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그를 조금 더 닮을 수 있다면

  •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겸 의료원장

    입력2014-11-19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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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외과 전문의이지만 특이하게도 의학박사 학위를 의사학(醫史學, Medical History)으로 받았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내가 학위 과정에 들어가던 당시만 해도) 의과대학에서 유일하게 인문학과 맞닿은 것이 의사학이었기 때문이다. 내 박사학위 연구 주제는 광복 이후 19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 의료와 의학의 역사다. 특히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어떻게 극적으로 우리나라 의학교육과 의료체계를 바꾸게 됐는지를 연구했다. 덕분에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1년이 넘는 기간에 늘 50년 전의 시대 상황에 젖어 있었다.

    연구실 삼아 임시로 얻어놓은 오피스텔에서 자료를 뒤적이다 잠깐 잠이 들면 1954년 여름의 마로니에 거리를 거닐거나 이듬해 여의도 공항에서 노스웨스트항공 비행기를 타고 미국 연수를 떠나는 장면을 꿈꾸곤 했다. 나는 내 연구 논문에 나오는 인물들이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돌아가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6·25전쟁 직후의 시대 상황을 상상 체험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듬해인 2007년 3월, 나는 30여 명의 의료진과 함께 처음으로 네팔 의료봉사를 떠났다. 내가 운영하던 인천사랑병원 식구들과 오랜 기간 같이 활동했던 한국이주민건강협회 회원들과 함께 대규모 의료봉사단을 꾸린 것이다. 비행기가 카트만두 상공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운명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왜 네팔에 오려 했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잿빛 뿌연 공기 사이로 드러나는 회색 건물들과 풍광, 흙먼지 가득한 지저분한 거리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간 마을의 시꺼먼 물이 흐르는 개천과 그 주변의 판자촌도 너무나 익숙했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꿈속에서 보던 그 장면들이었다. 나는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네팔이라는 나라는 50여 년 전의 우리나라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바누사랑진료소

    네팔은 2800만 명의 인구에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00달러에도 못 미치는 아시아 최빈국의 하나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1년에 걸친 내전을 치르면서 1만4000명이 사망했고 2007년 들어서 왕정이 폐지되고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제헌의회가 시작됐다.



    한국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지 2년도 못 돼 3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을 3년 동안 치렀고, 휴전 다음해인 1954년 우리나라 1인당 GDP는 67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58년 개띠’라는 말이 생길 만큼 출생 인구가 많았다는 1958년에도 한국의 인구는 고작 2400만 명이었다. 전쟁과 빈곤과 많은 인구라는 점에서 1950~60년대의 한국과 지금의 네팔은 무척이나 닮았다.

    그래서일까. 왠지 네팔에 이끌렸고, 네팔 의료봉사는 매년 계속됐다. 갈 때마다 3000명 가까운 환자를 무료로 진료했다. 30명의 의료진이 이렇게 많은 환자를 단기간에 진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의료진보다 세 배나 많은 현지 자원봉사자들의 존재였다. 그들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고, 유창한 한국어로 통역도 했다. 그들은 모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로, 캠프가 열릴 때면 네팔 곳곳에서 일부러 찾아와 주었다.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살면서 한국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힘써준 한국의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가진 사람들이다.

    몇 년의 의료봉사 후, 우리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짧은 의료봉사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에, 아예 ‘상설’ 보건의료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의 주도로 카트만두 근교 빈민촌에 보건소를 하나 설립한 데 이어, 작년 가을에는 포카라 인근의 ‘바누마을’에 두 번째 보건소도 설립했다. ‘바누사랑진료소’라고 이름 붙였다. 여기에서는 의사 한 명을 포함해 간호사, 약사, 임상병리사 등 6명이 일한다.

    아직 우리가 이룬 것은 작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작은 경험을 바탕으로 더 큰 전진을 이뤄내려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춘 한국식 병원을 네팔에 건립하는 계획이 그것이다. 물론 이 병원은 비영리로 운영될 것이고 국제 NGO의 성격을 띠겠지만, 한국에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 모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는 민간 차원의 개발원조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7년 동안 네팔의 정말 많은 의사와 교류했고, 현지에서 소중한 인맥도 많이 쌓아왔다. 특히 한국으로 초청돼 연수를 받고 간 몇 명의 의사는 우리가 정말 좋은 병원을 설립한다면 자신들이 지금 누리는 네팔 내에서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서라도 우리가 꿈꾸는 프로젝트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뿌려놓은 씨앗들이 조만간 예쁜 꽃으로 피어나, 내년쯤에는 아름다운 화단을 꾸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꼭 ‘닥터 씰’ 같은 사람이 돼라”

    내가 네팔을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의사가 한 명 있다.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의사인 설대위 박사다. 설대위(薛大偉)라는 외과의사는 한국인이 아니다. 1954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36년간 전주 예수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약한 미국인 의사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의 한국 이름이 설대위다. Seel을 음차해서 설씨를 택했고 David를 음차해서 대위라는 한국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설대위는 외과 수술로 명성을 날리던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튜레인 의과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외과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튜레인 의과대학은 외과 분야에서는 미국에서도 톱클래스에 속했다. 교수직을 제의받았던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 의사였지만,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을 찾아와 평생을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으로 헌신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설대위는 당시 한국의 의술 수준으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는 환자들을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런 신기(神技)와 헌신 탓에 전국에서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왔다. 병원 복도와 계단까지 줄을 섰으며, 병원 주변 여관에는 대기 환자가 넘쳐났다. 그는 연일 계속되는 수술로 과로한 탓에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양 진찰실을 개설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암 등록 사업을 펼쳤다. 대한두경부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최신 방사선 암 치료법도 소개했다.

    나는 설대위 박사를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났다. 아버지가 전주 예수병원의 제1호 한국인 내과 전공의였고, 전문의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예수병원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때에 설대위 박사의 사택에서 놀던 기억이 생생하고, 내가 의대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자신도 의사였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어릴 때부터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서 꼭 ‘닥터 씰’ 같은 사람이 돼라”라고 권면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살면서 설대위 박사 같은 완벽한 인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의사로서 완벽한 실력과 헌신성을, 병원장으로서 경영적 수완과 사회적 리더십을, 신앙인으로서 겸손한 인격과 온화한 성품을 지녔고, 바이올린 연주를 비롯해 다방면에 뛰어나니 이보다 완벽한 인격체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특권 누리는 이들의 자세

    돌이켜보면 내가 외과의사가 된 것도,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것도, 그리고 내가 병원을 시작하면서 이주노동자 문제에 열성을 쏟은 것도, 네팔에 의료봉사를 가는 것도, 어쩌면 설대위라는 위대한 인간을 따라 배우려는 어릴 적부터의 갈망이 작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년퇴임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집에 ‘설대위’라는 한글 문패를 달고 한국인으로 살았다 한다.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통해 돈을 모아 20억 원 상당의 최신형 암 치료기를 예수병원에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노년에도 응급실 당직 의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치매를 앓았는데, 미국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국말로 뭔가를 계속 말해 미국 의료진을 당황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설대위 박사는 2004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를 조금 더 닮을 수 있다면
    이왕준

    1964년생

    서울대 의대 졸업, 인하대 석사, 서울대 박사(의학사)

    ‘청년의사’ 발행인, (사)한국의료수출협회 이사장, (사)한국이주민건강협회 희망의 친구들 부회장

    인천사랑병원, 명지병원 이사장


    설대위 박사와 같은 숭고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헌신과 숭고한 삶의 모습은 이제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오늘날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 나라에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귀감이 된다. 존경하는 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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