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기철 일행은 옌지에서 북한 요원들의 추격을 받는데, 다리를 다친 정순미가 붙잡힌다.
- 절체절명의 순간, 국정원에 걸려온 세상일보 사회부장의 전화.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거기 앉아.”
둘이 다시 앉았을 때 한정철이 외면한 채 말했다.
“윤기철하고 정순미가 남자 하나하고 같이 있어. 셋이 움직인단 말이지.”
둘은 시선만 주었고 한정철의 말이 이어졌다.
“그 한 놈이 안내역인지 누구인지는 아직 확인이 안 됐어. 어제 셋이 택시로 2시 반쯤 둔화역 앞까지 갔다는 거야.”
“…”
“거기서 열차를 탄 것 같아.”
심호흡을 하고 난 한정철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들, 혹시, 그 한 명에 대해서 감이 잡히는 놈이 없나? 윤기철이 갑자기 중국에서 탈북자 안내역을 고용했을 리는 없고 말야. 사전에 미리 계획을 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나?”
“실장님, 아니, 특보님.”
박도영이 한정철의 직함을 고쳐 불렀다. 헛기침을 하고 난 박도영이 한정철을 보았다. 한정철은 이른바 낙하산이다. 국정원 경력은 2년, 청와대 안보수석실에서 2년 반 근무했고, 그전에는 국방연구원에 3년, 그전에는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2년 일했다. 처음 시작은 대학교 전임강사였다. 전임강사 시절 TV에 평론가로 여러 번 출연했다가 출세가도를 탄 셈이다. 박도영은 국정원 경력이 21년, 당년 48세, 한정철이 한 살 아래지만 두 계단이 높다.
“특보님, 그 정보를 어디서 받으셨습니까? 먼저 그것부터 말씀해주셔야….”
“아니, 그건 알 필요가 없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정철이 잘랐다. 얼굴을 굳힌 한정철이 박도영을 보았다.
“잘 알겠지만 실무팀에선 정치적인 상황을 모르는 게 나을 때가 많아. 이해하겠지?”
“아니, 실무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알려주셔야 합니다.”
어깨를 편 박도영이 한정철을 똑바로 보았다. 이제 각오를 한 태도다.
“그것이 최고 책임자의 지시입니까? 도대체 실무 책임자인 제 업무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아니, 이 사람이.”
눈을 치켜뜬 한정철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누굴 끌고 들어가려는 거야?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월권하지 말고!”
한정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말야!”
이 정도면 한정철의 배후가 얼마나 든든한지는 이인수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박도영이 손으로 못을 빼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안 된다.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박도영이 마침내 시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조사해보겠습니다.”
“윈난(雲南)성에 볼 것이 많아.”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농경지를 보면서 임승근이 말했다.
“우리 회사 선배도 가족하고 다녀왔는데 괜찮다고 했어.”
선양을 떠난 직특(直特)은 베이징을 향해 달리고 있다. 선양에서 베이징까지는 9시간 반 걸린다. 윤기철이 머리를 돌려 창가에 앉은 정순미를 보았다. 정순미는 창밖으로 시선을 준 채 옆모습만 보인다. 둔화에서 지린(吉林), 창춘(長春), 선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향하는 중이다. 오전 11시 반, 어제 오후 4시부터 계속해서 열차를 타는 셈이었다. 갈아타느라고 지린에서 두 시간, 선양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지만 애초 계획했던 고속버스보다는 빨리 베이징에 도착할 예정이다. 셋이 마주 앉은 좌석 구도여서 임승근이 앞에 앉은 윤기철을 보았다.
“베이징에서 회사에다 연락을 해야겠다.”
“왜?”
“내가 바빠서 여름휴가를 안 썼거든.”
“그만 됐어.”
금방 알아들은 윤기철이 정색하고 임승근을 보았다.
“베이징에서부터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돌아가. 휴대전화나 주고.”
임승근의 휴대전화는 아직 넘겨받지 못했다. 그때 정순미가 머리를 돌려 임승근을 보았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내렸다.
“닷새는 쓸 수 있어. 그 시간이면 윈난성에 갈 수 있겠지.”
“됐다니까 그러네.”
“내가 기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알아, 형.”
임승근의 얼굴이 이제는 굳어졌다.
“너, 지금 심각해. 알고 있지?”
다시 정순미가 시선을 주었으므로 임승근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외면했다. 그때 윤기철이 대답했다.
“안다고. 시발놈들이 우리를 다 버렸다는 걸 말야.”
윤기철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임승근을 보았다가 외면했다. ‘우리’는 윤기철과 정순미를 나타냈지만 ‘다’라는 표현은 제각기라는 뜻도 된다. ‘제각기 다’가 맞다. 한국은 윤기철을, 북한은 정순미를 버렸다는 말이다. 윤기철은 문득 머리를 돌려 제 손을 보았다. 어느새 정순미가 자신의 손을 쥐었던 것이다. 윤기철도 정순미의 손을 깍지 껴 쥐면서 말을 이었다.
“형, 그러니까 형까지 피해 보는 건 싫어. 우리 둘이 저질렀으니까 우리 둘이 책임을 질게.”
“좆 까고 있네, 시발놈.”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임승근이 머리를 돌리면서 말했다.
“베이징에서 보자. 할 일이 많으니까.”
오후 1시 40분, 사무실 근처 순댓국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던 박도영이 젓가락 움직임을 멈췄다. 식당 안으로 이인수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왜?”
이인수는 먼저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박도영이 그렇게 물었다. 앞쪽 자리에 앉은 이인수가 심호흡을 했으므로 박도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뿐이다. 이인수가 박도영을 보았다.
“예에?”
“바쁘니까 확인은 나중에 하시고, 그러다가 국정원 측이 북한 측에 윤기철과 정순미의 중국 내 위치를 통보, 체포하도록 협조했습니다.”
“에?”
“이 통화가 녹음되고 있을 테니 확인바랍니다.”
“아니, 잠깐만, 도무지….”
“국정원의 윤기철 담당은 박도영, 이인수, 사무실은 소공동 5층 건물입니다. 그 건물은 우리 사진팀이 이미 찍으러 갔고, 에, 또….”
“아니, 박 부장님.”
“이건 북한과의 비선을 지킨답시고 국민을 제물로 바친 경우가 되겠습니다. 현지에서 계속 생생한 증거 자료가 넘어오니까 내일 조간에 1탄이 나갈 겁니다.”
“난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정신을 차린 김현은 이놈들이 술수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의 목소리가 강경해졌다.
“어설픈 루머로 국가 정보기관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본다면 강력한 법적 수단을 강구할 것입니다.”
“사건에 휩쓸린 우리 기자하고 윤기철이 국가인권위원회, 여야 정치권, 청와대에도 상황을 알릴 겁니다. 물론 우리 세상일보에서 터뜨리고 난 후 말이죠.”
통화가 끊겼으므로 김현은 아연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우선 이 내용을 확인해야만 한다.
“도청한 거야.”
그 시간에 박도영이 이인수에게 말했다. 소공동 상황실 근처의 커피숍 안이다. 상황실은 한정철의 부하 둘이 지켰지만 개점 휴업 상태나 같다. 눈을 치켜뜬 박도영이 이인수를 보았다.
“내가 임승근한테 전화한 것부터 체크당한 거라고.”
“그렇다면.”
쓴웃음을 지은 이인수가 커피잔을 들었다가 놓았다.
“윤기철의 보호감시 파일을 보고 임승근을 알아낸 것이군요.”
“그래, 그래서 임승근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는 우리를 의심하고 도청을 붙인 거다.”
“과연 정보요원답습니다.”
“한정철이 데려온 애들이 전문가야. 한정철 병신만 빼고.”
심호흡을 한 박도영이 충혈된 눈으로 이인수를 보았다.
“난 끝났지만, 윤기철한테 미안하다.”
“그건 동생동사(同生同死)죠. 저도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끌려간 정순미가 안됐습니다.”
“윤기철한테 실컷 욕을 얻어먹은 것이 그래도 낫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박도영의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다. 발신자를 본 박도영이 입맛을 다시고는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상황실 요원이다.
“여보세요.”
박도영이 응답하자 요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무슨 일입니까? 기자 놈들이 와서 사무실 건물하고 복도까지 찍는데요. 들어오려고 해서 막았는데….”
숨을 죽인 박도영의 귀에 요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본부에 보고는 했는데, 세상일보 기자증은 봤습니다!”
오전 10시 40분, 국정원장 조국진이 청와대 안보수석 윤정기의 전화를 받는다.
“예, 수석님.”
윤정기가 62세로 육사 2년 선배이고 둘 다 참모총장을 거쳤다. 그러나 윤정기는 국방연구원에 있다가 안보수석이 되었고, 조국진은 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2년 후에 국정원장으로 입각했다. 둘 다 대북 강경파로 분류되지만 조국진이 정치물을 좀 먹어서 융통성이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둘이 친하다는 소문은 없다. 조국진은 윤정기의 전화를 받으면서 긴장한다. 윤정기는 만날 대통령을 만나는 인간이다. 옛날에는 대통령 관사 똥 푸는 놈이 장관보다 위세를 더 부린다고 했다. 그때 윤정기가 말했다.
“뭔 일을 그렇게 합니까?”
“예?”
숨을 들이켠 조국진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KTX 차창 밖 풍경처럼 달려 지나갔다. 그러나 조국진 또한 대장 출신 군인이다. 심호흡을 한 조국진이 배에 힘을 주고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방금 세상일보 편집국장한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윤정기가 별 셋짜리 군단장이었을 때 조국진은 휘하 사단장이었다. 그때가 떠오른 조국진의 귀에 윤정기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언제부터 북한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까? 더구나 국정원이 말요.”
일간지 편집국장쯤 되면 보통 사람들보다 신발 문수가 크다고 봐야 한다. 지금 임승근과 윤기철은 베이징 시내의 아파트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방 3개에 각각 욕실이 달린 데다 응접실이 두 개나 되는 100평형이었다. 이곳은 한국 대동자동차 현지법인의 중역용 빌라다. 본사의 중역들이 출장 왔을 때 머무르는 숙소인 것이다. 세상일보 편집장 박동식이 대동자동차 현지법인 사장한테 직접 연락을 해서 이제 둘의 숙소가 됐다. 한국 국정원이라면 모를까 북한 탈북자 체포조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2차 원고 보냈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응접실로 나온 임승근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지친 표정이다.
“편집국장은 나한테 그만 들어오라는데.”
윤기철은 외면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를 빼어 문 임승근이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 반이다. 정순미가 끌려간 지 만 하루가 지났다.
“내일 신문에 기사가 나갈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임승근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사가 나가면 국정원은 박살이 날 테니까, 그러면….”
정권이 타격을 받는 것이다. 지금 사건을 위임받은 세상일보는 정보 자료를 잔뜩 움켜쥐고 정부와 거래를 한다. 아직 인권위원회나 정치권에는 정보를 주지 않았다. 정부 측에서 강력하게 만류했기 때문이다.
“난 남을 거야.”
이윽고 윤기철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좆같은 나라에는 안 가.”
그러자 임승근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내가 그 이야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김태영이 버럭 소리쳤지만 오병환은 외면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톈진(天津)의 민가 안이다. 바닷가여서 바람결에 물비린내가 맡아졌다. 마당 끝에 선 김태영이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일곱 번이나 켜고 나서 겨우 불을 붙였다. 진정하려고 담배를 물었다가 더 열이 오른 셈이 되었다.
오전 11시 반, 톈진에 도착한 지 하루하고 반나절이 더 지났다. 그런데 어제 오후부터 상부 지시가 뚝 끊긴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후 3시에 내일 톈진항에서 출항 예정인 화물선 청진호를 타라는 지시까지 받았다가 그 30분 후에 ‘보류’된 것이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본부에서 연락이 없다. 마지막 명령이 “‘보류’하고 ‘대기’하라”는 것이었으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담배 연기를 한숨과 함께 뱉은 김태영이 혼잣소리를 했다.
“데려갈 필요 없이 여기서 묻어버리라는 거 아녀?”
오병환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힐끗 건물 쪽을 보았다. 건물 지하실에는 정순미가 갇혀 있는데 만 이틀이 지났지만 음식을 먹지 않는다. 다리뼈에 금이 가서 우선 임시로 판자를 묶어 고정했다. 그러나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곧 죽을 목숨인 것이다. 그때 건물에서 사내 하나가 서둘러 나왔다. 손에 무선전화기를 쥐고 있었으므로 둘은 긴장했다. 연락용 무선 전화기다.
“참모장 동지입니다.”
“뭐?”
놀란 김태영이 손에 든 담배를 내던지고 전화기를 받았다. 8군단 참모장 최기태는 탈북자 체포조의 최고 사령관이다. 김태영은 연초 한 번 인사를 했을 뿐 전화 통화도 한 적이 없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김태영이 부동자세로 섰다.
“예, 참모장 동지.”
“김태영 동무인가?”
걸걸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예, 참모장 동지.”
“정순미를 풀어줘.”
“예?”
“정순미를 호텔 방까지 데려다 놓고 돌아오란 말야!”
최기태가 꾸짖듯이 소리쳤다.
“뭐해! 서둘러!”
로비 앞쪽이 탁 트여서 주변 경관이 거침없이 펼쳐졌다. 절경이다. 오후 3시 무렵, 오늘은 일찍 돌아온 김유림이 로비 끝쪽 의자에 앉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이곳은 윈난성 다리(大理) 교외의 민박집 안이다. 다리는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악도시인데 해발 1900m의 고지대여서 기온도 알맞다.
파스텔 톤 얇은 코트가 잘 어울리는 김유림은 한눈에 봐도 미인이다. 키가 170㎝쯤 되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적당한 길이의 생머리가 매력적이다. 방송 드라마 작가인 김유림은 얼마 전 20부작 미니시리즈를 털고 이곳에 왔다. 김유림의 귀에 꿈속처럼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올라가신 분, 오빠하고 친하다면서 숙박비 깎아달라는데요?”
주인여자다. 김유림과 비슷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인여자는 맑고 밝은 인상이다. 웃음 띤 얼굴이 더 아름다운 얼굴, 그때 주인 남자가 대답했다.
“응. 깎아줘.”
큰 키에 굵은 선의 용모, 눈빛이 깊은 호남형이다. 김유림은 남자를 본 후에야 두 부부를 시기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 젊은 한국인 부부가 어떻게 이곳 윈난성 다리까지 와서 민박집을 차리게 됐을까? 김유림이 다시 까물까물 잠에 빠져들 무렵 뒤쪽에서 여자가 물었다. 목소리가 맑은 대기 속으로 울려나간다.
“얼마 깎아줘요?”
“20퍼센트만.”
“참 그분 이름도 안 적었는데. 이름이 뭐죠?”
“박도영.”
“자꾸 날 보고 웃어서 민망했어요. 뭐 하시는 분예요?”
“어, 그냥, 소공동 사무실에서….”
얼버무린 주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여명이는 자?”
“네 자요.”
그렇구나, 세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이름이 여명이구나. 민박집 이름도 여명(黎明)이고. 김유림은 다시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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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근이라고, 윤기철의 고등학교 선배가 거기 있습니다.”
숨을 들이켠 박도영에게 이인수가 말을 이었다.
“윤기철이 휴가 나왔을 때 자주 만나던 놈이죠. 혹시나 해서 체크해보았더니 윤기철이 중국으로 떠난 다음 날 옌지로 갔습니다.”
“…”
“옌지에 알아보니까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했습니다. 윤기철하고 놈이 같이 있는 겁니다.”
“…”
“그런데 임승근이 ‘주간세상’ 기자입니다.”
눈을 치켜뜬 이인수가 박도영을 보았다. 박도영이 이인수의 시선을 받았지만 눈동자의 초점이 멀다. 윤기철의 주변을 체크해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른바 ‘연락원’ 업무를 시작했을 때부터 윤기철은 보호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박도영이 물었다.
“그 자료, 어디에 있지?”
“무슨 자료 말입니까?”
“임승근.”
“파일에 있습니다만.”
“시발.”
불쑥 욕설을 뱉은 박도영이 시선을 내리고 먹다 만 순대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이인수도 같이 그것을 본다.
베이징까지 두 시간 남았다는 차내 방송이 끝났을 때는 오후 1시 반, 한국 시간으로는 2시 반이 됐을 때다.
“나, 화장실.”
둘에게 말한 임승근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고 나왔을 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다. 꺼내 보았더니 모르는 번호다. 객실 밖 휴게실에 서서 잠깐 망설이던 임승근이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아, 주간세상의 임승근 기자시죠?”
차분한 사내 목소리, 임승근은 숨을 들이켰다. 기사 제보나 관공서에서 연락을 해왔을 수도 있다.
“네, 전데요.”
“오해하지 마시고 들으세요.”
난데없는 말에 임승근이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이곳은 특실 휴게실이어서 뒤쪽에 중국인 남녀가 딱 붙어서서 소곤대고 있을 뿐이다. 임승근이 물었다.
“누구십니까?”
“예, 윤기철 씨 잘 아는 사람인데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든 임승근이 숨을 죽였을 때 사내가 말을 이었다.
“지금 윤기철 씨하고 같이 계시죠?”
“아니, 도대체.”
그래놓고 임승근이 호흡을 가누었다. 상대는 국정원이다. 어설픈 대처는 통하지 않는다. 기자 근성이 발동된 임승근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국정원이 하는 일이 고작 이따위인가요? 그래, 북한 시다바리 노릇이나 한다 이거죠? 윤기철이까지 다 넘기겠단 말이죠? 둘을 제물로 내놓고 남북 정상회담 할 겁니까?”
임승근이 쏟아 붓듯 말하는 동안 상대방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임승근이 말을 끊었을 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임 기자님, 그 전화 사용하지 마시고 중국에서 휴대전화 하나 사세요. 그것이 낫습니다. 안 되면 공중전화를 하시고.”
숨을 삼킨 임승근의 귀에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섯 시간 후에 이 전화로 연락하세요. 내가 누군지는 아직 밝히지 못하지만 세 분을 도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러고는 사내가 휴대전화 번호를 불러주었다. 임승근이 서둘러 번호를 손바닥에 적으면서 복불복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듣고 나중에 판단하자. 전화기를 버리라고 한 것은 좀 믿을 만하다.
“한국에 가면 장학금을 준다면서요?”
정순미가 불쑥 물었으므로 윤기철의 심장이 뜨끔했다.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다. 요즘은 한국 TV 드라마를 북한 가정에서 비디오로 보는 상황이다. 휴대전화는 또 어떻고?
“그럼.”
임승근의 빈 자리에 시선을 준 윤기철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집도 줘, 임대주택이지만 그리고 취업도 시켜줄걸?”
“임대주택이라뇨?”
“말 그대로 임대해주는 거지, 하지만.”
정순미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정색했다.
“그건 걱정을 안 해도 돼. 내가 있으니까.”
“폐 끼치기 싫어요.”
“나하고 사는 게 싫어?”
“아뇨, 그게 아니라….”
정순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도 일할 수 있다고요. 어떤 일이든.”
“알았어.”
윤기철이 정순미의 손을 쥐었다.
“그럼 나하고 같이 한국 가는 거지?”
잠깐 열차의 소음이 들렸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마침내 머리를 끄덕였다.
“갈 데도 없는걸요, 뭐.”
“뭐, 그따위 말이 다 있냐?”
이맛살을 찌푸린 윤기철이 정순미의 손을 당겼다.
“갈 데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나하고 같이 간다는 거 아냐?”
“아녜요.”
머리까지 내저은 정순미가 눈을 흘겼다.
“같이 간다고요, 괜히.”
그때 임승근이 다가왔으므로 윤기철이 손을 놓았고 정순미는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것을 본 임승근이 한마디할 만도 한데 잠자코 앞자리에 앉는다.
건물 밖으로 나온 한정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곧 발을 떼었다. 오후 5시 10분, 한정철이 사무실 건물에서 50m쯤 떨어진 유료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자 주차돼 있던 검은색 밴이 라이트를 깜박였다. 입맛을 다신 한정철이 밴으로 다가갔을 때 곧 안에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한정철이 앉기도 전에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안에는 운전사까지 두 사내가 타고 있었는데 뒤쪽에 앉은 사내가 대답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글쎄, 상황실에서 말 못한다는 이야기가 뭐야?”
자리에 털썩 앉은 한정철이 사내를 보았다. 그때 사내가 작게 입맛을 다셨다. 한정철의 보좌 역할인 요원이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옌지로 출국한 한국인 관광객을 체크했습니다. 어제 둔화역에서 셋이 발견된 시점에서 5일 전부터 출국자를 조사했더니….”
요원이 노트북의 키를 두드리자 모니터에 인물이 떴다. 바로 임승근이다.
“임승근, 윤기철의 고등학교 선배로 주간세상 기자입니다. 이놈이 윤기철이 출국한 다음 날 옌지로 갔습니다.”
이제 한정철은 숨을 죽이고 임승근을 노려본다. 요원의 말이 차 안을 울렸다.
“호텔을 체크했더니 동양호텔 일반실에 투숙했다가 특실로 옮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 체크아웃을 하고 셋이 둔화로 간 것 같습니다.”
“그, 그렇구먼….”
한정철의 시선을 받은 요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예, 특실은 방이 두 개로 셋이 충분히 잡니다.”
팔짱을 낀 한정철이 화면에 떠 있는 임승근을 노려보았다.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날지는 몰라도 한정철의 상황 처리 능력은 지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머리가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때 요원이 한숨을 내쉬더니 한정철을 보았다.
“특보님, 그것보다도.”
“…”
“제가 특보님을 이곳에서 뵙자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
정신이 든 한정철이 입을 쩍 벌렸다. 아, 뒤에 ‘참’을 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요원이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임승근은 윤기철과 이번 일을 사전에 모의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관리팀이 먼저 파악해서 보고해야 정상이죠.”
요원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관리팀이 윤기철의 보호 감시를 안 했을 리가 없거든요.”
한정철이 바보처럼 눈만 깜박였고 그것을 본 요원이 외면한 채 말했다.
“그래서 제가 윤기철 보호 감시 보고서를 체크했지요.”
“…”
“그랬더니 윤기철은 서울에 나올 때마다 임승근을 만났습니다.”
“…”
“윤기철이 옌지로 출국하기 전에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둘이 미리 계획을….”
이제는 요원이 시선만 주었고 한정철이 혼잣말을 잇는다.
“이것들이 치밀하게 계획을 짰군. 이건 계획탈북이야. 셋이 팀을 만들어서….”
“특보님.”
다시 요원이 불렀으므로 한정철이 시선을 주었다. 자꾸 부르니까 짜증이 난 표정이다. 그때 요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윤기철 관리팀은 저보다 먼저 임승근을 파악해야 정상 아닙니까?”
그 순간 한정철이 숨을 들이켰다. 두 눈이 치켜떠졌고 눈동자의 초점이 멀어졌다.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비로소 한정철은 요원이 상황실을 놔두고 밖에서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알았다. 정치적 감각은 특출한 한정철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쟁에 갓 나온 신병처럼 허둥대기만 한다.
오후 4시 반, 방으로 들어선 임승근이 가방을 윤기철 앞에 내려놓았다. 묵직하게 보이는 헝겊 가방이다.
“15만 원이다.”
원으로 발음했지만 위안이다. 한국 돈으로는 3000만 원 가까이 된다. 임승근이 은행에 가서 찾아온 것이다. 대신 윤기철은 4700만 원이 입금된 제 통장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임승근에게 적어주었다. 이곳은 베이징 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다. 근처에 배낭여행자를 위한 민박집이 많았는데 옆방에도 한 무리의 한국 남녀가 모여들어 떠들썩했다.
“여기서 윈난성으로 가는 애들을 찾아서 끼어드는 거야.”
벽에 등을 붙이고 앉은 임승근이 정순미와 윤기철을 번갈아 보았다.
“윈난성에 가면 태국이나 라오스로 안내하는 탈북자 안내원을 만날 수 있겠지.”
“잠깐만 형.”
자리에서 일어선 윤기철이 임승근에게 말했다.
“나하고 이야기 좀 해.”
“그러지.”
따라 일어선 임승근이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정순미에게 가방을 눈으로 가리켜 보았다.
“제수씨, 돈 가방 잘 챙기쇼. 그걸로 빠져나가냐 할 테니까.”
방은 4인실이어서 2층 침대가 양쪽 벽에 붙은 구조였는데 셋은 4인실을 쓰기로 하고 이틀치 숙박비를 냈다. 배낭여행자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여권 보자고도 안 한다. 그래서 숙박부에 가명으로 한국 이름을 썼다. 복도 끝으로 다가간 둘은 2층 난간에 기대서서 앞쪽 건물을 보았다. 사방이 건물로 딱 막혀 있었고 소음이 심하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까지 들린다. 윤기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임승근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전화를 한 사람이 국정원 요원 같아.”
“누구?”
담배를 빼 물면서 임승근이 물었다. 중국산 담배다.
“국정원 요원이? 그럼 국가를 배신한 꼴이 되게?”
“그게 아니지, 나름대로 생각이 다를 뿐이지 국가를 배신했다고는….”
“야, 꿈꾸지 마라.”
담배 연기를 앞쪽에 대고 길게 뿜은 임승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앞쪽 베란다에서 여자 하나가 이쪽을 빤히 보다가 돌아갔다. 직선거리로 5m도 되지 않아서 말도 들린다. 둘의 바로 밑에는 사람 셋이 나란히 다닐 수 있을 만한 골목이다. 임승근이 옆집 창문을 힐끗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발각되리라고 예상은 했어. 그 새끼들이 네가 서울 나오면 누구 만나는 거 체크 안 했겠냐?”
“형, 그 전번 이리 줘.”
윤기철이 손을 내밀자 임승근은 담배를 골목으로 떨어뜨리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전화 해보게.”
“뭣 때문에?”
“글쎄, 누구인지는 알아야겠어.”
“얀마, 나 대포폰 안 샀어.”
“공중전화 부스에서 할 테니까.”
아직도 윤기철이 손을 내밀고 있었으므로 임승근이 입맛을 다셨다.
“여권 체크를 하지 않는 민박집을 중점적으로 수색해.”
식당 앞에 선 김태영이 둘러선 부하들에게 말했다.
“자, 시작해라.”
부하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는데 모두 배낭여행자 차림이다. 목에 카메라를 걸었고 후줄근한 등산복 차림이다. 모자를 썼다. 오후 5시 20분, 김태영은 베이징역 건너편 식당 앞에 서 있다. 지린에서 비행기로 베이징에 온 것이다.
“아직까지 임승근 여권을 쓰고 있다면 중국땅 어느 곳에서든 잡힐 텐데요.”
오병환이 다가서서 말했으므로 김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셋이 둔화역에서 열차를 탔다면 종착역은 베이징이다. 베이징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베이징에서는 사통팔달, 어느 곳으로건 가장 빠른 코스를 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병환이 휴대전화로 보고를 받더니 김태영에게 중계했다.
“사장님, 아래쪽 민박 지역에 2개조가 투입되었습니다.”
“그놈들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야, 우리가 비행기 타고 오는 바람에 열 몇 시간을 번 셈이다.”
발을 떼면서 김태영이 말을 이었다.
“셋이 같이 다니니까 찾기 쉬울 거다. 남자 둘, 여자 하나.”
“남조선에서 협조를 잘해주는군요.”
옆에 붙어 선 오병환이 말을 이었다.
“임승근이란 놈이 기자라면 탈북 취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윤기철이 학교 선배라는 거다. 서울에서부터 같이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른다고 하는군.”
“개새끼들입니다.”
둘은 아래쪽 민박 지역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주변에 벌써 등산복 차림의 여행자가 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본 김태영이 혼잣말을 했다.
“한국놈들은 다 윤기철이나 임승근처럼 보이는군.”
공중전화 부스에 선 윤기철이 부스 밖을 지나는 두 사내를 보았다. 부스를 가로막듯이 선 서양인 배낭족 서너 명 때문에 두 사내는 이쪽을 보지 못했다. 둘은 한눈에 봐도 한국 여행자들이다. 고급스러운 배낭을 멨고 금방 산 것 같은 등산복을 입었는데 둘이 똑같은 선글라스를 꼈다. 그것이 마치 배우가 분장을 성의 없이 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몇 초쯤 더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고서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그 순간 윤기철은 숨을 들이켰다. 박도영이다. 부풀렸던 어깨를 내린 윤기철이 말했다.
“접니다. 전화하라고 했다면서요?”
“아.”
짧은 탄성이 울리더니 박도영이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지금 셋이 같이 있으면 흩어져요. 셋이 모두 수배 상태가 돼 있습니다.”
윤기철은 어금니만 물었고 박도영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이거, 위험한데 앞으로 전화 못 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조언하겠는데, 듣습니까?”
“네, 듣고 있어요.”
“라오스로 들어가서 태국으로 나와요. 그 루트가 요즘은 낫습니다.”
“…”
“듣고 있어요?”
“네.”
“미안합니다.”
“왜요?”
윤기철이 물었더니 박도영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났다.
“도와주지 못해서요.”
그러고는 둘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음이 급한 윤기철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럼, 끊을게요.”
민박 지역 입구로 들어섰던 오병환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귀에 붙였다. 그러고는 몇 번 대답을 하더니 머리를 돌려 김태영을 보았다.
“놈들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오병환이 말을 이었다.
“좌표가 이곳입니다. 이곳에서 서울로 통화를 했습니다.”
김태영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골목으로 들어서던 윤기철이 주춤 걸음을 멈추고는 사람들 사이로 앞쪽을 보았다. 오후 5시 45분,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슬슬 여행자들이 숙소로 모이는 시간이어서 골목에도 오가는 행인이 많다. 골목 좌우에 각각 민박집이 마주 보는 위치에 세워졌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윤기철의 숙소다.
그런데 좌우 민박집 앞에 서 있는 두 사내가 이상하게 보였다. 둘 다 등산복 차림의 여행자 행색인데 뭔가 어색하다. 마치 논의 벼 사이에 솟아난 잡초 같다. 둘을 스치고 지나는 행인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므로 윤기철은 그냥 가기로 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거리가 10m 정도에서 7m, 5m로 가까워졌을 때 왼쪽 사내가 힐끗 이쪽을 보았다. 그러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간다. 윤기철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데다 모자까지 눌러쓴 차림이다. 윤기철은 곧 둘을 스치고 지나면서 옆쪽 민박집을 보았다. 사내 둘이 현관 앞에서 여행자 하나의 신분증을 보고 있다. 놈들이다. 저절로 숨이 들이켜졌고 행인이 옆을 지나다가 옷만 건드렸는데도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다행히 골목 안은 오가는 행인이 많다. 오른쪽으로 꺾어 걸음을 옮긴 윤기철이 숙소의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계단을 뛰어올랐다. 계단을 내려오던 여자와 부딪쳤지만 사과할 정신이 없다.
“나와!”
문을 연 윤기철이 낮게 소리치자 방안에 있던 임승근과 정순미가 화들짝 놀랐다. 침대 끝에 앉아 있던 정순미는 벌떡 일어섰고 배낭을 정리하던 임승근이 눈을 치켜떴다.
“놈들이 민박집을 수색해! 바로 옆집에 왔어!”
배낭을 집어 든 윤기철이 정순미의 팔을 잡았다.
“빨리 배낭을!”
그때 임승근이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순미가 배낭을 다 꾸렸을 때는 2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때 임승근이 뛰어들어왔다. 얼굴이 굳어져 있다.
“놈들이 왔다! 2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야 돼!”
2층 베란다 밑은 골목인 것이다. 민박집 입구는 골목 오른쪽이어서 보이지 않는다. 셋은 복도를 나왔다. 복도를 오가던 투숙객들이 셋을 힐끗거렸지만 대부분이 한국인 여행자다. 뛰어가는 셋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2층 복도 끝 베란다로 나온 셋은 먼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행인들이 오가는 골목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것을 본 윤기철의 가슴이 미어졌다. 옆에 선 정순미의 하얗게 굳은 모습과 대조됐기 때문이다.
“자, 내가 먼저 뛸게, 이렇게.”
임승근이 베란다 난간을 잡고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서둘러, 날 따라 해요, 제수씨.”
임승근의 운동신경은 뛰어났다. 임승근이 곧 난간 끝을 쥐더니 몸을 허공에 띄웠다. 그러자 땅바닥과의 거리가 2m쯤으로 좁혀졌다. 그 순간 임승근이 손을 놓았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몸을 틀면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고 일어서는 낙법 자세를 취하며 임승근이 곧 일어섰다. 지나던 행인이 놀라 멈춰 섰다가 다시 발을 떼었고 서너 명은 멈춰 서서 2층을 본다. 그때 윤기철이 정순미의 팔을 쥐었다.
“자, 어서.”
정순미가 난간을 움켜쥐었을 때 윤기철이 몸을 안아 밖으로 내놓았다. 정순미의 손이 떨린다.
“내가 받을게 걱정 말고!”
밑에서 임승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때 정순미가 난간 끝을 잡더니 다리를 떨어뜨리고 다음 순간 밑으로 떨어졌다.
“아앗!”
놀란 윤기철이 낮게 소리쳤을 때 뒤쪽에서 외침이 울렸다. 한국말이다.
“저기 있다!”
머리를 돌린 윤기철은 복도로 달려오는 두 사내를 보았다. 다음 순간 윤기철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놓고는 4m 높이의 2층에서 뛰어내렸다. 떨어지면서 앞쪽 건물의 벽을 발로 차고 그 반동으로 다시 이쪽 여관의 벽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비스듬히 떨어졌지만 낙법 자세로 땅바닥을 치고 일어섰다.
“와아!”
구경꾼 중 남자 두어 명이 놀라워하며 탄성을 뱉었을 때 위쪽 베란다에서 두 사내가 소리쳤다.
“저놈들 잡아라!”
윤기철은 10m쯤 앞에서 뛰어가는 임승근과 정순미를 보았다. 둘 다 이쪽을 힐끗거렸는데 정순미가 다리를 절름거린다.
“저놈들 잡아라!”
다시 두 놈이 악을 썼고 윤기철은 곧 임승근과 정순미를 따라잡았다.
그러나 큰길로 나왔을 때 윤기철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뒤에서 사내들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큰길에는 행인이 많다. 저녁 무렵이어서 여행자들이 모두 돌아오는 중이다. 셋은 사람들을 헤치며 달렸지만 정순미가 다리를 절었다. 뛰어내리면서 다친 것 같다. 이제 뒤를 쫓는 사내들은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잡을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발!”
마침내 윤기철이 악을 쓰듯 말했다. 뒤쪽과 거리가 10m쯤으로 좁혀졌을 때다.
“내가 막을 테니까! 형! 순미 부탁해!”
버럭 소리친 윤기철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안돼요! 나도 같이 있을 테야!”
정순미의 날카로운 외침이 거리를 울렸다.
“가! 어서!”
눈을 치켜뜬 윤기철이 이제는 사내들을 향해 돌진했다.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무서운 기세다. 사내들은 여섯, 예상하지 못한 윤기철의 반격에 사내들이 주춤했고 그 순간 윤기철의 주먹이 날아갔다. 앞장선 사내의 얼굴을 치고 두 번째 사내의 사타구니를 발끝으로 차 올렸을 때 옆에서 외침이 울렸다.
“시발! 같이 죽자! 순미더러 도망치라고 했어!”
임승근이다. 둘이 여섯을 상대로 치고받는 바람에 거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2분쯤 지났을 때 사내 셋이 쓰러졌고 셋이 남았다. 윤기철은 입술이 터졌고 임승근은 옷소매 한쪽이 떨어졌다.
“형! 순미한테 가!”
셋을 향해 돌진하면서 윤기철이 악을 썼다. 정순미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구경꾼들에 둘러싸인 채 둘은 거리 한복판에서 날뛰었다. 갑자기 사내들이 주춤했다. 구경꾼들을 헤치고 공안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뛰자!”
임승근이 소리치며 반대쪽으로 뛰었고 윤기철이 뒤를 따른다. 사내들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더니 공안의 외침 소리에 옆으로 흩어졌다. 윤기철은 정신없이 달리면서 소리쳤다.
“순미야!”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지만 윤기철이 다시 소리쳤다.
“순미야! 어디 있냐!”
“끌려갔어요.”
큰길가의 한국인 전용 민박집 주인 김숙자 씨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아가씨가 울면서 끌려갔는데 못 보겠더라고요.”
“제가 일행입니다. 관광객인데요.”
이를 악문 윤기철이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오후 7시 10분, 윤기철은 현장에서 세 구간 떨어진 골목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한다. 옆에 선 임승근이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골목 안은 인기척이 없다.
“어디로 끌려갔는지는 모르세요?”
“그건 모르죠.”
김숙자 씨가 혀를 찼다.
“남자들이 무지막지하더라고요. 말 한마디 없이 서넛이 여자를 떠메고 가는데 누가 말릴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
“그, 싸우던 남자들, 그 사람들하고도 일행이세요? 아니면….”
김숙자 씨가 관심을 보였으므로 윤기철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전화기를 내려놓은 윤기철이 부스를 나오자 임승근이 눈으로 물었다.
“데려갔어.”
외면한 채 윤기철이 말하자 임승근도 외면했다. 지금까지 근처 민박집, 식당 여섯 곳에 전화를 했고 세 집에서 정순미를 데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원체 소란이 컸기 때문에 다 나와서 구경한 모양이다.
“아, 시발,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어?”
윤기철이 불쑥 말하는 바람에 임승근이 머리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윤기철의 두 눈이 번들거린다.
“이거, 누구한테 분을 풀어야지? 응?”
임승근은 눈만 깜박였고 윤기철의 목소리가 골목 안에 퍼졌다.
“형, 우리 꼴 좀 봐.”
임승근이 저도 모르게 제 몸을, 그리고 윤기철의 행색을 보았다. 영락없는 떠돌이 거지다. 머리를 든 임승근이 윤기철을 보았다. 눈동자의 초점이 점점 뚜렷해졌다.
“어, 무슨 일이냐?”
박동식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밤 10시 반, 보통 사람들은 이 시간에 전화를 받으면 놀라지만, 박동식 같은 부류는 활기를 띤다. 대부분이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박동식의 분위기가 그렇다. 무뚝뚝한 목소리는 천성이고.
“부장님, 저, 중국에 있습니다.”
임승근이 말하자 박동식이 잘랐다.
“자, 서론 빼고 본론.”
박동식은 주간세상의 모(母)회사인 세상일보 사회부장이다. 임승근이 처음 세상일보에 입사했을 때 정치부 고참으로 있으면서 철저하게 교육을 시킨 바 있다. 그때 임승근이 말했다.
“제가 쓰려던 기사를 부장님이 맡으시죠. 제가 사건 속에 휩쓸린 바람에 등장인물이 돼버렸습니다.”
“뭔 소리여?”
박동식이 휴대전화를 고쳐 쥐었다. 감(感)을 잡은 것이다.
심호흡을 한 윤기철이 송수화기를 귀에 붙였다. 이건 공중전화 부스의 전화기다.
“간단하게 말하겠는데.”
윤기철이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이 개새끼야, 국민 팔아서 잘 먹고 잘살아라 시발놈아.”
“아니, 윤형.”
수화구에서 박도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요?”
“네가 몰라서 물어? 더러운 놈아.”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이번 통화도 추적하겠지? 네놈하고 통화하고 나서 바로 놈들이 덮쳐왔어! 정순미가 끌려갔다! 이제 시원하냐!”
“…”
“난 못 잡았어, 힘들 거다.”
“윤형, 그러면….”
“그놈들이 정순미를 데려갔어! 너하고 통화 끝나자마자! 이 시발놈아!”
그러고는 윤기철이 잇새로 말했다.
“난 내 나라한테 배신당했어.”
전화기를 내려놓은 윤기철이 길가에 대기시킨 택시에 올랐다. 추적하기 힘들 것이다.
오전 9시 반, 국정원 대변인 김현이 전화를 받는다. 상대는 세상일보 사회부장 박동식, 안면이 있는 사이다.
“아니, 웬일이십니까? 아침부터?”
나이는 김현이 다섯 살 위인 마흔아홉이지만 기자는 대통령과 맞먹는다는 긍지를 가졌다. 말 놓았다가 경을 칠 수가 있다. 그때 박동식이 바쁜 듯 말했다.
“확인차 전화드립니다. 개성공단 용성 현지법인 과장 윤기철이 국정원 연락원 임무를 수행하다가 북한 측 연락원인 정순미의 탈북을 도우려고 지금 중국에 있습니다.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