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리하지 말고 경험자 도움 받아야
- 기록보다 중요한 건 내 몸의 균형
- 러너스 하이? 그런 건 없다
2010년 8월 인천 송도신도시에서 열린 인천컵 국제트라이애슬론대회
거친 파도를 헤엄쳐 넘고 자전거로 높은 언덕을 오르며 지글지글 타오르는 아스팔트를 뛰어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에게는 철인(鐵人)의 칭호가 주어진다. 모든 고통을 감내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사치. 그것이 바로 트라이애슬론이다.
국내 트라이애슬론 동호인이 점차 늘어난다. 특기할 점은 동호인 대부분이 40대 이상이라는 것. 70세 이상 고령 도전자도 많다. 20~30대와 40대 이상 선수의 기록 차이는 크지 않다. “트라이애슬론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수사(修辭)가 아니다.
40대 이상 중년 남성이 그 거친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험자들은 “순발력보다 지구력이 필요한 스포츠” “꾸준한 노력이 기록으로 반영된다” “수영, 마라톤, 사이클이 몸의 균형(balance)을 맞추기 때문에 오히려 부상 위험이 적다” “트라이애슬론 중 ‘철인 3종 경기’라고 불리는 ‘아이언 맨 코스(수영 3.9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도 있지만 이보다 짧은 올림픽 코스나 연습 코스도 있다. 누구나 수준에 맞춰 도전할 수 있다” 등의 의견을 제시했다.
트라이애슬론에 푹 빠진 40~50대 남성 3명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대한트라이애슬론경기연맹에 “일도 열심히 하면서 트라이애슬론을 즐기는 동호인 3명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세 사람의 휴대전화 번호를 기자의 휴대전화에 등록했더니, 그와 연동된 기자의 ‘카카오톡’에 세 사람 프로필이 떴다. 세 사람 모두 트라이애슬론 경기에 참여하는 자신의 모습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았다. 검게 탄 피부, 얼굴 절반을 가린 고글, 그리고 해맑은 웃음…. 직업, 나이, 사는 곳 모두 다르지만 그들은 같은 꿈을 꾼다.
◆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이름 : 김동욱
나이 : 48세
직업 : 델(Dell) 솔루션사업본부 상무
첫 출전 : 2009년 통영ITU트라이애슬론대회
2007년 1월 5일. 그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
“첫 수영 강습을 가기로 한 날이었어요. 아침 5시 반에 알람이 울렸는데, 여전히 창밖은 깜깜했고 이불 안에 온기가 감돌았죠.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기특하다. 내가 정말 약속을 지키는구나’ 하는 마음과 ‘야, 애쓰지 말고 그냥 자’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드는데…. 결국 천사가 이겼어요. 그 덕에 지금 철인이 됐습니다.”
델의 솔루션사업본부를 지휘하는 김동욱 상무. 지금은 ‘IT업계의 트라이애슬론 전도사’로 인정받는 그지만, 그 역시 철인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쉽지 않았다. 마흔둘. 그는 IT업계 근로자들이 그렇듯 ‘아침 없는 인생’을 살았다. 아침에 눈뜨면 쫓기듯 출근하기 바빴고, 연이은 야근으로 눈도 침침했다. ‘이렇게 살아선 직장인으로서 미래가 안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해 겨울, 그는 매주 월·수·금 오전 6시부터 7시까지 수영 초급반 강습을 받았다. 한 달이 지나도 숨쉬기, 발차기 등 기본기 연습만 이어졌다. 강습은 즐겁기보다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3개월 이후, 변화는 습관이 됐고 하루는 길어졌다.
수영에 자신감이 붙었을 때 함께 강습 받던 동료가 승부욕을 자극했다. “아, 어제 마라톤 풀코스를 뛰었더니 아침 수영이 힘드네?”라고 한 것. 그는 “저 친구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라톤 클럽에 가입했다. 마라톤 입문 6개월 만에 그는 동아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고, 이후 “사이클만 하면 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이클에 도전했다.
수영 강습부터 첫 철인 완주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이토록 빠르게 ‘철인을 향한 길’에 도전할 수 있었던 비결로 그는 ‘동호회’를 꼽았다. 수영을 배운 지 석 달 만에 수영 동호회에 가입해 9개월 후 경기 안양시에서 열린 ‘단수로수영대회’에 참가했는데, 성적은 꼴찌였지만 함께 도전한다는 즐거움이 있었다고 한다. 마라톤에 도전할 때도 분당마라톤클럽에 가입해 함께 훈련했다. 경험, 거리감이 없는 그를 동료들이 이끌어줘서 빠른 시간 내에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가 “철인에 도전하겠다”고 결심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인터넷 검색창에 ‘분당철인클럽’을 검색한 것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는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으니까 무리해서 운동을 하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는데 경험 있는 선배들과 함께 운동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어요. 저 역시 ‘철인’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친절하게 응대합니다. 제가 받은 도움을 돌려드리기 위해섭니다.”
◆ 더 오래 운동하려고 철인 도전
이름 : 이한용
나이 : 54세
직업 : 삼성SDS 설비컨설팅그룹 수석
첫 출전 : 2007년 가평 오투(O2) 대회
내년 초 퇴직을 앞둔 삼성SDS 이한용 수석은 2001년, 마흔 넘어 마라톤계에 입문했다. 컴퓨터 앞에 내내 앉아 있어야 하는 근무 특성상 만성피로와 더불어 알레르기·비염을 달고 살았다. 환절기마다 한 달 이상 고생했다. 어느 날 그는 사무실에 앉아 닭처럼 조는 자신을 발견했다.
“슬프기도 하고,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초기에는 마라톤 10㎞ 대회 위주로 출전하며 천천히 페이스를 맞춰갔다. 어느덧 1년에 수차례 마라톤을 완주할 만큼 익숙해졌다. “지루하기도 하고,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차에 트라이애슬론을 알게 됐다.
‘콜라병’이던 그에게 수영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정확하게 호흡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자유형은, 생각보다 익히기 힘들었다. 실제 많은 트라이애슬론 참가자가 가장 어려운 종목으로 수영을 꼽는다. 바다나 강 등 야외(오픈워터)에서 수영하다보니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물속은 보이지 않으며 한 번에 수십 명이 바다에 뛰어들다보니 선수들의 팔과 다리가 서로 엉킬 수 있다. 게다가 선수용 수영복은 짱짱한 고무 재질이어서 몸에 딱 붙는다. 초보자는 점점 숨이 조여오는 압박을 느낀다. 초보자는 갑자기 생존본능이 발동해 살기 위해 옆사람의 머리를 붙잡거나 누르기도 한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첫 참가 목표 시기를 1년 늦췄다. 그는 “지금도 수영에서 자유형 말고 다른 종목은 익숙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천천히, 꾸준히. 그가 트라이애슬론 도전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다.
“욕심 부린다고 되는 운동이 아닙니다. 목표 시간 단축이나 완주보다 내 몸의 균형을 찾아 호흡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더 오래 운동하기 위해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했습니다. 여든이 넘어서도 매년 몇 차례 트라이애슬론 완주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 “Are you OK?” “나는 한국인이다”
이름 : 김형렬
나이 : 50세
직업 : 국토교통부 대변인
첫 출전 : 2013년 10월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 철인3종 대회
공직생활 29년째인 국토부 김형렬 대변인은 지난해 트라이애슬론에 입문했다. 연수차 미국에 갔을 때 트라이애슬론 마니아 학생을 만난 게 계기가 됐다.
“늘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그를 알게 되고 ‘이왕 할 거라면 트라이애슬론 본고장인 미국에서 시작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김 대변인은 지난해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에서 열린 트라이애슬론 대회에 출전했다. 처음 도전한 야외 수영. 어찌나 헤맸던지 안전요원이 “Are you OK(괜찮니)?”라고 몇 번이나 질문했다. 그는 연신 “OK!”를 외치며 마음속으로 되새겼다고 한다. ‘나는 한국인이다. 불가능은 없다’.
트라이애슬론은 경기 도중 포기할 수 있다. 그래서 경기운영요원이 수시로 선수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자신의 페이스 이상으로 달리다가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 실제 매년 전 세계적으로 몇몇 아마추어 선수가 트라이애슬론 경기 도중 사망한 적 있다.
그는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트라이애슬론 세계에 입문했다. 지금도 한국체대 레포츠클럽에 가입해 매주말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를 한다. 한강 잠실수중보 아래에서 오픈워터 연습도 한다. 국토부 대변인으로서 정부와 언론의 접점에서 근무하는 그는 트라이애슬론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평소 기자들과의 스킨십이 중요합니다. 술자리나 토론 자리가 많으므로 체력이 관건입니다. 체력단련에는 트라이애슬론만한 게 없죠. 다른 부처 대변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습니다.”
“기록 단축 목표 NO!”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트라이애슬론 완주. 하지만 ‘철인의 길’에 입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 철인에게 철인이 되는 법에 대해 질문했다. 먼저 ‘러너스 하이’. 흔히 달리기를 하면 어느 순간 고통이 사라지고 쾌감과 도취감이 느껴진다고 알려졌다. 영화에서는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숨소리만 남은 채 마치 하늘 위를 걷듯 발이 가벼워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고 싶어 마라톤을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들 세 중년의 철인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 상무의 말이다.
“러너스 하이? 그런 거 전혀 없다. 사람을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트라이애슬론 훈련은 배기량 1000cc였던 나를 2000cc로 키워가는 과정이다. 점점 과한 운동량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면 자연히 기록이 나아지는 것이다.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목표를 완수했을 때 성취감을 느낀다. ‘아무리 힘들어도 도전하니 되더라’는 말을 할 자격이 생기니까….”
트라이애슬론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거친 운동 때문에 오히려 관절이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김 상무는 “트라이애슬론을 통해 비염, 알레르기 등 호흡기 질환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 수석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아마 수영을 통해 호흡기가 단련되면서 질환이 사라지고 체력이 좋아지면서 거뜬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트라이애슬론을 할 때 목표 기록은 어떻게 선정하는지 물었다. 김 대변인은 역설적으로 “기록 단축이라는 목표는 없어야 한다”고 답했다. 기록은 날씨, 코스, 컨디션 등 여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시간 단축’이라는 목표를 세워선 안 된다는 것. 다만 1년에 두 번 정도, ‘즐기면서 출전한다’는 목표를 두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 수석도 같은 의견이었다.
“지금도 매일 달리기를 하지만 절대 무리하게 안 한다. 철인이든 마라톤이든 일상생활을 잘하기 위해 하는 건데 무리하면 오히려 운동을 못 하게 된다. 대신 전 출장 갈 때 운동화, 달리기 복장은 늘 가지고 간다. 언제든 운동할 수 있게….”
대부분 이른 아침이나 퇴근 후, 주말을 이용해 운동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가족과 보낼 시간이 적지 않았을까. 김 상무는 “어느 정도는 맞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두 아이를 떠맡긴 채 아침에는 수영, 주말에는 마라톤이며 사이클을 연습하러 다니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기록이 단축될수록 아내의 짜증 총량이 비례해 늘어났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결국 그는 ‘알아서 기는’ 작전을 선택했다. 주말에 운동하러 가기 전 와이셔츠 다리기, 쓰레기 버리기, 요리, 화장실 청소 등 ‘내 몫’을 다 하니, 아내도 별말 못하게 된 것. 그는 “오히려 지금은 아내가 나를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운동 중독’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골프 치러 그린에 나간 뒤 세상이 온통 그린으로 보이고 짬만 나면 머릿속으로 퍼팅 폼을 그려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일할 궁리보다 운동할 짬만 보게 된다. 하지만 세 사람은 “오히려 운동이 회사 일에 도움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 수석의 말이다.
“동료들은 내가 말하기 전에는 내가 운동에 취미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운동으로 인한 조퇴, 지각 등 근무 태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업무에 도움이 된다. 간혹 야근 밤샘작업을 하는데 다음 날 젊은 후배사원보다 일찍 출근한다.”
회복력·업무능률 향상
10월 초, 이들과 만나는 1주일 동안 기자는 지독한 감기에 걸린 상태였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인생 선배’들의 ‘철인 도전기’를 듣는 내내 고작 서른을 앞둔 기자가 1분에 한 번씩 재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거리니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기자는 3개월 단위로 관성처럼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하러 간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질문 중 기침이 터져 정신 못 차리는 기자에게, 김 상무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조언을 했다.
“운동을 하면 뇌가 활성화해 두뇌 회전이 빨라집니다. 그만큼 일처리 능률도 오르죠. 또한 체력이 좋아져서 야근을 하든 술자리를 하든 회복이 빠릅니다. ‘자기 관리는 능력’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어요? 어쩌면 요즘 방영하는 드라마 ‘미생’의 직장인 중 하나였을 내가, ‘철인’ 칭호를 얻게 된 건 트라이애슬론 덕분입니다.
저는 요즘 ‘운동 전도사’가 돼서 회사 내 자전거·수영 동아리도 만들고 여러 후배를 트라이애슬론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고맙다’는 사람은 있어도 ‘왜 그랬느냐’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지 말고 김 기자도 내일 아침부터 제대로 운동해보는 거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