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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오지 캠핑 즐기는 87세 ‘진짜 자연인’ 박상설

  • 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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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에게도 고달픈 시절이 있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다닌 그는 졸업하자마자 6·25전쟁이 발발해 군에 입대해야 했다. 고학력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는 사병이 아닌 장교로, 대구의 육군본부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가족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가 부대 앞에서 나를 찾는다는 피켓을 들고 서 계시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가족 모두 무사히 피난을 내려왔더군요. 그때부터 제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에 여동생 다섯, 누님 한 분이 계셨죠. 스물일곱에 결혼해 아들딸까지 생기니 서른 살엔 부양가족이 자그마치 11명으로 늘었습니다. 당시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깡패가 되던가 도둑놈이 되던가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난 이도저도 싫어 부업까지 해가며 지겹도록 일만 했어요. 솔직히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모두가 못 먹고 못살던 시절, 아무리 능력 좋은 가장이라 해도 전쟁 끝에 11명의 식구를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앞만 보고 달리던 그는 어디서라도 숨통 틔울 구멍을 찾고 싶어 자연을 찾았다.

“다른 사람은 힘이 들 때 도망가느라고 술 마시고 엉뚱한 짓들을 하고 그랬는데, 난 술이라곤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거든요. 다방에도 안 다녔어요. 성격에도 안 맞고, 좋지도 않았던 거죠. 그런데 땅에 씨 뿌려서 싹 틔우고 키우는 재미는 아주 좋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으로 도망가는 길을 택했어요. 남들 술 마시고 다방 가는 돈으로 난 가평군에 땅을 샀어요. 한 평에 5원인가 할 땐데, 30만 평을 산 게지. 도망가려고. 아마 우리나라 노인네 중 내가 제일 운이 좋을 거예요.”

그 땅이 근 50년 세월 동안 그가 운영 중인 주말농장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될 즈음 가족에게 자신이 생각하던 ‘실험가정’의 모델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걸으면 낫는 병

그가 살아온 얘기를 술술 풀어놓는 사이, 가스레인지 위 주전자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었다. 캠핑할 때 즐겨 마시는 방식이라며 손잡이 달린 캠핑용 커피잔에 커피 티백을 걸쳐놓고 김이 뽀얗게 올라오는 물을 따라 흑사탕과 함께 건넸다.

“이게 내가 야외에서 커피 마시는 방식이에요. 이렇게 물을 부어도 커피가 금방 우러나진 않아요. 오랫동안 천천히 얘기하라고 그러는 거겠지. 천천히 우러난 커피를 흑사탕이랑 같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어요.”

그가 권하는 대로 달달하고 구수한 흑사탕 한 알을 입안에 까 넣은 다음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근사한 맛이었다. 아, 요즘처럼 쌀쌀한 늦가을 숲 속에서 이런 커피 한 잔 마시면 세상 근심걱정 다 잊은 듯 행복해지겠다 싶었다. 그가 책 한 권에 걸쳐 펼쳐놓은 자연예찬론에 한결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공대를 나와 오랫동안 엔지니어로 일했고, 그런 쪽엔 재주도 없었거든요. 학교나 직장 다닐 때 쓴 글이라고 해봤자 논문이며 공문, 보고서 같은 것들이었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내가 자연에서 뒹구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싶더라고요. 자연을 벗 삼아 살아온 덕분에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니 그 얘기도 해줘야 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자연과 만난 이야기를 한 10년 동안 꾸준히 써내려 가다보니 그게 책이 됐어요.

난 아직도 미사여구 같은 건 붙일 줄 몰라요. 그렇게 쓰려고도 해봤는데 그러니까 자꾸 유치해지고 글이 조작되더라고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주어와 술어만 넣고 나머지 형용사와 부사는 자연을 끼워 넣는 거라고 생각하며 씁니다. 잘 쓰려고 애쓰면 엉뚱한 얘기가 나오거든요.”

글을 잘 쓸 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는 2001년 ‘동아일보’가 주관한 투병문학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문필가다. 10년째 ‘나침반’이라는 칼럼 형식의 소식지도 e메일로 연재 중이다. ‘나침반’은 그가 운영하는 캠프나비(campnabe)라는 동호회 회원에게 뿌려지고,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매료된 지인들에게도 보내진다. 한 언론 매체엔 ‘박상설의 자연 속으로’라는 제목으로 고정 칼럼도 연재한다.

그가 이처럼 본격적으로 자연예찬론을 펼치는 캠핑족이 된 건 27년 전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커다란 사건을 만나면서부터다. 건설교통부를 거쳐 한 건설업체의 중역으로 일하던 그는 61세 되던 해, 갑작스러운 병마로 쓰러져 기나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3년 동안이나 병명을 알지 못해 병원을 전전하던 그는 급기야 미국으로까지 건너가서야 ‘뇌간동맥경색’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던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아스피린과 운동 두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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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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