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운명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을 만날 수는 있겠지만, 부부가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운명을 이야기 하는 것은 결혼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혼식 한 달 전에 결혼을 발표하고, 제일 먼저 처형이 될 박근혜 전 대표 댁을 방문해 청첩장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3일 전 박 전 대표께서‘통보받은 적이 없다.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박지만 회장도 오시지 않겠다고 하시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거센 반발이 있을 것이란 예감 말입니다.
결혼식 날은 중간고사 기간이었기에 새벽에 천안에 있는 학교(백석문화대학)에 다녀와야 했습니다. 아침에 지하철을 탔는데 객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결혼에 반대해 저를 테러할 것 같았습니다. ‘이들이 덤벼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어떻게 죽어야 하나? 그래도 각하의 사위인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말고 의연하게 죽자. 그래야 이 집안에 누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안은 교대역에서 학교 버스로 갈아 탄 후 비로소 사라졌습니다. 학교 일을 마치고 오전 10시30분쯤 서울로 돌아오는 시외버스를 탔더니 승객이 딱 다섯 명이었습니다. 전날 밤 잠을 설쳤기에 졸음이 몰려오는데 다섯 명이 나를 해치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상상이 몰려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이 사람이 메이크업하는 곳에 도착한 후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나를 해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은 4시인데…. 결혼식장에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나, 결혼식은 무탈하게 끝날 수 있을까, 오만가지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申東旭 光一
그는 신동욱(申東旭·40)이다. 직업은 백석문화대 광고마케팅 학부 겸임교수. 그는 2007년 2월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령(朴槿·54)씨와 약혼했고, 1년 8개월 뒤인 2008년 10월13일 결혼했다. 박씨의 약혼자 시절 그는 18대 총선에 한나라당 중랑을 예비후보로 도전했다 떨어진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초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는 박근령씨보다 열네 살이 적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결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는 결혼식이 끝난 직후 MBC-TV가 들이민 마이크에 “결혼식을 무사히 끝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천기를 누설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1979년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고향인 경남 산청군 금서면 주상리에 살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빨래터에서 울고 계셨어요. 그래서 ‘엄마! 왜 우나?’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임금님이 돌아가셨다’라고 했습니다. ‘왜 돌아가셨는데?’ 하니까 ‘부하가 쏜 총에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울린 사람은 나쁘다는 생각에, ‘내가 임금님 복수를 꼭 해줄게’라고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2007년 초 이 사람과 약혼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금서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나라님의 부마가 나왔다’며 그해 4월 말 열린 동창회 체육대회에 불러주었습니다. 저는 2남5녀의 막내인데 저희 남매는 전부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덕분에 모처럼 7남매가 모이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제가 서른 살 되던 해 함께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며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산소를 잡아준 지관이 이 자리에 묘를 쓰면 지리산 천왕봉의 정기를 받은 명랑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이 산소를 쓴 후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너를 가졌다. 그때 우리 집안에서는 아들이 하나뿐이라 매우 불안해했는데, 너를 낳고는 걱정이 사라졌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약혼자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갔으니 남매들 사이에서는 자연히 저를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남매는 비워둔 고향집에 가보았는데 집이 반쯤 무너져 있었습니다. 넓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마당엔 풀이 들어차 있었고요. 그러자 형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