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평가에 죽고 산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싫다!

  •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2014-11-19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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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에게 평가는 ‘누가누가 잘했나, 참 잘했어요’가 아니라 ‘누가누가 못했나, 참 안됐어요’를 구분하는 절차로 비친다.
    • 그러니 평가를 통해 얻는 것은 없고, 뭔가를 잃는 사람만 생긴다. 이런 사회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가에 죽고 산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싫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름 앞둔 10월 28일 서울 이화여고 3학년 학생들이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다.

    또 다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시즌이 돌아왔다. 아니, 이 글이 ‘신동아’에 실려 읽히고 있을 때는 수능이라는 전국적 빅 이벤트를 또 한 번 치른 직후가 될 것이다. 매년 이때쯤 온 나라를 뒤집어놓는 한판 승부가 전국에서 펼쳐진다. 매년 약 60만 수험생과 그들의 120만 부모는 그 승부에 직접 뛰어드는 선수들이다. 수험생의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는 링 밖에서 응원을 하거나, 언제든지 뛰어들 준비가 된 후보 선수다.

    어찌 보면 매년 전국에 사는 최소 약 200만 명에서 최대 약 400만 명의 국민이 이날 하루의 승부를 위해 길게는 12년 동안 칼을 갈아왔다. 수험생의 가족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공교육과 사교육 시장, 학원가 식당들, 심지어 학원버스 기사들까지, 이 승부에 동원된 인원의 규모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수능 영어듣기 평가 시간에는 비행기 이착륙도 금지된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아마 전 세계의 많은 항공사가 이해하기도 힘든 이런 일이 매년 가능한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수능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그 의미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합당한지와 바람직한지를 떠나서, 그냥 단순히 객관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국민이 일생에서 몇 번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매년 국가가 운영하는 한판의 거대한 도박판과 유사해 보인다. 사람마다 목표로 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이왕이면 ‘SKY’와 같은 명문대 합격 대박을 꿈꾼다. 도박에서는 절대 돈을 딸 수 없는데도 마치 자신은 딸 수 있다는 비현실적 낙관주의에 빠져 베팅액을 키우는 도박중독자의 모습과, 누가 봐도 공부로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자녀가 명문대에 갈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 기대를 가지고 학원비를 내는 학부모의 모습에 큰 차이가 있을까.

    거대한 도박판

    수험생의 시험 당일 컨디션, 문제의 난이도와 유형, 시험장의 환경 등 수험생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운’또는 ‘팔자’라는 이름으로 개입된다. 최소 12년 동안 들인 교육비용에 대한 보상률(반환율)은 얼마나 될까. 명백한 도박이라는 카지노 룰렛 게임은 확률상으로 한 게임에서 베팅한 돈의 반환률이 경기 방식에 따라 38분의 18에서 38분의 1 사이에 있다. 경마에서도 전체 베팅액의 약 70%가 넘는 돈을 돌려준다.



    요즘은 이미 수험생 수와 대학 정원에 차이가 거의 없어서 등록금만 내면 누구든지 대학은 갈 수 있게 됐으니, 아마 ‘꽝’이 없는 게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수험생이나 부모도 ‘꽝’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저 당첨됐다고 만족할 수 없다. 교육에 들어간 비용 대비 최소한 경마나 룰렛의 반환율 정도로 그 투자금을 반환받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런저런 수능의 본질을 고민해보면, 수능이 도박에 가깝다는 말이 안 되는 주장도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도박판은 짧은 시간에 무수한 반복을 통해 서서히 거덜 나지만, 수능은 이미 긴 시간 동안의 교육비 베팅을 통해 거의 거덜 난 상태에서 마지막 한판을 한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지도 모른다.

    수능뿐 아니라 공무원채용시험, ‘삼성고시’라 부르는 SSAT, 각종 국가고시를 볼 때도 나라가 들썩거릴 정도로 큰 판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여러 사회·경제적 환경 때문에 경쟁률이 더 높아졌다지만, 과거시험을 치르던 조선시대부터 각종 시험이라면 유별나게 난리가 나는 것이 한민족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원래 이렇게 평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일까.

    평가를 싫어하는 한국인  

    교수로서의 경험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평가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교수가 국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경우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사업에 선정되거나, HK, BK 등과 같은 대규모 국책연구사업에 선정되거나, 정부 부처의 용역과제를 수탁하는 것이다. 이런 연구를 수행하다보면 교수들은 다 ‘돌아버린다’.

    교수들끼리 흔히 하는 농담 중 하나로, 그런 국가연구사업에서 교수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연구가 아니라 평가용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다년 과제는 매년 보고서를 제출한다. 단기 과제도 착수 보고에, 중간 보고에, 최종 보고까지 하고, 보고서가 다 끝나도 그 연구 결과에 대한 외부 평가까지 진행한다. 아주 시작부터 끝까지, 끝나고 나서도 평가의 연속이다. 마치 평가를 받기 위해 연구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보고 한국인이 평가를 좋아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좀 성급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런 평가에서 한국인은 차이가 그리 크게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를 하는 사람이나 평가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 서로 비슷비슷한 점수를 주고받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렇다보니 모든 영역에서 수많은 평가를 실시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형식적이고 요식행위에 불과한, 평가를 위한 평가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죽하면 웬만한 평가에서 요즘은 반강제적으로 상대평가를 실시하도록 한다. 무조건 몇 %는 최상위, 몇 %는 중간, 몇 %는 최하위를 정해놓고 강제로 배분하게 한다든지, 무조건 몇 %는 떨어뜨리라는 강제 규정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 평가를 하니 억지로 만든 규정이다. 이런 규정이 있어도 머리 좋은 한국인은 서로 돌아가면서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를 받게끔 그 평가를 요식행위로 만드는 기지를 발휘한다.

    평가는 매우 많이 하는데 그 평가를 모두 무력화하는 이런 기현상은 왜 일어날까. 물론 요식행위이지만 그 수많은 평가를 실시해야만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이 낮아서다. 2005년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WVS)에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믿을 만하다”라는 문항에 대해 한국인의 30.2%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는 스웨덴(68.0%)과 같은 선진국은 물론 중국(52.3%)이나 베트남(52.1%)보다 낮은 수치다. 특히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 부족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국회가 10.1%(OECD 평균 38.3%), 정부는28.8%(OECD 평균 34.6%)다. 2009년 국가별 부패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CPI)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5.5점을 기록해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을 기록(Transparency International, 2009)했다. 이런 상황이니 뭔가 객관적으로 나오는 자료가 없으면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도 없고, 믿지도 않는 한국 사회인 것이다. 그러니 형식상으로는 평가가 만능인 한국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원래 그 평가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람의 심리적 특성은 불신 사회에서 그 평가를 요식행위로 만들고 더욱 큰 불신을 키워낸다. 기본적으로 한국 문화는 확장된 가족주의적 성향을 띤다. 일반적인 서양 사회보다 더 넓은 범위의 친척까지 가족에 포함시키고 혈연을 중요시한다는 면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가족주의와 남미의 가족주의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굳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문화를 언급하지 않고도, 가족주의(familism)라는 개념은 미국과 남미를 비교하는 비교문화심리학에서 이미 널리 연구됐다.

    평가만능사회

    기본적으로 가족의 범위 내에서 적용되는 분배의 원칙은 투자와 결과에 비례하는 공평(equity)의 원리가 아니라, 다 같이 똑같이 가져가는 평등(equality)이나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필요(need-based)의 원칙을 따른다. 그러니 가족 간에는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정확한 평가는 별 의미가 없고, 오히려 쓸데없이 매정하게만 보인다.

    불행히도 같은 가족주의에 해당하는 남미 사회와는 달리 한국 사회는 독특하게 혈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사회 전체 시스템을 가족의 형태로 이해하려는 성향이 있다. 남미 사람들은 넓은 범위의 친족까지 가족의 범위에 넣지만 가족의 경계는 오히려 명확해 누가 가족인지 묻는다면 명쾌히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국가나 회사, 그 외의 다양한 사회까지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하려 한다. 부모 같은 대통령, 아버지 같은 상사, 어머니 같은 군대 상사는 국민, 부하직원, 후임병사를 자식과 같이 (막?)대하며 무한책임을 진다. 이런 사회에선 아무리 공식적으로 필요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잔인하게 드러내는 평가결과는 적절하지도 않고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한마디로 ‘우리가 남이가?’의 평가 버전이다.

    확장된 가족주의를 넘어 한국인이 평가를 유달리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한국 문화의 예방적 특성이다. 동기 이론 중 하나인 조절초점(regulatory focus)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같은 결과를 얻으려 해도 크게 두 가지 다른 접근 자세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가령 좋은 대학에 합격하려는 마음과 좋은 대학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같은 다이어트를 해도 더 건강해지려는 목적과 병에 걸리지 않으려는 목적은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전자는 향상적(promotion) 동기로, 후자는 예방적(prevention) 동기로 불린다.

    이런 조절초점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예방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분류된다. 예방적인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실패에 더 예민하다. 현재의 상황을 더 향상시키려는 향상적 동기와 달리, 현재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성향이 예방적 동기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더 나아지는 것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더 잘하는지보다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더 못하는지를 살펴보고, 같은 결과도 나빠지지 않았으면 성공한 것으로 보게 된다.

    이런 한국인에게 평가는 좋은 결과, 잘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라 나쁜 결과, 못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한국인에게는 ‘누가누가 잘했나, 참 잘했어요’가 아닌 ‘누가누가 못했나, 안됐어요’를 구분하기 위한 절차가 바로 평가인 것이다. 그러니 평가를 통해 얻는 것은 없고, 뭔가를 잃는 사람만 생긴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쉬운 수능, 어려운 수능 

    모든 국민이 매달리는 평가의 상징인 대학입시와 수능에서도 평가를 싫어하는 한국 문화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수능의 난이도가 늘 이슈가 된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제일 많이 하는 일은 학교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 것이다. 교실, 운동장, 급식, 선생님, 특히 거의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고 마주칠 일도 없는 교장선생님에게까지 불만은 끝이 없다. 그 불만의 절정은 당연히 시험문제에 대해서다. 문제가 거지 같다느니, 쪼잔하다느니, 도저히 그게 왜 답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둥 가지가지다. 결국 문제가 예리했든지, 자기가 자세히 공부하지 않았든지, 답을 알려줘도 그게 왜 답인지도 모를 만큼 아는 게 없다는 진실의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진짜 두 아들을 화나게 만드는 경우는 그나마 공부한 게 아무런 소용이 없도록 문제가 나왔을 때다. 그래서 누가 봐도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의 성적이 더 좋은 것을 알았을 때, 두 아들은 한마디로 ‘뻑 간다’. 부모로서 “더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으냐”고 다독거리고 위로하지만, 더러는 내가 봐도 불합리할 때가 있다.

    시험이 너무 어려웠을 때와 정반대로 너무 쉬웠을 때다.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우면 대부분의 학생이 완전히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아진다. 주관식이어서 어떻게든 풀 수 있는 데까지 쓰고, 그에 대한 부분점수를 인정하는 경우에는 예외지만, 수능과 같이 객관식이 주를 이루는 문제에서는 정답을 모르면 찍어서라도 답을 쓰게 된다. 전체 30문제 중 평균 25문제 정도를 풀 수 있는 경우, 찍게 되는 5문제의 점수는 결국 운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학생들이 평균적으로 20문제만 풀 수 있을 정도로 시험이 어려워지면, 운에 의해 결정되는 점수는 10문제에 해당되고 결국 운의 비중이 두 배가 된다.

    만약 두 달을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평균적으로 약 2문제를 더 맞힐 수 있는데,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두 학생 모두 4문제 또는 6문제를 찍어야 한다면 두 달간의 노력이 보상받을 확률은 줄어드는 불합리한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반대로 문제가 너무 쉬우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문제가 쉬워서 상대적으로 많은 학생이 실력으로 더 많은 문제를 풀 수 있게 되면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훨씬 많은 학생이 비슷비슷하게 좋은 점수를 받게 되고 실력에 따른 점수 차이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물론 하위권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나겠지만). 이때는 모순적이게도 한 문제만 틀려도 상대적인 순위나 등급이 급락한다. 그래서 실력이 아닌 실수로 틀리는 한 문제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흔히 자녀를 더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고 싶은 부모들은 실수도 실력이라고, 실수도 실력이 있으면 안 저지른다고 주장하지만, 본질적으로 실수는 그냥 실수다. 그리고 그 실수는 거의 운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만약 시험이 그 사람의 실력을 가장 잘 반영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만 생각하면 시험이 너무 어려워도, 너무 쉬워도 모두 정의롭지 않게 된다. 

    착각적 통제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쉽지 않은 책을 미국에서보다 더 많이 사서, 저자인 마이클 샌들 하버드대 교수를 깜짝 놀라게 한 한국인은 그만큼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쉬운 시험에 집착한다. 심지어 대통령이 나서서 수능시험을 쉽게 내야 한다고 할 정도다. 왜 우리 사회는 쉬운 수능에 꽂힐까. 평가와, 평가에 의한 차이를 근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잘하는 학생, 그냥 그런 학생, 못하는 학생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시험의 본질을 싫어한다. 누가 잘해서 어떤 보상을 줄지보다 누가 못해서 가슴 아플지에 더 관심을 갖는 예방적 특성은, 차이를 극대화하느니 차이를 줄이는 시험 형태를 더 선호한다. 그러니 적절한 난이도보다는 아주 쉽거나 아주 어려운 시험을 더 선호하게 된다.

    평가에 죽고 산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싫다!

    도박 중독자들은 절대 돈을 딸 수 없는데도 마치 자신은 딸 수 있다는 비현실적 낙관주의에 빠져 베팅액을 키운다.



    게다가 사교육을 줄여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가 결국 쉬운 수능을 선호하게 만든다. 수능이 쉬우면 학생들의 공부 부담을 덜고 사교육이 줄어들 거라고 믿는 것 같다. 한 심리학 연구에서 사람들에게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 특정 점수가 나오도록 하는 게임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10, 11, 12와 큰 번호를 목표로 주면 주사위를 세게 던졌고, 2, 3, 4와 같은 작은 번호를 목표로 주면 주사위를 살살 던지는 경향을 보였다. 윷놀이를 봐도, 윷이나 모를 외치면서 윷을 살살 던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도를 외치면서 윷을 세게 던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런 미신적 행동을 심리학에서 ‘착각적 통제감(illusion of control)’의 한 현상이라고 한다. 이런 착각적 통제감에 빠져서, 쉬운 수능이 곧 사교육 감소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더 좋은 점수를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수능이 쉬워지면 중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은 오히려 공부를 더하고 사교육도 더 받을 것이다. 왜? 공부를 조금만 더 해도, 사교육비를 조금만 더 늘려도 점수를 쉽게 올릴 수 있다는 통제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이 경우 착각은 아니다). 동시에 상위권 학생들은 모두 점수가 비슷해져서, 한 문제라도 실수하면 한 등급이 떨어지는 저주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재수와 삼수에 돌입한다. 왜? 실력이 모자란 게 아니라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니까.

    평가 후가 더 문제 

    한국인의 확장된 가족주의적 특성과 예방적 특성이 평가를 싫어하게 만드는 데 마지막 화룡점정은 한국 사회의 단기적 사고 특성이다. 사고의 구성수준(construable level)이 추상적(abstract)인 사람은 추상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즐기고 장기적 행동전략을 선호한다. 반면 구체적(concrete)인 사람은 세부적이고 섬세한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특성을 보이지만 동시에 단기적인 전략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단기적인 전략을 선호하는 사람은 눈에 드러나는 단기적인 결과를 중요시한다. 그러니 평가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중요시하며, 매우 빠른 피드백을 좋아하고, 주어진 단기 과제에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보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구체적인 구성수준의 결과가 나온 후 상대적으로 먼 미래에 대한 고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결과를 얻는 것까지만 집중하지, 그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계획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평가의 본질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평가를 어떻게 할지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만들지만, 그 평가를 근거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기업에서 직원평가는 그냥 연봉과 승진, 해고를 결정하는 요소이지 그 평가를 근거로 직원들을 어떻게 향상시킬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논란이 되는 학력평가는 어떤 학교가 성적이 좋은지만 얘기하지, 그래서 그 학력평가 결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가 없다. 이런 사회의 평가에는 미래를 위한 의미가 없다. 그냥 과거를 확인하기 위한, 특히 과거를 처벌하기 위한 평가만 존재한다. 이러니 누가 평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수능에서 철저하고 공정한 평가보다는 다소 쉽고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평가를 만들고, 때로는 평가나 문제의 수를 줄이려고 시도한다. 어떤 평가의 문제점은 그 평가의 기준을 뭉개버린다고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킨다. 모든 평가는 철저하고 공정해야 한다. 다만 그런 철저하고 공정한 평가에서 끝나면 절대 안 된다. 그 평가를 근거로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해야 한다.

    평가에 죽고 산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싫다!
    허태균

    1968년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저서 : ‘가끔은 제정신’


    일을 못하는 직원 또는 직원의 약점을 파악해 더 나은 직원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학력평가를 통해 잘 못하는 학교에 예산과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수능을 통해서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에게 다른 삶의 방법을 찾아줘야 한다. 이런 평가라면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평가에서 낮은 결과를 얻으려 노력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더 많은 혜택이 기다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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