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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 -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 2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파란의 근대사, 생생한 인간 벽화, 총체소설의 장관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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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 드라마로도 몇 번씩 각색된 대하소설 ‘토지’.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로 평가받는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지난 5월8일 여든둘의 고단한 삶을 놓아둔 채 우주로 사라졌다. 전쟁미망인의 삶을 그린 자전적 소설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50여 년. 자신에겐 철저하게 인색한 그였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후한 삶을 살았다. 소설을 통해 한(恨)과 민족, 생명의 참뜻을 가르치고 간 작가 박경리. 그는 왜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팽팽한 삶”을 살면서도 ‘생명’에 대한 외줄을 끝내 놓지 않았던 것일까.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형식은 문인장이었지만 사실상 국민장(國民葬)과 다름없었다. 세속의 명예나 인기는 비속하고 허황된 것이라고 한사코 거부하던 그에게 세상은 진정성을 다해 존경과 예의를 바쳤다. 신문은 1면에, 방송은 첫머리에 작가의 죽음을 보도했고, 따뜻하고 융숭한 해설과 장례 진행의 속보를 계속 내보냈다.

현직 대통령이 아산병원 빈소로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금관문화훈장을 직접 추서했다. 뒤이어 전직 대통령과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줄줄이 분향했고, 갓을 쓴 노인부터 젊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생전 작가와 아무 면식도 없던 시민과 애독자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지난 5월8일 서울 아산병원 영결식장.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는 조사를 다문다문 읽어내려가다 끝부분에 이르러 끝내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그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전 참 염치도 없지요.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먹어도 파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영결식 후 노제(路祭)가 열린 원주의 거리마다에는 근조의 플래카드가 걸렸고, 통영에는 어린 학생에서 햇볕에 탄 촌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이 몰려나왔다. 원주에서의 노제를 포함해 발인부터 안장까지 영구는 무려 여섯 차례의 행사와 제사를 치러야 했다. 그 어떤 한국인에게도 이처럼 간곡한, 국민장이 아니면서도 국민적 애도에 젖은 장례가 과거에 있었던가. 이는 평생을 두고 자신에겐 가혹하리만큼 인색하고 냉정했던, 그러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겐 베풀고 보살피고 거두는 일에 헌신을 다한, 한 특별한 영혼에게 바치는 전 국민적 헌사였는지 모를 일이다.



‘초저녁 범띠생’ 사주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박경리가 문단에 갓 등장한 시절, 그러니까 50년도 더 된 어느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리던 날, 그가 한 말이다. 작가 자신 “얼결에 떠밀려 나가 말했다”고 했지만, 그 내용은 작가의 삶이 태어날 때부터 파란만장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박경리는 생전에 어느 강연장에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미발표 유고 시 ‘일 잘하는 사내’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거친 풍파를 헤쳐온 삶에 대한 아픔을 진솔하게 토로했다. 일부 청중은 당시 박경리의 대답을 듣고 흐느꼈다.

“다시 태어나면/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홀로 살다 홀로 남은/팔십노구의 외로운 처지/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박경리의 어린 시절과 젊을 때 모습.

작가 박경리는 1926년 10월28일(음력)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훗날 문학적 자전(한국일보 1984년 7월1일자)에서 밝혔듯이 그의 출생은 ‘불합리한 것’이었다. 그 자신의 사주풀이에 의하면 박경리는 초저녁 범띠생.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이므로 여자치곤 기가 아주 센 사주였다. 아버지는 작가를 낳은 뒤 어머니를 떠났고, 이후 그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 감정 속에서”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진주여고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나 할까”(‘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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