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료 의식의 발로였을까. 5일간 이어진 조문 풍경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웅변했다. 형식은 가족장이었으나 내용은 그 이상이었다. 일반에 공개된 빈소에는 내내 수백 명이 줄을 섰다. 분향을 하려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웬만한 유명인사 빈소를 아득히 능가하는 화환들이 아산병원 장례식장 2층을 국화꽃 향기로 채웠다. 조용필부터 장기하까지, 한국 가요사에 흔적을 남긴 음악인들의 이름이 모두 리본에 적혔다. 권양숙 여사와 문재인 의원을 필두로 정치인들의 이름도 보였다.
이 모든 것은 명백히 너무 이른, 게다가 석연치 않은 신해철의 죽음에 대한 허탈함이었다. 한 시대의 아이콘에 대한 그리움이자, 신해철이 개척하고 상징한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이었다.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
뮤지션 신해철을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배경 시대이기도 한 1988년 겨울 대학가요제였다. 발라드 가수들이 대부분이던 당시 ‘그대에게’를 들고 나온 무한궤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미 시나위, 백두산 등의 헤비메탈 밴드가 그 전해부터 TV에 적지 않게 출연하던 터라 무한궤도보다 더욱 로킹(rocking)한 사운드에는 이미 익숙했다.
문제는 리드 보컬을 맡은 사람이었다. 키보드를 치며 노래하는 것도 신선했는데, 세상에, 기타 솔로까지 하는 것이었다. 로커의 상징인 긴 머리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학생 머리를 하고 기타 속주를 구사하는 모습이란, 뭐랄까, 당시로서는 농구화를 신고 축구를 하는 것 같았다.
무한궤도는 너무도 당연하게 대상을 차지했다. 다음 날 아이들은 온통 무한궤도 얘기만 했다. 평범한 중학생에게 TV 말고는 별다른 놀 거리가 없던 때였으니, 누구나 대학가요제를 지켜봤던 것이다. “야 어제 대학가요제 봤냐. 대상 받은 애들 죽이지 않냐” “보컬 하는 애 완전 캡짱이더라. 건반도 치고 기타도 막 쳐. 열나 잘 쳐.”
음악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선희, 작품하나, 그리고 이상은까지 1980년대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이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무한궤도의 데뷔 무대에 있었다. ‘노래를 잘한다’를 아득히 뛰어넘는 ‘멋스러움’이 그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멋스러움은 한 시대의 욕망이자 축적이었으며 그리고 폭발이었다. 재능은 종종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주머니를 뚫을 정도의 재능이란 제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뚫을 만한 주머니를 만나야 한다. 신해철에게는 1980년대가 그 주머니였다.
1980년대는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왔다. 쿠데타로 세워진 정권엔 국민의 관심사를 정치에서 돌리기 위한 몇 가지 장치가 필요했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3S정책’이 나왔고 대학입학 정원이 대폭 늘어났으며 사교육이 폐지됐다. ‘12시 통행금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석유파동의 후유증이 극복되고 수출이 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컬러TV와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1960년대 중반~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아이들은 2차 베이비붐 세대라 할 만큼 많았다. 이들은 1980년대에 이르러 청년이 됐다. 두터운 중산층과 두터운 청년층. 이런 사회적 조건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