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파란의 근대사, 생생한 인간 벽화, 총체소설의 장관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입력2008-09-02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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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 드라마로도 몇 번씩 각색된 대하소설 ‘토지’.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로 평가받는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지난 5월8일 여든둘의 고단한 삶을 놓아둔 채 우주로 사라졌다. 전쟁미망인의 삶을 그린 자전적 소설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50여 년. 자신에겐 철저하게 인색한 그였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후한 삶을 살았다. 소설을 통해 한(恨)과 민족, 생명의 참뜻을 가르치고 간 작가 박경리. 그는 왜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팽팽한 삶”을 살면서도 ‘생명’에 대한 외줄을 끝내 놓지 않았던 것일까.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형식은 문인장이었지만 사실상 국민장(國民葬)과 다름없었다. 세속의 명예나 인기는 비속하고 허황된 것이라고 한사코 거부하던 그에게 세상은 진정성을 다해 존경과 예의를 바쳤다. 신문은 1면에, 방송은 첫머리에 작가의 죽음을 보도했고, 따뜻하고 융숭한 해설과 장례 진행의 속보를 계속 내보냈다.

    현직 대통령이 아산병원 빈소로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금관문화훈장을 직접 추서했다. 뒤이어 전직 대통령과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줄줄이 분향했고, 갓을 쓴 노인부터 젊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생전 작가와 아무 면식도 없던 시민과 애독자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지난 5월8일 서울 아산병원 영결식장.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는 조사를 다문다문 읽어내려가다 끝부분에 이르러 끝내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그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전 참 염치도 없지요.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먹어도 파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영결식 후 노제(路祭)가 열린 원주의 거리마다에는 근조의 플래카드가 걸렸고, 통영에는 어린 학생에서 햇볕에 탄 촌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이 몰려나왔다. 원주에서의 노제를 포함해 발인부터 안장까지 영구는 무려 여섯 차례의 행사와 제사를 치러야 했다. 그 어떤 한국인에게도 이처럼 간곡한, 국민장이 아니면서도 국민적 애도에 젖은 장례가 과거에 있었던가. 이는 평생을 두고 자신에겐 가혹하리만큼 인색하고 냉정했던, 그러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겐 베풀고 보살피고 거두는 일에 헌신을 다한, 한 특별한 영혼에게 바치는 전 국민적 헌사였는지 모를 일이다.



    ‘초저녁 범띠생’ 사주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박경리가 문단에 갓 등장한 시절, 그러니까 50년도 더 된 어느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리던 날, 그가 한 말이다. 작가 자신 “얼결에 떠밀려 나가 말했다”고 했지만, 그 내용은 작가의 삶이 태어날 때부터 파란만장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박경리는 생전에 어느 강연장에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미발표 유고 시 ‘일 잘하는 사내’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거친 풍파를 헤쳐온 삶에 대한 아픔을 진솔하게 토로했다. 일부 청중은 당시 박경리의 대답을 듣고 흐느꼈다.

    “다시 태어나면/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홀로 살다 홀로 남은/팔십노구의 외로운 처지/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박경리의 어린 시절과 젊을 때 모습.

    작가 박경리는 1926년 10월28일(음력)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훗날 문학적 자전(한국일보 1984년 7월1일자)에서 밝혔듯이 그의 출생은 ‘불합리한 것’이었다. 그 자신의 사주풀이에 의하면 박경리는 초저녁 범띠생.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이므로 여자치곤 기가 아주 센 사주였다. 아버지는 작가를 낳은 뒤 어머니를 떠났고, 이후 그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 감정 속에서”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진주여고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나 할까”(‘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전쟁미망인의 처녀작 ‘계산’

    광복되던 해 진주여고를 졸업한 박경리는 이듬해 결혼했으나 6·25전쟁 중 남편을 여의고 뒤이어 아들마저 잃었다. 어머니와 단 하나의 혈육인 딸을 부양해야 하는 작가의 삶은 가파르고 메말랐다. 전쟁은 분명 뒤틀린 현실을 낳았고, 그 시대를 산 모든 삶을 불구적으로 만들었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은 휴지처럼 구겨졌고, 삶은 몸서리쳐지는 고통과 불행의 늪이었다. 당시 전쟁미망인은 생존의 벌판에서, 또 사회적으로 따가운 눈총에서 아무런 바람막이가 없었던 ‘희생의 제물’ 같았다.

    박경리는 원래 몽상가였다. 그러나 질곡의 현대사는 그를 긴장시키고 엎드리게 했고 균형을 잡도록 했다. 주어진 현실에서 소망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세속적 욕망은 버려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에겐 삶의 큰 울림을 주는 어떤 세계가 필요했다. 작가는 문학에 매달렸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집념에 가득 찬 도스토예프스키”의 고투에 작가는 감명을 받았고, 제임스 조이스에게선 예술가라기보다는 고도의 장인정신을 배웠다. 토머스 울프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토마스 만의 작품과 함께 박경리의 창작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태산준령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문학적 실험을 멈추지 않은 고골리의 작가정신에 공감했고, ‘고요한 돈 강’의 작가 솔로호프를 통해서 작가는 사실적 묘사와 도도한 서사시적 구성에로 시야를 넓혔다.

    찬바람 몰아치는 신작로에 홀로 남은 듯한 소외감, 인간의 조건 속에서 튕겨져 나와 바닷가 모래알 하나가 된 듯한 절망감, 왜 사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반복하던 끝에 박경리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계산’이 추천·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초기 소설에는 삶의 신산스러운 풍경이 자전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초기작 중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안겨준 ‘불신시대’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다, 마침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독백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 현실에 대한 각성과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의식전환을 보여줬다. 장차 진화해나갈 박경리 문학의 밑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1990년대 42쇄 찍은 ‘김약국의 딸들’

    ‘불신시대’를 통해 작가는 ‘소설 쓰는 일’과 ‘사람 사는 문제’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생각하는 문학적 경향을 보였다. 작품이 일기나 수필처럼 전후의 현실에 대한 고발과 증언을 하고 있음에도 작가는 폐쇄된 주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기구한 삶 속에 유폐된 것 같았다. 그러나 1959년에 발표된 ‘표류도’에서 박경리는 전쟁미망인의 고통에 찬 삶을 주제로 다루면서, 자폐적 고립성에서 벗어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개방적 자세를 취하는 등 상당한 변모를 보인다. 세계와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절대시했던 종전의 주인공과는 달리, “내 피부에, 내 심장에 불행한 인간들은 다정한 친구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 됐다.

    “나를 현실에 적응시켜야 한다. 내 생명이 있기 위하여 나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마지막 장면의 다짐은 외로운 ‘표류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제 박경리는 “억울하고 괴로운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진술의 의미를 뒤집었다. 세상 사람들의 꿈과 슬픔을 이해하고 담아내기 위한 공적 담론으로써 작품을 대하는 소설가로 한 걸음 뛰어오른 것이다.

    1962년 박경리는 전작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당시 장편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된 다음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책으로 묶어내는 게 하나의 경향이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례적으로 바로 책으로 출판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바로 독자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박경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전업 작가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이 1990년대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93년에 1쇄를 발행한 ‘김약국의 딸들’은 1995년까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거듭했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박경리로 하여금 전업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한 ‘김약국의 딸들’.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 우선 어딘가 ‘낯익은 이야기’란 느낌을 받는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속의 어떤 불행한 집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느낌, 아니면 내 고향 어느 대가(大家)의 몰락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은 2004년 마산 MBC가 특집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의 대담에서 박경리 자신이 “‘김약국의 딸들’은 솔직히 말해 통영의 떠도는 얘기를 모아서 재편집했다”고 말한 것처럼 설화적 요소가 짙다.

    ‘김약국의 딸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모티프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이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은 이 언어적 모티프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으로 일관한다.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연속해서 중첩되는 현상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개연성을 지탱한다.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적 배경과 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신비한 장치들이 작품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언어의 주술성과 폐가를 중심으로 한 장치적 모티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나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삽입 가요, 뚜렷한 설화적 구성원리 등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6·25를 정면으로 다루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토속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 두 계열은 ‘토지’에서 융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약국의 딸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64년에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과 전장’은 박경리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사적 담론의 수준을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돌파한 작품이다. 작품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주인공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감상적이고 결벽증을 가진 인물에서 억척스러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변신한다.

    작품 속의 ‘전장’은 더 이상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 또한 여주인공에게 전쟁은 이념으로 포장된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도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그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이 어느 한편에 가담할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신중함’으로, 또는 ‘현실을 좇는 현명함’으로 전쟁을 관망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주범이 바로 전쟁임을 실감나는 묘사를 통해 고발했다.

    ‘시장과 전장’은 6·25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 삼은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때까지 무수하게 나온 그 어느 작품보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니고 남긴 상처, 가령 사회악, 인간성의 타락 내지 상실, 개인적인 비극과 빈곤, 인간적인 본능 등의 문제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작가는 좌우대립의 철저한 희생자였다. 6·25전쟁 중 투옥된 남편을 만나러 서대문형무소를 매일 기웃거렸고, 작가 자신과 가족은 일상화된 위험과 공포에 노출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이 차츰 손상되고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욕에 사로잡히고 재물을 탐하는 모순을 접하면서 이데올로기의 허망을 보았다. 그에게는 생존이 더 급했다. 그가 보기에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자였다. 노동자가 아닌 인텔리겐치아를 통해 수용된 사회주의는 로맨티스트적·계급적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맑스 보이’ ‘엥겔스 걸’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탐구와 함께 박경리는 ‘생명사상’에 대한 모색을 계속한다. 여주인공은 전장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무관한 채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마치 ‘전장’ 속에서 ‘시장’의 세계를 살아가는 듯한 인물이다. 작가가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보인 것은 헌신적이고 가식 없는 사랑을 통해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추구하려 한 것이다.

    박경리 문학의 뛰어남은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서사적 비약을 보여주는 데 있다.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좌익의 평등 열망과 우익의 자유 열망, 그리고 각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들 간의 설전이 소설의 등줄기를 타고 앙상블을 이루어낼 때, 이미 박경리는 당시 어느 작가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줬다. 최인훈의 ‘광장’은 인텔리 주인공과 농부를 대면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군 장교가 되어 내려온 남자 주인공을 박경리는 농부와 대면시킨다. 누가 이것을 행동주의자의 로맨티시즘적 한계라고 하겠는가?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

    박경리의 삶은 생명을 향해 열려 있었던 세월이었다. 인천에서 꾸린 짧은 신접살림, 연안에서의 짧은 교편생활, 전쟁과 남편의 죽음, 용공 혐의, 아들의 돌발적 죽음, 사위인 김지하의 출현, 유신과 폭력, 그리고 새롭게 다가온 생명에 대한 연민, 이런 한국 현대사의 얼룩 속에 홀로 내던져진 작가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한(恨)의 근원을 캐어 생명사상을 잉태하는 크고 넓은 모성이 된다. ‘토지’ 탄생의 전경(前景)이 여기서 펼쳐진다.

    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장편소설이다. 동학운동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기록으로 남는다. 작가가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오로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4반세기 동안 완성도를 높여간 것은 우리 문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 문단에서도 아마 이런 식의 작가적 투혼은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박완서는 박경리의 영결식에 바친 추모사에 못다 한 이야기를 보탠 ‘신원(伸寃)의 문학’(‘현대문학’ 6월호)에서 ‘토지’를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1979년 ‘토지’ 3부를 끝마치고.

    “선생님이 평생의 업적으로 남기신 ‘토지’에는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직업, 고귀한 인간성으로부터 바닥 상것의 비천함까지 천태만상의 인간군상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박제를 만들어 모자이크한 게 아니라,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고 하는 게, 마치 지류(支流)가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1973년 봄 ‘토지’ 1부를 읽고 김병익은 “아마도 춘원의 ‘무정’ 이후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이며 “박경리의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라고 평가했거니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8년에도 ‘토지’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토지’는 일제 강점기에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 맥이 끊어진 대하소설의 맥을 되살려 이후 김주영의 ‘객주’,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뛰어난 성과를 거둔 작품들이 잇달아 나왔다.

    그러나 김병익이 ‘토지’에 대해 ‘가장’이란 최상급의 수식을 고집한 것은 이 작품이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이 3만1200장의 방대한 양적 규모를 자랑한다거나 50년에 달하는 가장 긴 역사를 소설공간으로 재현하고 있다거나 우리 민족사를 재구성하고 대작 붐을 선도해서 획기적이었다거나 한 것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정신의 GNP”

    ‘토지’야말로 우리 문학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총체소설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토지’는 개인사·가족사·생활사·풍속사·역사·사회사 등을 포괄하고 있다. 여기에는 농민과 중인을 중심으로 양반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계급을 망라한 우리 민족 전체의 삶의 모습이 재구성되어 있으며, 별의별 인물과 성격들을 재현하고 창조함으로써 인간사의 모든 것을 모아들여 거대한 실존적 벽화를 그리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토지’의 주무대를 관광지화한 경남 하동 최참판댁.

    소설의 시대적 배경도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는 가장 험난한 역사적 흐름을 폭넓게 조망하고 있으며, 그 서사적 공간도 한반도 남단의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진주·통영·경성과 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 및 일본의 동경 등으로 확대되며, 언어가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실제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전시함으로써 소설의 거대성을 담보해내고 있다.

    따라서 ‘토지’는 마땅히 최상급으로 존중받아야 할 우리 소설문학 최대의 자산이라는 것이 김병익의 주장이다. 사실 많은 대하소설이 규모가 크고 내용이 풍부하며 이야기가 박진하다 하더라도, 그 전체는 부분사적 로망으로 그치고 세계는 한 측면으로 서술되는 데 반해, ‘토지’는 수백 가지의 이야기 마디를 총체성으로 엮어 우리 문학사의 어떤 작품도 이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했다.

    1970년대에 근대성에 대한 치열한 비판을 작품 속에 녹여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는 ‘토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가 이 모순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우리 영혼의 슬픈 밑뿌리를 보호해 이 땅에 묻는 작업을 한 선배가 박경리다. 나는 거대한 중화학공장 몇 백 개보다 ‘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세금으로도 생산해낼 수 없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토지’가 올려준 것은 우리 정신의 GNP다.”

    ‘토지’는 6·25전쟁 이전부터 박경리의 기억 한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다. 거제도 외가 할머니가 어린 시절 들려주었던 얘기가 작가의 뇌리에 선명하게 빛깔로 남아 있었다. 거제도 어느 곳, 끝도 없이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떨어져 내릴 때였는데,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수확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외가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는데, 나중에 웬 사내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어느 객주 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사람들이 있었다 한다.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황금빛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작가의 머리에 짙은 잔영을 드리웠다.

    “글 기둥 잡고 눈먼 말처럼”

    ‘토지’는 매우 조용히 시작됐다. 1부가 연재되기 시작한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는 “오랫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으며 오직 이 작품에만 심혈을 기울였다”는 작가의 말과 함께 작가의 사진이 실렸을 뿐이다. 이 침묵을 깬 것은 1부 단행본의 발간이었다. 2부를 연재하던 ‘문학사상’에서 1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자 “문단의 괄목할 만한 수확”(김동리), “문학사 희유(稀有)의 대작”(백철), “뼛속에 스미는 아픔”(황순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하소설”(이어령) 같은 평가가 나왔다.

    제3부는 ‘독서생활’ ‘한국문학’ ‘주부생활’을 거쳤으며, 1980년에 작가는 아예 원주시 단구동으로 거처를 옮겨 자신을 외부와 격리한 채 제4부를 ‘정경문화’ ‘월간경향’에 발표했다. 제5부는 그 후 4년여의 공백 끝에 1994년 8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됨으로써 길고 긴 장정을 마감했다. 작가의 나이 43세에서 68세까지 25년간이었다. 작가는 “내가 ‘토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토지’가 나를 몰고 갔다”고 회고했다.

    그야말로 구절양장, 무수한 덤불과 가시밭길, 세찬 파도와 폭풍의 언덕을 넘어간 세월이었다.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에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암과 피나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3시간의 수술 끝에 보름 만에 퇴원한 바로 그날부터 작가는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를 썼다. 악착스러운 자신에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다 한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작가는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시력의 감퇴 등 붕괴되어가는 체력과 맹렬하게 싸웠다. 오죽하면 ‘구약’의 ‘욥기’를 떠올리며 위안을 받았을까. 전쟁 중에 남편을 잃어 일찍 청상이 되었고, 그런 몸으로 기른 딸의 지아비로 맞아들인 사위 김지하는 1974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확신범이었다. 1974년부터 신문기자로 밥벌이를 한 소설가 김훈은 1975년 2월15일 김지하가 형집행정지로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하던 어둑한 시간, 교도소 광장 건너 언덕에서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바로 손자를 업은 박경리였다. 그날 밤 김훈은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으나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한다. 어쩐지 그 모습은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 같았다(솔 출판사, ‘수정의 메아리’, 1994)고 한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상황은 어려웠고 쌓이는 한의 뭉치는 더 커져만 갔다. 그 와중에도 박경리는 거실에서 포대기에 손자를 업은 채 원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원한이 오기가 되어 그를 자존의 삶으로 끌어올렸다. “글 기둥 하나 잡고 눈먼 말처럼 연자매 돌리며” 운명처럼 작가는 ‘토지’를 썼다.

    영험한 산자락이 지란을 숨기듯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그 남편 김지하.

    작가는 원주집 텃밭에서 한 세대에 가까운 세월 절대고독을 천명으로 견디며, ‘생명주의’의 삶과 사상을 일구어냈다. 그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했다. “뿌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박경리가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을 매는 모습은 땅에 대한 경배와 같았다고 그를 만난 이들은 회고했다.

    원주의 단구동 집에는 황토 빛이 밴 수많은 면장갑이 베란다 난간에 널려 있었다. 그곳을 찾아오는 문단의 후배나 지인들은 누구나 작가가 텃밭에서 손수 가꾼 채소나 대추·오가피·두릅·취나물·고들빼기 등을 구메구메 싸주던 작가의 모습에서 언제 꺼내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그리운 고향집의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설이란 박경리에게 삶과 생명의 문제였다. 그러나 소설이 인생보다 크고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도 그 터전으로서의 삶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했다.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 그것이 삶에의 연민이며, 그것이 다시 한의 언어로 승화되어 ‘토지’가 탄생했다. 작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던 자의식의 언어가 타(他)자아의 언어로 발전한 것이다.

    당초 ‘토지’ 1부를 구상할 때 작가는 ‘타(他)자아’와 ‘객관적 거리’로 삶과 죽음을 포옹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등짐장수로부터 몰락하는 귀족에 이르는 인생을 두루 섭렵하면서 초기의 꿈은 우주관으로 발전한다. 마침내는 한반도의 문화역량이 러시아대륙과 중국대륙에 버금갈 수 있음을 깨달아갔다. 일상적 삽화를 통해 전개되는 작품이 한민족의 서사시처럼 다가오는 것은 작가의 원숙해진 ‘모신(母神)의 시선’에 있다.

    다른 대하소설에는 계급과 이데올로기 등의 어떤 중추계통이 있다. 그런데 ‘토지’는 600~700명에 달하는 수다한 계급과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봇짐장수와 시장거리의 할머니도 나온다. 그들 모두는 총체적 존재로서 등장한다. 생명이 그 핵심이고, 탄생과 죽음, 긍정과 부정이 부딪치는 모순, 그 한을 덩어리째 받아들인다. 작가는 ‘토지’에서 영험한 산이 지란(芝蘭)을 자락에 숨기듯 수많은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했다.

    한과 민족과 생명을 주제로

    ‘토지’라는 제목과 관련, 작가는 소유의 출발로 문서를 생각했고, 문서화된 토지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꿰뚫어보게 되었다. 소유개념은 인간의 비극뿐만 아니라 개인의 비극, 국가와 민족 간의 비극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 자본주의로써 지구를 파괴하는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까지 그 영향을 확장시켜 나간 것으로 작가는 사유를 확대, 심화시켰다.

    ‘토지’에는 또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비극이 담겨 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개인이거나 영웅이거나, 혁명가이거나 등짐장수, 심지어는 작부에 이르기까지 토지는 생명을 담아내는 거대한 호수와 같다. 어느 시대 어떤 장소에서 생명들이 무수하게 흘러가고, 그러면서 만약 죽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유한성을 안은 채, 토지는 비극이면서 축복이고, 운명이면서 사랑이고, 삶에 대한 연민이면서 다른 세계와 교신하려는 간절함이 담긴 삶의 젖줄이다.

    작품 ‘토지’를 한과 민족과 생명사상이라는 주제를 식민지 자본주의의 전개과정 속에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하는 비평가도 있다. ‘토지’의 주제와 사상 및 작품의 형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된 바 있지만, 김성수(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일제의 식민지 자본주의에 대한 총괄적 대항 서사로 읽는다. ‘토지’의 서사적 깊이와 공간적 범위가 보여주듯, 우리 근대사가 포착할 수 있는 한민족 삶의 소망스러운 형태에 관한 염원을 가장 포괄적인 서사를 통해 복원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수는 작품의 서장으로부터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토지는 땅·농토·소작료·지주(제) 등 농민들의 생존문제를 포함해 식민지 자본주의의 유입과 그에 따른 근대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작품 전체의 기조로 삼고 있다고 보았다. ‘토지’는 단지 자연 상태의 대지나 소유개념이 불분명한 땅에 얽힌 생존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소유개념이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과 의식과 제도를 어떻게 변화시켜갔는지에 대한 작가의 정치경제적 상상력을 총괄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토지’는 자본의 자기확장이라는 목적이 가장 폭력적으로 구현되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역사적 장을 서사 구성과 전개의 주요 모티프로 삼아 ‘한과 민족주의와 생명사상의 고양’이라는 주제를 생성한 작품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지’는 작품에 내장된 일제 강점기의 여러 현상, 즉 지식인과 일본문화·한국문화의 변별성 문제, 일제 강점기의 도시화 과정과 풍속 등에 관한 미시적인 분석과 해석을 세밀하게 탐구할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토지’를 통해 전개된 작가의 생명사상은 그의 문학적 본질이면서 문학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잉태됐다. 작가가 ‘토지’를 쓰던 한 세대 전만 해도 공해나 생태문제는 사회문제의 관심권 밖이었다. 작가는 청계천 복원을 촉구한 선구적 제창자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환경론 수준을 넘어 자연의 위대함, 그것의 가치와 삶의 조화를 고양하는 생명론자로서의 우주적 사유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토지문화관.

    박경리란 작가에 대해서 어느 평자는 그 정신의 도저함에서 비롯되는 감동을 말한다. 그는 현실과 권력으로부터 수많은 억압과 피해를 당했지만, 전혀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고 버텼다. 그는 인기를 혐오했고 명예를 사절했다. 그는 사람들이 비굴하고 천박한 것을 단연 싫어했다. 예술원 회원 되기를 끝내 거부한 것도, 언론을 한사코 기피한 것도 그런 생래의 체질이었다.

    그러나 1999년 토지문화관을 만들고 재단을 구성한 것은 젊은 작가들에게 창작의 산실을 마련해주려는 배려에서였다. 그는 역사를 따뜻하게 관찰했고,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했으며, 자연과 공감하며 소통했으며, 생명을 보듬어 안았다. 무엇보다 인간적 품위를 우선적 가치로 삼았다.

    일대 장엄한 서사 ‘토지’는 그래서 가능했고, 독자는 작품을 존중했으며, 작가는 정상의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사실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각종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토지’는 1980년대의 한 조사에서 한국문학 30년의 최대 문제작 3편 중 하나로 꼽혔고,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5월8일 열린 박경리의 노제.

    1990년대의 한 조사에서는 광복 이후 한국의 대표소설 또는 건국 이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혔다. 또 2000년대 들어 작가 박경리는 세계에 알리고 싶은 문인 1위, 노벨문학상 가능성 후보 1위로 꼽히는 등 박경리와 그의 ‘토지’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1989년 9월의 한 신문은 ‘토지’가 20년 통산 판매 1위의 작품으로 당시까지 120여만부가 판매되었다는 종로서적의 집계결과를 발표했다. ‘토지’ 5부작 16권은 2002년 나남출판사에서 전21권으로 재출간되자마자 1주일간 4000질(8만4000부) 가량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출판계에서는 ‘토지’에 대해 “한국의 현대문학은 박경리의 ‘토지’로 인해 풍요로울 수 있었다”며 찬사와 존경을 표했다.

    지난 5월5일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현대문학’ 4월호 발표, ‘옛날의 그 집’)는 시 한 편을 남긴 채 박경리는 홀연 이 세상을 떠났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尹武漢

    1943년 대구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5월9일에는 한산도가 내려다보이는 미륵산 기슭 별이 가득한 하늘의 대지에 몸을 뉘었다.

    1971년 가슴의 암 수술을 받기 바로 전날 동대문쪽으로부터 남산까지 길게 걸린 무지개를 보면서 죽음이 자기를 데려가려나 보다고 여겼던 박경리,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뒤 박경리는 수만리 장천을 날갯죽지 하나로 날아갔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에 자신을 지탱해가면서 진실만을 기록했던 사마천(司馬遷)의 그 ‘멀미 같은 시간’을 앓은 뒤, 작가는 마침내 영혼을 육신에서 빼내 나비처럼 전혀 다른 세상으로 훨훨 날아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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