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직 대통령이 아산병원 빈소로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금관문화훈장을 직접 추서했다. 뒤이어 전직 대통령과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줄줄이 분향했고, 갓을 쓴 노인부터 젊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생전 작가와 아무 면식도 없던 시민과 애독자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지난 5월8일 서울 아산병원 영결식장.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는 조사를 다문다문 읽어내려가다 끝부분에 이르러 끝내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그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전 참 염치도 없지요.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먹어도 파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영결식 후 노제(路祭)가 열린 원주의 거리마다에는 근조의 플래카드가 걸렸고, 통영에는 어린 학생에서 햇볕에 탄 촌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이 몰려나왔다. 원주에서의 노제를 포함해 발인부터 안장까지 영구는 무려 여섯 차례의 행사와 제사를 치러야 했다. 그 어떤 한국인에게도 이처럼 간곡한, 국민장이 아니면서도 국민적 애도에 젖은 장례가 과거에 있었던가. 이는 평생을 두고 자신에겐 가혹하리만큼 인색하고 냉정했던, 그러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겐 베풀고 보살피고 거두는 일에 헌신을 다한, 한 특별한 영혼에게 바치는 전 국민적 헌사였는지 모를 일이다.
‘초저녁 범띠생’ 사주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면/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홀로 살다 홀로 남은/팔십노구의 외로운 처지/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박경리의 어린 시절과 젊을 때 모습.
진주여고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나 할까”(‘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