요즈음 말로 고무신을 바꿔 신지 않고 오매불망 일편단심 기다린 것이다. 시 발표 이후 10여 년 동안의 ‘오빠 생각’이 ‘임 생각’으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과수원 집 딸인 최씨는 유난히 코스모스를 좋아해 과수원 언덕에 가득 심어놓고 이원수의 출옥을 기다렸고 1년 뒤 이씨가 석방되자마자 결혼했다. 요즈음 세대에게는 믿기지 않을 순애보다.
작곡의 기본도 모르고 만든 노래?
노래를 만든 이는 박태준이다. 박태준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로 시작되는 이은상의 시에 곡조를 붙인 ‘동무생각(사우·思友)’의 작곡가이자 우리나라 근대 음악의 개척자다. ‘오빠 생각’은 시로 발표된 바로 그해 박태준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박태준은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 문예교사로 있었다. 그는 ‘오빠 생각’을 작곡한 후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기로 결심,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를 졸업한 뒤 26년간 연세대에 재직했다. 그 어렵던 시절, 선교사 덕분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것이다.
박태준은 2년 후배인 현제명과 더불어 근대 음악계의 선구자쯤으로 인정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현제명과 박태준이 같은 대구 출신에다 계성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이어 연세대 교수까지 함께 한 기이한 인연을 가졌다는 점이다. 박태준의 음악 활동은 동요에서 비롯된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 ‘가을밤’에 이어 수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가곡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오빠 생각’을 비롯해 ‘사우’ ‘책상 위의 오뚝이’ 등은 작곡의 기본도 몰랐던 20대 초반에 지은 것들이다.
노래 ‘오빠 생각’은 유장한 곡조에다 비장미까지 갖춰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오빠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겨레의 마음으로 제각각 해석되며 퍼져나갔다. 가사의 서정성과 토속성, 그리고 한국인의 한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사랑받던 동시는 노래로 불려지면서 그야말로 국민가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요를 국민가요쯤으로 불리게 한 두 사람, 박태준과 최순애는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박태준의 부인 김봉렬이 증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루는 그 양반이 어린이 잡지를 한 권 들고 와 ‘뜸북뜸북 뜸북새’ 하며 읽더니 곡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시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더니 결국 그날 밤 노래로 만들더군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요.”
최순애도 박태준 선생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며, 방송국을 통해 기별이 있었지만 어떤 급한 사정으로 만남이 이뤄지지 않아 끝내 만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오빠 생각’의 흔적은 찾기가 쉽지 않다. 최순애의 고향 수원 북수동 생가터 격인 과수원은 수원성 복원사업으로 인해 아무런 자취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최순애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향 수원을 떠나 서울 관악구 남현동에 살았다. 그래서 말년에 살던 남현동 예술인마을의 이웃들이 최순애의 행적을 간간이 증언해 준다. 그는 한동네 살던 미당 서정주와 내왕이 잦았다고 한다. 서정주가 장난스레 붙인 닉네임이 ‘뜸부기 할머니’다. 이런 연유로 오랫동안 최순애는 ‘뜸부기 할머니’로 불리다가 1998년 조용히 타계했다.
대구 사람들의 사랑
그래서 그런지 ‘오빠 생각’의 흔적은 작곡자의 고향인 대구에 주로 나타난다. 대구시가 공을 들여 만든 대구 근대 문화골목에 들어서면 박태준의 흔적이 곳곳에 등장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비도 있고, TV방송 드라마로 안방극장 전파를 타 널리 알려진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도 등장한다.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박태준에 관한 기록과 흔적이다. 그 속에는 ‘오빠 생각’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대구 근대 문화골목을 걷노라면 대구 사람들은 ‘오빠 생각’을 자기 고장의 노래로 여기는 듯한 느낌이 문득 든다. 그래서 해마다 ‘오빠 생각’ 노래 콘테스트도 열리고 대구 시내 곳곳에 ‘오빠 생각’ 노래비도 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오빠 생각’은 인구에 회자되는 클래식 포크 같은 노래이지만, 오늘날 생각하면 가사 내용이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 노래다. 노래는 일제강점기 어린 소녀의 의식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이었나를 짐작게 한다. 8분의 6박자의 노랫가락에 나타난 애상조의 멜로디는 결코 잊히지 않으면서 오늘날에도 만인의 노래로 애창된다. 뜸북뜸북 뜸북새가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우는 깊은 가을, 누구는 노래 ‘오빠 생각’을 가만히 부르며 눈시울을 적실지도 모르겠다.
한 해가 간다. 마음은 아직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서성거리는데 시간은 어김없이 한 해 맨 끝자락에 사람들을 야멸치게 세워둔다. 떠나보내지 못할 미련과 안타까움이 남았지만 우리는 ‘나뭇잎이 우수수수 떨어지는’ 이 가을을 뒤로하고 떠나는 한 해를 보낼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12월, 저마다 가야 할 먼 길이 남아 있는 한 해의 끝자락이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된다. 박태준도 최순애도 가고 없다. 올해가 최순애 선생(1914~1998) 탄생 100주년이다.
노래는 수많은 그림으로 그려졌다. 노래 ‘오빠 생각’을 형상화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