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세 노인이 홀로 오지에서 비박을 하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해외로 캠핑을 다닌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우리나라 오토캠핑 창시자이자 모험가에다 칼럼니스트, 카운슬러라니, 나이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 아닌가.
- 최근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부제 : 백 년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를 펴낸 박상설 씨의 독특한 행복론 강의.
거침없는 언변에 슬그머니 진땀이 흘렀다. 괴짜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일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또랑또랑 힘 있는 목소리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노인 중에서도 고참인 그가 펼치는 노인 비판론에 아직 그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한 경험치로 감히 맞장구치거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도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인생관과 철학적 담론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론 대충 숲 속 어디에선가 움막 생활을 하며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비논리적인 이야기들을 소신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기인의 모습도 떠올랐다. 적어도 전문 캠핑 장비와 여행 관련 자료가 종류별로 갖춰진, 소박한 전시실 같은 그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가족 독립선언
“차는 갖고 오지 말아요. 서울서 전철 타면 20분인 거리를 왜 차를 타고 와?”
이른 아침, 그를 만나려고 인천으로 향했다. 이름은 박상설. 올해로 87세다.
우리네 노인의 삶은 대부분 외롭고 쓸쓸하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일을 할 만한 체력도 되지 않는다. 선뜻 알맞은 일자리를 주겠노라 나서는 곳도 없다. 누군가와 더불어 살고 싶지만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면당하고 밀려나니 결국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홀로 서기가 시작된다. 홀로 사는 노인의 삶이 점차 꺼져가는 촛불 모양으로 곤궁해지고 빛이 바래는 이유다.
그런데 박상설 씨는 정반대다. 30여 년 전, 그는 가족에게 일찌감치 독립을 선언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을 잘 살아보자”는 게 이유였다.
“잘 살아가자는 게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살자는 얘기는 아녜요. 생각해보세요. 장성하고 나서까지 제 부모 밑에서 독립하지 못하는 짐승은 없거든요. 어느 정도 홀로 서기가 가능해지면 각자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는데, 유독 사람만 효도한다 어쩐다 하면서 서로에게 얽매이고 간섭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효도라는 게 노인을 할 일 없게 만드는 거예요. 효도해라, 효도해라 하면서 자신이 할 일을 자꾸 자식한테 미루게 되거든요.”
자연으로 도망가다
그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고도 그 소식조차 가족에게 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며느리가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찾아와 지인에게 시아버지의 책을 선물하고 싶다며 사인을 받아갔으니 어쩌면 소식을 영 전하지 않은 건 아닐 수도 있겠다.
“난 언론 매체에 칼럼도 연재하고, e메일로 자체 소식지도 발송하니 굳이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서로가 잘 살아간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잖아요.”
그는 자신과 가족의 관계를 ‘실험가정’이라 불렀다. 서로의 삶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고 100% 각자의 생활을 보장하는 방식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나름의 확신에서 시작한 일이란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달픈 시절이 있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다닌 그는 졸업하자마자 6·25전쟁이 발발해 군에 입대해야 했다. 고학력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는 사병이 아닌 장교로, 대구의 육군본부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가족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가 부대 앞에서 나를 찾는다는 피켓을 들고 서 계시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가족 모두 무사히 피난을 내려왔더군요. 그때부터 제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에 여동생 다섯, 누님 한 분이 계셨죠. 스물일곱에 결혼해 아들딸까지 생기니 서른 살엔 부양가족이 자그마치 11명으로 늘었습니다. 당시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깡패가 되던가 도둑놈이 되던가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난 이도저도 싫어 부업까지 해가며 지겹도록 일만 했어요. 솔직히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모두가 못 먹고 못살던 시절, 아무리 능력 좋은 가장이라 해도 전쟁 끝에 11명의 식구를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앞만 보고 달리던 그는 어디서라도 숨통 틔울 구멍을 찾고 싶어 자연을 찾았다.
“다른 사람은 힘이 들 때 도망가느라고 술 마시고 엉뚱한 짓들을 하고 그랬는데, 난 술이라곤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거든요. 다방에도 안 다녔어요. 성격에도 안 맞고, 좋지도 않았던 거죠. 그런데 땅에 씨 뿌려서 싹 틔우고 키우는 재미는 아주 좋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으로 도망가는 길을 택했어요. 남들 술 마시고 다방 가는 돈으로 난 가평군에 땅을 샀어요. 한 평에 5원인가 할 땐데, 30만 평을 산 게지. 도망가려고. 아마 우리나라 노인네 중 내가 제일 운이 좋을 거예요.”
그 땅이 근 50년 세월 동안 그가 운영 중인 주말농장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될 즈음 가족에게 자신이 생각하던 ‘실험가정’의 모델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걸으면 낫는 병
그가 살아온 얘기를 술술 풀어놓는 사이, 가스레인지 위 주전자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었다. 캠핑할 때 즐겨 마시는 방식이라며 손잡이 달린 캠핑용 커피잔에 커피 티백을 걸쳐놓고 김이 뽀얗게 올라오는 물을 따라 흑사탕과 함께 건넸다.
“이게 내가 야외에서 커피 마시는 방식이에요. 이렇게 물을 부어도 커피가 금방 우러나진 않아요. 오랫동안 천천히 얘기하라고 그러는 거겠지. 천천히 우러난 커피를 흑사탕이랑 같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어요.”
그가 권하는 대로 달달하고 구수한 흑사탕 한 알을 입안에 까 넣은 다음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근사한 맛이었다. 아, 요즘처럼 쌀쌀한 늦가을 숲 속에서 이런 커피 한 잔 마시면 세상 근심걱정 다 잊은 듯 행복해지겠다 싶었다. 그가 책 한 권에 걸쳐 펼쳐놓은 자연예찬론에 한결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공대를 나와 오랫동안 엔지니어로 일했고, 그런 쪽엔 재주도 없었거든요. 학교나 직장 다닐 때 쓴 글이라고 해봤자 논문이며 공문, 보고서 같은 것들이었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내가 자연에서 뒹구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싶더라고요. 자연을 벗 삼아 살아온 덕분에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니 그 얘기도 해줘야 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자연과 만난 이야기를 한 10년 동안 꾸준히 써내려 가다보니 그게 책이 됐어요.
난 아직도 미사여구 같은 건 붙일 줄 몰라요. 그렇게 쓰려고도 해봤는데 그러니까 자꾸 유치해지고 글이 조작되더라고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주어와 술어만 넣고 나머지 형용사와 부사는 자연을 끼워 넣는 거라고 생각하며 씁니다. 잘 쓰려고 애쓰면 엉뚱한 얘기가 나오거든요.”
글을 잘 쓸 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는 2001년 ‘동아일보’가 주관한 투병문학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문필가다. 10년째 ‘나침반’이라는 칼럼 형식의 소식지도 e메일로 연재 중이다. ‘나침반’은 그가 운영하는 캠프나비(campnabe)라는 동호회 회원에게 뿌려지고,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매료된 지인들에게도 보내진다. 한 언론 매체엔 ‘박상설의 자연 속으로’라는 제목으로 고정 칼럼도 연재한다.
그가 이처럼 본격적으로 자연예찬론을 펼치는 캠핑족이 된 건 27년 전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커다란 사건을 만나면서부터다. 건설교통부를 거쳐 한 건설업체의 중역으로 일하던 그는 61세 되던 해, 갑작스러운 병마로 쓰러져 기나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3년 동안이나 병명을 알지 못해 병원을 전전하던 그는 급기야 미국으로까지 건너가서야 ‘뇌간동맥경색’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던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아스피린과 운동 두 가지였다.
“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더라고요. 아, 이제 죽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평소 하고 싶었던 걸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혼자 외국 구경을 갔습니다. 때마침 88서울올림픽이 끝난 뒤라 우리나라에도 해외여행 바람이 불었거든요. 그때도 여관이나 호텔엔 묵지 않고 캠핑을 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용감하게 차부터 빌렸죠.”
배낭여행에 텐트 치고 생활할 거면서 왜 차를 빌렸느냐고 물었더니, 그럼 텐트까지 든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떻게 걸어 다니느냐고 되묻는다. 듣고 보니 그렇다. 자연이 좋아 자연을 찾아간 것이지 딱히 사서 고생을 하러 간 것도 아닌데 괜한 선입관 때문에 그의 여행에 멋대로 사족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첫날부터 죽을 고생이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안 죽더라고요. 분명 의사는 1년을 못 산다고 했는데 자꾸 증세가 호전되는 겁니다. 그래서 알았죠. 아, 내 병은 걸으면 되는 병이구나. 물론 지금도 어지럽고 힘이 들 때가 있어요. 완치가 안 되는 병이거든요. 그런데도 몸은 아프기 전보다 더 건강해졌어요.”
살림의 고수, 여행의 달인
그는 여느 캠핑족이 즐겨 먹는 인스턴트식품이나 통조림 음식엔 관심이 없다. 캠핑 다닐 때도 주식은 누룽지와 양파 두 가지 정도이고, 평소 식사도 직접 만든 음식으로 최대한 간소하게 먹는다. 건강을 위해 이것저것 과하게 챙겨먹는 게 되레 더 해롭다는 게 지론. 김치며 식혜도 직접 담가 먹는단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도 절대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툭하면 캠핑을 떠나는 자유인의 집인데도 어지간한 똑순이 주부가 아니고선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정갈하다. 서재에 가지런히 꽂힌 책이며 차곡차곡 분류돼 쌓인 자료들, 싱크대에 조르르 올려진 그릇과 컵은 여간 야무진 살림 솜씨가 아님을 보여준다. 방 한쪽에 줄을 세워둔 배낭은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당장 출발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장비를 캠핑 종류별로 채워둔 것들이다.
10월 경남 거창중앙고등학교에서 초청 강연에 나선 박상설 씨.
그렇게 훌쩍 캠핑을 떠날 때면 그는 오롯이 혼자다. 젊고 나이 듦을 떠나 차가운 공기 속에 홀로 있는 것이 쓸쓸하고 외로울 법도 한데 그는 그런 고독을 즐기는 게 좋아 나홀로 캠핑족이 됐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캠핑 가면 힘들다 피곤하다 하는데 왜 그런 줄 아세요? 놀 줄 모르니까 그런 겁니다. 차에다 짐 잔뜩 싣고 가족 전부 데려가서 삼겹살 굽고 연기 피우며 노는 게 캠핑인 줄 잘못 알고 있다, 이 말입니다. 비싼 장비만 경쟁적으로 갖춰놓고 옆집이 가니 나도 가야 되는 게 캠핑인 줄 생각하잖아요. 등산도 마찬가집니다. 여럿이 무리 지어 가서는 산 밑에서 빈대떡에 막걸리 마시며 동료들 험담하고 가족 뒷얘기하는 게 등산이더란 말입니다. 진짜 캠핑을 즐기고픈 거라면 우르르 떼 지어 차를 세워놓고 고기 구울 게 아니라 호젓한 자연을 벗 삼아 책을 읽어야지요.”
그에게 인문학은 사람을 잘 놀 줄 알게 만드는 ‘문화’의 근간이자 자연과 사람, 문화를 잇는 중요한 가교다.
“문화가 대물림되는 걸 문화결정론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엔 과거 살롱 문화라는 게 있었어요. 50세 넘은 귀부인들은 시내에 혼자 나가지 않고 어린 처녀들과 반드시 동행했는데, 항상 인문학 책을 갖고 다녔답니다. 살롱에 앉아 자신이 읽은 책의 주제를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거죠. 그들은 그런 살롱 문화를 통해 고급 문화를 대물림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안타깝게도 그런 게 없어요.
고급 문화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밀실 문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외국에선 캠핑족도 텐트 안에서 조용히 책 보고 자연을 즐기거든요. 본래 캠핑이란 것이 우리처럼 이렇게 소란스럽게 지지고 볶고 하는 게 아닌데 우리에겐 그 문화가 잘못 전달된 겁니다.”
캠핑을 떠날 때면 박상설 씨는 오롯이 혼자만의 고독을 즐긴다.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을 잘 넘지 못했습니다. 산에만 가면 호랑이가 나온다, 귀신이 나온다 그랬으니까요. 유목민 사회가 아닌 농경사회이다보니 면 단위만 벗어나도 큰일이 나는 줄 알았죠. 자기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면 ‘환장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한 지역 안에서만 갇혀 살던 유전자가 아직도 우리 몸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즐기는 것, 자기가 사는 집을 벗어나 텐트를 치고 자연을 즐기는 것에 서툰 겁니다. 보고 배운 게 없으니까요. 나는 그런 유전자를 바꾸는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진짜 캠핑은 이런 것
그는 60세 때 카운슬러 자격증을 땄고, 64세에 히피가 됐으며, 77세엔 킬리만자로를 등반했다. 미국 서부 사막과 인도의 타르 사막, 로키산맥과 알래스카를 홀로 여행하면서 거지들과 동행하기도 하고, 무작정 히피와 어울려 그들의 여행길에 동참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가 쓴 글의 일부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샌프란시스코 중심가를 나는 배낭을 메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눈에 보아도 자유분방한 히피풍의 젊은이들을 가득 태운 낡은 버스 한 대가 신호대기에 멈춰 섰다. 순간 나는 버스 문을 마구 두들겨 올라탔다. 히피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박수로 나를 맞았다. 나는 히피가 됐다. 헐거운 대낮에 나의 신분이 바뀌었다. 그네들은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탐험여행을 하는 자유인들이었다. 바로 이거야!! 나는 무릎을 쳤다.
이 만화 같은 해프닝은 진짜 만화였다. 낡아빠진 만화 같은 스쿨버스를 여행버스로 개조한 것이다. 탐험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Green tortoise adventure travel Bus 다. 버스 안의 의자를 모두 걷어내고 매트리스를 깔았다. 매트리스를 들어 올리면 그 밑에 여행자의 짐을 보관할 수 있도록 공간 장치가 되어 있다. 짐 창고다. 식기, 버너, 취사도구와 식탁 등은 버스 지붕 위에 캐리어 안전장치로 단단히 묶여 있다.
얼마 전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학하는 외국인 학생들의 캠프에 강사로 초대됐다. 콘도를 빌려 행사를 진행할 테니 와 달라는 얘기에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약간의 사례비를 준비했다는 말에 그것도 필요 없다고 했다. 대신 자신의 주말농장에서 캠핑하며 먹고 자고 자연을 함께 느끼며 얘기하자는 게 수락 조건이었다.
“사람은 고생을 하고 혼이 나봐야 교육이 되는 건데, 편안하고 뜨뜻한 곳에 앉아서 무슨 자연을 배우고 느끼겠어요. 내 농장에 오면 자는 것에도 돈 안 들고 먹는 것에도 얼마 들지 않는 대신 물소리를 듣고 별도 보면서 카시오페아 자리가 어디 있고 북두칠성이 어디 있는지 얘기할 수 있는데 말이죠.”
경남 거창중앙고등학교에서 그에게 강연을 청했을 때도 그는 무작정 학교 마당에 텐트 치는 일부터 했다. 강연을 청한 선생님들은 당황했지만 아이들은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늦은 밤까지 텐트를 떠나지 않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을 통틀어 그만큼 신나게 잘 노는 사람도 드물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가 운영하는 강원 홍천군의 주말농장엔 평범한 회사원부터 학생, 최고경영자(CEO), 외국인까지 언제나 그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를 인생 멘토 삼아 카운슬링을 부탁하는 이도 적지 않다.
때론 가족이나 동료들끼리 농장에 가면 캠핑을 할 수 있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 무작정 찾아오는 이도 있다. 한 끼 밥값 2000원 정도면 밭에서 기른 유기농 채소로 배불리 식사를 마칠 수 있고,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걷고 밤하늘에 총총 박힌 별도 볼 수 있다. 그러다 하룻밤을 그와 보내고 나면 어느새 캠핑의 매력에 푹 빠지거나, 스스로 자그마한 주말농장을 마련하기 위해 터전을 잡기도 한다. 서로 영 소식을 전하지 않고 산다는 그의 손자도 그를 따라 주말농장을 마련했다. 그는 이를 새로운 문화의 대물림, 유전자의 변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