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해튼 89번가에는 새하얀 소라 껍데기 모양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 미국 대재벌 구겐하임 가문의 솔로몬 구겐하임이 세웠다.
- 그는 칸딘스키와 클레 등 현대 추상화 작품을 주로 수집했다.
- 한국의 대표 화가 이우환도 2011년 구겐하임에서 개인전을 열어 동양의 추상미술을 뽐냈다.
설립자 솔로몬 구겐하임(1861~1949)은 대재벌의 아들로 열렬한 미술품 수집가였다. 미술관을 세우기 전엔 맨해튼 플라자 호텔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 수집 작품들을 전시했다. 그는 1937년 현대미술을 후원하기 위해 구겐하임 재단(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을 만들었고, 1939년에는 맨해튼 54번가에 ‘비구상화 미술관’(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을 열었다. 이것이 구겐하임 미술관의 출발이다(1952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 미술관은 재단이 설립된 1937년을 공식 설립연도로 잡는다.
새하얀 소라 껍데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한 솔로몬 R 구겐하임.
수집품은 계속 늘어갔고 전시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1943년 이들은 독립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하고 미국 역사상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는 프랭크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미술관 신축은 12년이나 지난 1955년에야 시작돼 1959년 완공됐다. 이 건물이 바로 89번가에 있는 소라 껍데기 모양 건물이다.
라이트는 책도 많이 쓰고 강연도 많이 하는 지식인 예술가였다. 1000채 이상의 건물을 설계했는데, 그중 500여 채가 실제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직접 보진 못했다. 완공하기 반년 전 타계했기 때문이다. 솔로몬 역시 새 미술관 건물이 완공되기 10년 전인 1949년에 세상을 떠나 이 기념비적인 건물을 보지 못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맨해튼 빌딩숲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띈다. 전통 양식의 빌딩이 즐비한 가운데 초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안팎이 모두 눈처럼 새하얀 소라 껍데기 모양의 나선형으로 내부의 중앙은 꼭대기까지 툭 트였다. 벽을 따라 나선형 복도를 오르내리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라이트는 관람객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층으로 올라간 후 나선형 복도를 따라 내려오면서 그림을 감상하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술관은 걸어 올라가면서 감상하도록 작품을 전시한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올라가면서 감상하면 미술관도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내가 미술관을 방문한 날엔 비가 내렸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 빌딩들과 썩 잘 어울려 보이진 않았다. 기와집 마을에 시멘트 건물이 들어선 느낌이랄까. 이 건물에 대해서는 찬사도 많았지만 비판도 많았다. 모가 나면 그런 법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주로 현대미술 작품, 그중에서도 주로 인상파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소장했다. 설립 당시 미술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비구상화를 중심으로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수집해왔다. 소장품은 많지만, 상설 전시하는 작품은 적은 편이다. 어떤 미술관이든 직접 가본다고 소장품을 많이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상설전시보다 특별전을 많이 기획하는 것이 구겐하임 미술관의 특징이다.
구겐하임 재단은 뉴욕 외에도 세계 여러 곳에 미술관을 뒀다. 이탈리아 베니스, 독일 베를린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1997년 스페인의 소도시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열었고, 2013년에는 아부다비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섰다.
프랭크 라이트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나선형 복도를 따라 오르내리며 관람하도록 돼 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한 페기 구겐하임. 솔로몬 구겐하임의 질녀다.
1847년 마이어 구겐하임(Meyer Guggenheim·1828~1905)이라는 스위스의 한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광산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이어 제련업에도 진출해 ‘19세기 세계 최대 부자 중 한 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벌이 됐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광산을 소유했다.
마이어는 7남3녀를 뒀는데, 네 번째 아들이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스위스에서 학업을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와 아버지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그림 수집에 열성이었는데, 30대이던 1890년대부터 유명한 유럽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19년 은퇴한 후에는 더욱 열심히 그림 수집에 몰두했다. 그림에 대한 이런 열정은 리베이를 만나면서 황금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1949년 솔로몬이 타계한 후 리베이는 미술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구겐하임 가족들은 리베이를 재단 이사직에서도 축출하고 미술관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미술관 건물 신축도 리베이의 아이디어였으나 준공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리베이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40년이 지나고, 미술관 건물이 완공된 지 50년이 훨씬 넘은 2005년에 와서야 구겐하임 미술관은 리베이의 공로와 예술 세계를 기념하는 특별전 ‘Art of Tomorrow : Hilla Rebay and Solomon R. Guggenheim’을 열어주었다. 이 전시회는 예술 애호가들의 큰 관심에 힘입어 뉴욕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이어졌다. 리베이와 구겐하임 가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논할 때 이탈리아 베니스에 있는 미술관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Peggy Guggenheim Collection)을 빼놓을 수 없다. 솔로몬의 질녀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 만든 미술관인데, 그녀는 삼촌이 만든 구겐하임 재단에 이 미술관을 기증해 현재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자매 미술관이 됐다.
페기의 아버지는 마이어 구겐하임의 여섯 번째 아들 벤저민이고, 페기는 그의 둘째딸이다. 벤저민은 안타깝게도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때 사망하고 만다. 이때 페기는 14세였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페기는 사촌들만큼 큰 재산을 상속받진 못했다. 페기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마르셀 뒤샹, 브랑쿠시 등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내며 이들을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을 운영했다.
베니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페기가 30년 넘게 살던 집에 그녀가 일평생 수집한 개인 소장품을 중심으로 만든 미술관이다. 그랜드 커낼(Grand Canal) 옆에 자리한 이 아름다운 미술관에는 지금도 관람객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온다. 개인 저택이었던 만큼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들이 전시됐고, 미술관 내부에는 20세기 유명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잔뜩 걸려 있다. 화가인 페기 딸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상설전시관이 있다. 소장품이 많다고 해서 전시 작품이 많을 순 없고, 상설 전시는 더더욱 어려운 게 미술관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은 수십 점의 칸딘스키 작품을 상설 전시한다. 둘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 칸딘스키 였을까?
1930년 7월 리베이는 솔로몬을 칸딘스키 스튜디오로 데려간다. 이때부터 솔로몬은 칸딘스키에 빠져들었다. 추상화의 원조 작가 칸딘스키의 천재성을 미리 알아본 것이다. 솔로몬은 일평생 150점이 넘는 칸딘스키 작품을 사 모았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당시로서는 쓰레기 조각이 될 수도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칸딘스키에 몰입했다. 그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이다.
칸딘스키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 법학교수가 됐다.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은 서른 살 때부터다. 늦깎이 화가가 순수추상화의 시조가 됐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다.
칸딘스키는 1896년 독일 뮌휀으로 옮겨가 예술학교에 다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고향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모스크바의 진부한 미술 이론에 환멸을 느껴 1921년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이듬해부터는 독일의 유명한 종합미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자 칸딘스키는 크게 좌절한다. 1933년에는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조차 문을 닫게 됐다. 이에 칸딘스키는 프랑스로 이주해 여생을 보냈고, 1939년에는 아예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바실리 칸딘스키, ‘Composition 8’, 1923(왼쪽) 바실리 칸딘스키, ‘Various Actions’, 1941(오른쪽)
구겐하임 미술관은 칸딘스키의 작품을 초기부터 후기까지 고르게 소장하고 있다. 1923년작 ‘컴포지션 8’(Composition 8)과 1941년작 ‘다양한 행동’(Various Actions)을 비교해보면 그의 추상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컴포지션 8’은 바우하우스 교수 시절에, ‘다양한 행동’은 프랑스 시민이 된 후에 그린 그림이다.
‘컴포지션 8’에는 직선으로 된 다양한 도안을 사용했지만, ‘다양한 행동’에서는 부드러운 곡선이 전체 분위기를 압도한다. 앞 작품이 칼날 같은 규격이 전체를 지배하는 독일병정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면, 뒤 작품은 프랑스 시절의 그림답게 아기자기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구상화는 감상하는 사람을 자칫 지루하게 만들지만, 추상화는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에 따라 하나의 그림이 수많은 의미로 탈바꿈할 수 있다. 이것이 추상화고,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다.
구겐하임의 ‘사위’ 에른스트
구겐하임 미술관은 한때 페기 구겐하임의 남편이었던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의 작품도 소장했다. 에른스트의 그림은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특이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한 1941년작 ‘안티포프’(The Antipope)는 제목으로 보자면 교황 또는 교황 제도에 대한 저항으로 보이지만 그림에선 그런 의미를 찾을 순 없고 그냥 괴기스럽게만 느껴질 뿐이다.
독일 쾰른 근방에서 태어난 에른스트는 본 대학에서 철학, 미술사, 문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정신병원을 방문해 정신병자들의 그림을 보고는 크게 매료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이 그렇게 괴팍해졌는지 모르겠다. 에른스트는 191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1918년 제대해 쾰른으로 돌아와 다다운동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프랑스로 밀입국해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려나갔다.
1938년부터는 페기가 그를 후원했다. 그녀는 에른스트 그림을 많이 구입해 런던에 위치한 자신의 새 미술관에 전시하기도 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에른스트는 게슈타포에 체포됐는데, 페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해 1941년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둘은 결혼하는데, 이 결혼이 에른스트에게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에른스트 주위에는 항상 여자가 많았다고 한다. 페기와의 결혼도 4년 만에 끝나고 곧 다른 여자와 네 번째 결혼을 한다. 에른스트의 인생 역정도 그림만큼이나 다채로웠다.
페기 구겐하임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그녀는 많은 예술가와 어울리며 숱한 스캔들을 낳았다. 첫 남편은 조각가이자 소설가인 로렌스 베일이라는 사람으로, 둘은 자녀 둘을 낳았다. 에른스트는 페기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
이우환은 2011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특별전 ‘Making Infinity’를 열었다.
내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았을 때 마침 우리나라 대표 화가인 이우환(1936~ )의 특별전시가 열렸다. 2011년 가을의 일이다. 2008년 봄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관을 방문했을 때도 이우환의 특별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우환 전시회를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그것도 두 번이나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미술관 투어를 즐기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경남 함안 태생의 이우환은 서울대 미대를 다니다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1961년 니혼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에서 작가 생활을 했으며, 1973년부터 1991년까지 도쿄 다마 미대 교수를 지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미술운동인 모노파(物派)를 주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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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구겐하임 전시 제목은 ‘무한성의 표출’(Making Infinity). 대표작 ‘점으로부터’(From Point), ‘선으로부터’(From Line) 등이 전시됐다. 단색 바탕에 점이 점점 사그라져 가거나 선이 점점 옅어져 가는 모습은 삼라만상의 무한성을 암시한다. 여백이 돋보인다. 서양화가들이 수많은 추상화를 그렸지만, 이우환의 추상화는 이들과 완전히 구별된다. 매우 동양적인, 그래서 서양화가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이우환의 추상 세계가 칸딘스키와 같은 공간에 펼쳐졌다는 것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