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와 다른 면모 보이는 데 주력
- 일과 휴식 구분 애매해 업무 공백 생길 수도
- ‘조직의 쓴맛’ 경험하지 못한 약점
- 인재보다 ‘결점 없는 사람’ 찾아
5월 19일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던 중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이는 박근혜 대통령.
한국 특파원을 오래 해 한국어가 유창한 한 외국 언론인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다른 사람 눈에 자신의 이미지가 클린(clean)하고 스토익(stoic· 금욕적)하게 비치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을 마친 뒤에도 그 이미지가 유지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두 가지 이미지를 지키겠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는 매우 강하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 경제가 어렵잖아요. 그의 임기가 3년 정도 남아 있지만 경제가 크게 좋아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경제가 나빠지면 공무원연금을 개혁하듯이 복지도 후퇴해, 박 대통령에 대한 한국 국민의 평가가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그로 인해 평가가 나빠지는 것보다 클린하고 금욕적인 그의 이미지가 깨지는 것을 더 염려하는 듯해요.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버지 약점 메우기’
그에게 “박 대통령은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많은 한국인이 그러한 기대를 갖고 그 분을 대통령으로 뽑았죠. 그러나 박 대통령이 생각하는 아버지 문제는, 그를 뽑아준 한국 국민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박 대통령은 아버지가 한 것과 같은 일을 하기보다는, 아버지가 못한 것을 메워주고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박 전 대통령의 산업화 업적은 모두가 인정하니까 경제 문제에는 덜 몰두하고, 아버지가 하지 못한 다른 일에 진력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겁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중국 하얼빈역 부근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지어달라고 중국에 요청한 것이 그런 예죠. 하얼빈에는 조선민족예술관 안에 ‘안중근 의사 기념실’이 있는데도요. 장제스 군(軍) 소속으로 출범한 한국광복군을 기리는 ‘광복군 기념비’를 시안(西安)에 지어달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한국은 중국에 이런 요청을 했다고 발표한 적이 없다. 중국은 안 의사 기념관과 광복군 기념비를 올 1월과 5월 각각 준공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한 소신이 있었기에 실용 외교를 했습니다. 일본과 국교를 맺고 청구권 자금을 받아 한국을 발전시켰죠. 일본 육사에서 1년간 유학한 만주국 군인 출신이 그렇게 하자 친일파 소리를 들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가 갖지 못한 부분, 즉 친일파란 소리를 듣지 않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많은 국민이 일본을 싫어하면 나도 일본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일본이나 아베 총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약점을 보완하려다보니 그런 것 같다는 얘깁니다.
박 전 대통령은 고집스럽게 산업화에 매진했습니다. 대중의 인기는 안중에 두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민주화를 바라는 세력으로부터 애국자가 아니라 독재자라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그가 애국자였다는 평가는, 88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이 선진국이 된 다음에야 나왔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독재자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대중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대중적인 애국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전두환 리더십 vs 박근혜 리더십
최고지도자는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최선을 다하는 ‘방향’이 어디냐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도 중요하다. 김정은처럼 고모부까지 죽이는 공포정치에 정력을 쏟으면 정권은 유지될지 몰라도, 경제가 무너지고 인민의 삶이 팍팍해진다. 덩샤오핑이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내세우고 개방·실용노선에 진력했기에 중국 경제가 발전했다. 그러나 준비 없는 개방은 ‘저(低)발전’과 ‘종속발전’을 거듭하는 경제 식민지를 만든다. 그래서 방향만큼이나 방법이 중요하다.
최고지도자는 행동으로 방법을 실현해야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새벽같이 일선 군부대와 파출소 등을 방문하고, 이를 저녁 9시 TV 뉴스 맨 앞에 보도하게 했다. 그의 기습 방문에 대비하느라 많은 실무자가 시달렸다. 9시 ‘땡’하면 TV 뉴스에서 그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어야 했던 국민은, ‘땡전(全) 뉴스’라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의 현장 챙기기는 10·26사태 이후 느슨해진 국가 기강을 다잡는 효과가 있었다.
전두환 정부는 1980년 1월 4일의 종합주가지수를 100으로 정해놓고 경제를 관리했는데, 그가 퇴임하기 직전인 1987년 말 이 지수는 525를 기록했다. 8년 사이 주가가 5배 이상 급등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한국의 GNP(국민총생산)를 3배 이상 키웠고,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에 힘입어 물가안정도 이뤘다. ‘5·18 광주’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박정희 이후 또 한 번 ‘퀀텀 점프’(대약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대통령이 리더십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발휘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짐을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은 코스피가 2000대일 때 취임했는데 지금은 1970대로 떨어졌다. 박 대통령 취임 이후 2년 동안 주요 국가 가운데 주가지수가 하락하거나 횡보한 나라는 러시아, 브라질, 한국 정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제재로, 브라질은 복지를 우선시한 ‘좌파’ 룰라 전 대통령의 정책 후유증으로 주가가 하락했다. 한국은 경제제재도 받지 않았고, 보수 정권이 연이어 집권했건만 주가는 옆걸음이다. ‘아시아의 용’이라는 한국이 왜 이렇게 됐을까.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의 박 대통령 행적이 문제가 됐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그날 박 대통령이 정윤회 씨를 만났다고 보도해 물의를 일으켰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한국 국가원수의 ‘러브 어페어(love affair)’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하여 사법 제재를 받게 되자 적반하장으로 “한국이 언론 통제를 한다”고 대들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국 언론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일왕의 ‘러브 어페어’를 만들어냈다면 일본은 어떻게 나왔을지를. 산케이를 비롯한 일본 언론은 한국 언론을 삼류로 폄하하고 총체적으로 혐한론(嫌韓論)을 유포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흥분한 우익 인사가 한국을 비난하며 자해라도 한다면, 혐한론자들은 재일(在日) 한국인을 공격하는 테러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
최고지도자의 ‘자리 지키기’
참사가 발생한 그 예민한 날 대통령의 행적이 의문시된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청와대 측은 보안을 이유로 밝히지 않다가 뒤늦게, 문제의 7시간 동안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19회 서면과 유선으로 보고받고 7회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모든 권력기관은 상호 감시를 한다. 그게 권력의 생리다. 그런 맥락에서 청와대를 살펴볼 수 있는 한 정보기관 출신은 박 대통령 스타일을 리더십과 연관시켜 이런 지적을 했다.
“박 대통령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일하는 스타일이다. 김기춘 비서실장 말마따나 눈을 뜨면 일을 시작하고, 일하다 지치면 잠자리에 드는 식이다. 그렇다보니 근무시간과 휴식시간의 구분이 불분명해졌다. 한참 일하다가도 힘들면 집무실을 떠나 운동이나 휴식을 하는 것이다. 이를 김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집무할 공간은 관저, 본관, 위민관 등 여러 곳에 있다. 대통령이 그 시간에 있는 곳이 집무실이다’라고 해명했다고 본다.
대통령이 운동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대통령을 만나러 온 이들은 대개 기다려야 한다. 천안함이 격침됐다거나 휴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아주 다급한 상황이 아니면 비서실장도, 조석(朝夕)으로 대통령을 모시는 부속실장도 ‘나오셔서 보고받고 결재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당일에 탑승자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보도가 있지 않았나. 그런 상황이라면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어도 호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나 기업 CEO, 군 사령관처럼 최고위직에 있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리 지키기’다. 이를 가장 철저히 지키는 것이 군이다. 지휘관이 자리를 비웠다가 패전한 사례를 역사에서 숱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는 제때 결정하고 결심하는 자리다. 양자택일, 삼자택일의 결정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유능한 조직에선 참모들이 최고지도자가 선택해야 할 것까지도 정해서 보고하므로 지도자가 제로 상태에서 결정할 일은 별로 많지가 않다.
따라서 최고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참모들이 추천한 것을 보고받고 승인하는 것이 주(主)가 된다. 그게 결재다. 결재를 제때 해줘야 집행을 빨리 할 수 있다. 그래서 최고지도자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외부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니 자리 지키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타협점으로 나온 것이 ‘최고지도자의 일정’이다.
최고지도자는 일정을 짜놓고 그대로 움직여야 외부 행사를 소화하고 보고도 받고 결재도 할 수 있다. 일정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많은 것이 헝클어지고 늦어진다. 외부 행사가 없다면 점심시간을 뺀 업무시간, 즉 ‘나인 투 식스(오전 9~오후 6시)’에는 보고를 받고 결재를 해 조직이 돌아가게 해줘야 한다. 참모와 실무자들은 그 시간에 결재와 보고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휴식과 운동은 나인 투 식스 외의 시간에 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20년 가까이 단전호흡을 해왔다. 이 사진은 대선후보 시절 그가 페이스북에 띄워놓았던 것이다.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 대통령을 적극 지지했다는 한 사업가는 “박 대통령이 정말 잘하면 좋겠는데, 그의 리더십에 실망했다. 최근 선거 때마다 여당이 이긴 것은 그가 잘해서가 아니라 야당이 너무 못해서였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느낌으로 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조직을 잘 가동해야 제대로 이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운영은 조직생활을 해본 이들이 잘한다. 이걸 잘 아는 재벌들은 자식들을 회사에 말단사원으로 집어넣고, ‘초고속’일지언정 단계를 밟아 승진시키며 조직을 경험케 한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조직의 쓴맛’을 보며 성장한 경험이 적다.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 가족인데 그는 가족을 이뤄본 적이 없다. 군이나 회사 생활도 해보지 않았다. 조직과 사회를 배워야 할 20~40대 시기에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이사장 같은 자리에서 거의 고립돼 지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식으로 국회의원이 됐고, 아버지의 후광도 작용해 여당 대표가 되고 대통령이 됐다.
그는 ‘영남의 DJ(김대중)’였다. 영남인의 적극적인 지지 덕분에 늘 30%대 지지율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기는 그 자신이라기보다 부모의 업적이 만들어준 것이다. 조직생활의 경험이 적은 탓인지 그는 ‘자리 지키기’가 조직 지도자의 첫째 덕목이라는 것을 익히지 못한 것 같다. 이는 평생 정치인으로 있다 국가지도자가 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군인 출신들은 다르다. 군대는 개인이 아니라 조직으로 싸워야 하기에 그들은 신참 소위 때부터 ‘지휘관은 정위치에 있어야 한다’ ‘자리를 비울 때는 승인을 받고 대타를 정해놓고 떠나야 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그래서 독재는 해도 리더십의 공백은 만들지 않으려 한다. 이를 철저히 수행한 이가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 때를 제외하면 거의 청와대에 갇혀 지내는 것 같다. 여성이라 사람들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지도 않는 듯하다. 결국 근무시간 외에는 국가를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다.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종일 일하고 틈틈이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니 보통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에 업무 공백이 생긴다. 이는 그가 조직을 책임진 왕처럼 행동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공주처럼 사고할 것이 아니라 국가를 책임진 왕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신현돈 전 육군 1군사령관의 전역 ‘사건’이 떠오른다. 신 전 사령관은 모교 강연 때문에 ‘정위치’를 비운다고 상급자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 대타를 정해놓고 모교 강연을 하고 식사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 그 후 부대 복귀 중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 구설에 올랐다.
이 사건은 제보를 받은 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신 사령관은 군화 한쪽이 벗겨지고 군복도 풀어헤쳐진 상태로 헌병의 등에 업혀 고속도로 화장실을 이용했다고 한다’고 폭로하면서 확대됐다. 신 전 사령관은 한민구 국방장관과 통화한 후 전역했다. 이 사건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추태를 빼고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음주뿐이다. 이에 대해 C일보는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전역시키세요”라고 해서 신 전 사령관이 해임됐다고 보도했다. 신 전 사령관은 지휘권 공백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옷을 벗은 것이다.
대통령의 감정
경기도 김포시의 애기봉 등탑 철거 논란도 박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련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일은 H일보가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언론보도를 통해 애기봉 등탑이 철거됐다는 것을 안 박 대통령이 회의석상에서 “왜 등탑을 없앴느냐, 도대체 누가 결정했느냐”면서 호되게 꾸짖었다’고 보도하면서 불거졌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보니 박 대통령이 실제로 한 말은 “애기봉 등탑이 철거돼 아쉽다”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때 어느 정도의 감정이 실렸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강했다면 꾸짖거나 질책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최근까지 요직에 있었던 전직 군인은 이렇게 비판했다.
“애기봉 등탑은 박정희 정부 때인 1971년 세워졌다. 40년이 지난 탓에 노후해 안전도 D등급을 받은 위험시설이었다. 그래서 김포시와 국방부가 이를 철거하고 새 전망대를 세운다는 계획을 세워뒀다. 철거는 확정됐지만 철거 주체인 김포시가 예산이 없어 못했을 뿐이다. 세월호 사고 이후 안전을 얼마나 많이 강조했나. 겨울철 강한 북서풍이 불어오면 이 등탑은 흔들흔들한다.
그래서 안전을 염려한 해병대 2사단장은 김포시가 철거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철거하게 했다. 그것도 임의로 한 게 아니라 국방부는 물론 작전계상으론 상급자인 육군 수도군단장에게도 보고했다. 철거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그때는 누구도 ‘왜 철거하느냐’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 등탑이 없어진 것을 알고 한마디 하자, 호되게 꾸짖은 것으로 보도됐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대통령은 공인 중의 공인이다 그가 회의석상에서 하는 말은 강한 구속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등탑에 애착이 있다면 대통령은 철거한 이유부터 알아보고 그런 말을 했어야 한다. 적법하게 철거됐다면 새 등탑을 짓기 위해, 불법으로 철거됐다면 철거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 말을 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큰 소동이 일었는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김포시는 당장 새 전망대를 짓겠다고 발표하지도 않았다. 이는 국가에서 예산을 지원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 내부만 흔들어놓은 허망한 사건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공주라면 몰라도 왕이라면 생각을 해가며 말을 해야 한다. 특히 ‘아쉽다’처럼 감정이 담긴 말을 할 때는….”
국정을 잘 운영하려면 인재 등용이 필수다. 신분 보장과 연금 제공은 유능한 공무원을 유치하기 위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이들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있기에 대통령은 여러 형태로 전문가를 불러 자문한다.
자문은 주로 원로를 초청해 의견을 듣는 식이다. 국가 운영에 참여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기에, 대통령이 부르면 많은 사람이 기꺼이 달려가 지혜를 내놓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원로들의 혜안을 빌리는 데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그를 지지했던 박정희 시절의 인사들이 지혜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건만 그는 거의 부르지 않는다.
2013년 5월 4일 고운 한복 차림으로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불차탁용(不次擢用)이 없다
지혜는 원로에게서 구하고 추진력은 젊음에서 얻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때부터 번번이 ‘인사 참사’를 겪었다. 능력보다는 문제가 없는 사람을 고르다보니 검증 시간이 길어진다.
예컨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은 정치적인 자리가 아닌데도 청와대는 4개월 이상 이 자리를 공석으로 뒀다. 항공우주 분야는 비교적 전문성이 강해, 인재 풀이 한정돼 있는데도, 인사 검증을 오래 한 탓이다. 한 예비역 장성은 박 대통령의 꿈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한국 경제를 획기적으로 살려내려면 통일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박 대통령도 이를 알고 ‘통일 대박론’을 이야기하고 통일준비위원회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다. 말잔치와 사람 모집에서 멈춘 형국이다.
통일은 혁명보다 어렵다. 매우 정치(精緻)한 작업이므로 유능한 사람들이 책임을 지고 추진해야 한다. 비밀리에 할 일도 매우 많다. 통일준비위처럼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떠들며 할 일이 아닌 것이다.
통일을 하려면 통일을 해낼 수 있는 인재부터 찾아야 한다. 통일은 창조적인 발상과 이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이끌어낼 수 있기에, 특정 인재 풀이 아니라 공무원을 포함한 전체 인력에서 찾아야 한다. 품계와 학벌 등을 따지지 말고 능력 있는 이를 발탁하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파당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진짜 인재는 파당에 들어가 있기엔 너무 큰 인물인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그를 발탁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파당은 자기 권력을 놓칠까 싶어 ‘그는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다’고 비판하는데, 이런 견제를 물리쳐야 한다. 최고지도자가 파당에 휩쓸리면 ‘인(人)의 장막’에 갇힌다. 파당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최고지도자 역할을 하는 배우로 전락하고 만다.
최근 미국의 정보 수장인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북한을 방문해 억류된 미국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우리는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 하려 한다고 비난하지만, 미국도 북한과 통하려 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북한 카드를 쥐고 있어야 중국에 ‘마구’ 가까워지는 한국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이 북한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외교부가 못한다면 국가정보원이 공작을 해서라도 차단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DNI 국장이 북한을 방문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통일을 포기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말로는 대화와 접촉을 통해 화해함으로써 통일을 이룬다고 하지만, 그런 통일은 현실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통일은 독일에서 보듯 급변사태를 통해 이뤄진다.
북한 급변을 유도하려면 북한을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켜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북한 3인조가 한국을 방문했으니, ‘편하게’ 미국이 북한과 접촉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렇게 해야 남북관계가 좋아져 통일이 이뤄진다는, DJ-노무현 시절과 같은 사고를 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바로 그 시절’ 죽어가던 북한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안보와 통일 외교의 전문가가 아니다. 후보 시절 많은 이가 국가 전략을 설명했지만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하지만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은 인정했다. 이것이 문제다. 목표는 같은데 방법이 전혀 다르다는 것,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 그는 아직도 통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성공한 여성 지도자의 길
박근혜 리더십은 노무현 리더십과는 방향이 다르지만 포퓰리즘적 성격을 띤다. 필요한 것을 적시에 하지 않고 대중 여론을 자주 반영한다는 점에서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메르켈 독일 총리는 성공한 여성 최고지도자로 꼽힌다. 반면 아버지에 이어 최고지도자가 된 인디라 간디 전 인도 총리,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에게는 그런 평가가 내려지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그를 지지하던 많은 보수 인사가 실망하고 있지만, 그는 선거 때마다 승리하는 ‘행운의 여신’ 면모를 계속 보여줬다. 충격적인 세월호 사고 후유증에서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오는 양상이다. 그러나 취임 2년이 다 돼가건만 이렇다 할 업적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달성된 지금 ‘성공한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으려면 통일을 이뤄내거나 그 단서를 마련해야 한다. 박 대통령도 이를 알고 통일 대박론을 거론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기 전에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거나 20대 총선이 예정된 2016년이 4월이 다가온다면, 그는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레임덕에 빠져버린다. 세월호 사고보다 더한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지도자였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신라본기’ 선덕여왕 조에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는 혹평을 달아놓았다. 박근혜는 성공한 여성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꿈을 좇는 공주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시키려는 여왕으로 변모하는 게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