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호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④

비전은 매크로하고, 지시는 마이크로했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0-12-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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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 기업이 전기車 개발해야 한다

    •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전초전 LA 회의

    • 10년간 삼성은 놀았다

    • ‘삼성 디자인은 2류’ 후쿠다 보고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4년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을 때 모습. [삼성전자 제공]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4년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을 때 모습.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의 1993년 2월 1일 LA 출장은 당초 미국의 주요 거래선과 지사를 둘러보기 위한 것이었다. 현지에 도착한 이 회장은 가전제품 매장과 할인점을 돌아다녔다. 최대 시장 미국에서의 성패야말로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니만큼 삼성 제품의 현주소를 눈으로 확인해보자는 취지였다. 

    이게 웬일인가. 삼성 제품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매장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한국에선 최고 브랜드로 통할지 몰라도 미국에선 3류 싸구려로 취급받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당시 동행한 수행원들은 “흘깃 훔쳐본 얼굴이 뒤통수를 얻어맞기나 한 듯이 내내 일그러져 있었다”고 전한다. 

    이 회장은 즉시 사장단을 LA로 불러들였다. 평소 회사에 출근도 잘 하지 않고 칩거하다시피 해온 이 회장의 갑작스런 호출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LA라니, 모두 초긴장 상태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전초전 LA 회의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허문명 기자]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허문명 기자]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은 신경영 초기(1993년 10월~1996년 12월) 비서실장으로 이 회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최근 자서전 ‘위대한 거래’를 펴내기도 한 그를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느 날 이창렬 비서팀장으로부터 ‘만사를 제치고 LA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삼성전자는 물론 주요 계열사 사장들도 다 불렀다면서 말이죠. 나는 좀 의아했습니다. 삼성시계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시계는 전량이 내수여서 수출하는 게 전혀 없는데 왜 나까지 오라고 할까 생각하며 서둘러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 회장이 묵고 있는 LA 센추리플라자 호텔에 도착하니 멕시코 티후아나 공장을 둘러보다 급히 날아온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주요 계열사 사장들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왜 불려왔는지 이유를 모르기는 다 마찬가지였지요.” 

    더 황당한 건 도착하자마자 비서팀장이 달러를 나눠 주며 백화점과 가전제품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하라는 것 아닌가. 서울에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계열사 사장들을 이 멀리까지 오라고 해놓고 쇼핑을 하라고?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다들 어리둥절했다는 게 현 전 실장 전언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 회고다. 

    “이 회장이 느낀 걸 그대로 본 거죠. 현장에서 본 삼성 제품은 형편없었으니까요. 눈에 잘 띄는 높이의 전시대에는 소니, 도시바 같은 일본 제품, 그 다음이 미국산이었습니다. 삼성 제품은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가게에선 고장 난 채로, 다른 가게에선 덤으로 끼워 파는 경품으로 내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힘들여 만든 우리 제품이 비참한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마디로 참담했습니다.”

    “삼성은 10년간 놀았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허문명 기자]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허문명 기자]

    1993년 2월 18일 임원 23명이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집합 장소인 호텔 연회장으로 모였다. 그런데 또 이게 웬일인가. 연회장 바닥에는 삼성 제품을 포함해 미국, 일본 유명 브랜드 TV, 캠코더, 냉장고, 세탁기, 카메라, 전자레인지가 모조리 분해된 채 깔려 있는 것 아닌가. 현 전 실장 말이다. 

    “훗날 한국 신문에는 ‘세계 주요 전자제품 비교 전시회가 열렸다’고만 짧게 소개됐지만 당시 행사는 이 회장이 철저히 혼자 기획하고 만들어낸 이벤트였습니다. 필립스, 소니, 제너럴 일렉트릭, 월풀 제품이 모두 해체돼 회로와 배선이 드러나 있었는데 전기 기술자가 아닌 제 눈으로 보기에도 삼성 제품은 그야말로 허접했습니다. TV만 해도 삼성 것은 배선이 이리 저리 꼬여 복잡했는데 소니는 깨끗하고 심플했으니까요.” 

    이 회장은 제품 하나하나 부품 수를 일일이 세어 보이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VCR만 해도 삼성 부품 개수가 도시바보다 30% 많은데 가격은 오히려 30% 싸다. 이러니 어떻게 경쟁이 되겠는가? 이번에 우리 상품이 얼마나 천덕꾸러기가 돼 있는지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뚜껑이 깨져 있거나 떨어져 나간 것도 있더라. ‘삼성’ 제품은 구석에 처박혀 2, 3년간 먼지를 자욱하게 뒤집어쓸 정도로 싸구려가 아니다. 이렇게 만들 거라면 이름을 반납해라.” 

    다시 현 전 실장 말이다. 

    “이 회장은 비전과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거시적인, 매크로(macro)한 안목을 갖고 있었지만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매우 치밀하고 섬세한 마이크로(micro)적인, 이른바 양면적 사고를 다 가진 분이라는 걸 절감한 현장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TV 리모컨을 들고서는 ‘리모컨에서 가장 많이 쓰는 버튼이 뭔가. 온·오프 아닌가. 필립스 것은 가운데 있는데 우리 건 찾기가 어렵다”면서 개선을 지시했죠. 그날 가전제품 분해 부품 전시는 그 자체로 매우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위대한 거래’에서 당시 이 회장 모습은 마치 목숨을 건 사람처럼 절박해 보였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누가 회장을 감(感)에만 의지한다고 말했던가. 회장은 정말 진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가까이서 본 회장은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완전히 몸이 달아 있는 청년이었고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군인이었다. 회장은 정말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이건희 혁명’에 몸을 담가 개혁에 앞장서자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사장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회의에서 전년도인 1992년 수출실적 부진 원인을 설명하던 임원 한 사람이 “계열사들 책임도 있다”는 식으로 남 탓을 하는 듯한 말을 하다가 “저런 식으로 남 탓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 삼성에 붙어 있는가”라는 이 회장의 불호령을 듣고 퇴장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앞으로 전기차 나온다

    이 회장이 LA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을 읽다보면 당시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깊게 일에 집중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미국에서 괜찮은 골프채 드라이버 하나 값이 500달러 이상이다. 부품이 1000개가 넘는 삼성 27인치 컬러TV 한대가 400달러 내외다. 말이 된다고 보나. 

    -삼성은 미국에서 지난 20년간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멤버십 피(fee) 치고는 너무 오래, 많이 지불했다. 국가적, 그룹적, 사업부별, 품목별로 장애요인은 뭔가. 미국 땅이 워낙 넓으니 전역에 걸쳐 시장 점유율을 가져가지 말고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보는 건 어떤가. 

    -앞으로 미국 법이 전기자동차를 10%까지 생산하도록 돼 있다. 휘발유차는 점자 전기·전자화 돼 가고 있다. 전자 업종에서 자동차 부품, 전기자동차를 개발해야 한다. 

    -2년 전에도 마쓰시다 VCR을 내가 직접 뜯어보고 많은 지적을 했다. 이후 뭐가 변했나. 일본 업체들과 전략·전술적으로 협력하는 문제를 검토하라. 

    -해외여행 간 한국 사람들이 수출된 국산 가전제품, 카메라가 국내에서 살 때보다 더 싸다고 사 갖고 귀국한다. 국내 시장에서는 개방으로 밀려들어온 외국 제품이 우리 것보다 비싸게 팔린다. 이와 관련해 정부와 상의할 일은 없는가. 

    -서울에서 점유율이 경쟁사보다 떨어지는데 여성들을 중점적으로 파고들어라. 여성들이 모인다 싶은 곳에는 다 가봐라. 

    -‘김치 냉장고’ 광고는 금성에 졌다. 노란 바탕색 빼고 ‘기능’ 부분을 확대하라. 광고문구 중에서 ‘추운 게 대순가(대수인가)’ 하는 게 있던데 ‘대순가’란 표현이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먹히는 표현인가. 제일기획 수준이 이 정도인가. 


    이 회장은 2월 18일부터 나흘간 현장에서 임원회의를 주재하고 3월 2일 LA를 떠나 도쿄로 날아간다. 그러곤 3월 4일 계열사 사장단 46명을 도쿄로 불러 모은 뒤 세계 전자시장의 메카로 불리던 아키하바라를 샅샅이 누비며 일본의 경쟁력을 연구하라고 지시한다. 서울로 돌아온 이 회장은 3월 22일 삼성그룹 창립 55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무대에 섰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이뤄낸 일을 지키고 유지하는 ‘수성(修城)’의 경영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뛰어넘는 ‘제2의 창업’을 하겠다고 선언한 지 딱 5년 되는 날이었다. 해외시장을 돌아보며 삼성의 수준을 확인한 그의 말에는 비장감이 서려 있었다.
     
    “앞으로 2000년까지 남은 시간은 7년입니다. 삼성이 세계초일류 기업으로 가느냐, 주저앉고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마지막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술과 정보야말로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먼 훗날 삼성의 역사에서 여러분과 내가 이 시대를 빛낸 주인공으로 함께 기록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월로 접어들면서는 대중 앞에 서는 광폭 행보를 시작한다. 12일 중소기업 경영자 대상 강연, 15일 고려대 강연, 17일~20일 KBS 라디오 경제전망대 출연, 26일 한국과학기술원 강연 등이었다. 전례 없던 이런 행보는 자신의 개혁 메시지가 회사 차원을 넘어 국민들의 공감대 없이는 구현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다는 게 훗날 분석이다.

    신경영 선언 방아쇠, 후쿠다 보고서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온 ‘은둔의 경영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봤지만 당시 그의 생각과 메시지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같은 그의 행보를 예민하게 포착한 쪽은 미국이었다. 5월 3일자 미국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은 이 회장 얼굴을 표지로 장식하고 그의 개혁 메시지를 커버스토리로 다룬다. 

    이 회장은 6월 다시 도쿄로 날아간다. 그가 당시 묵은 오쿠라호텔은 신라호텔과 제휴 관계를 맺은 곳으로 이 회장과도 인연이 깊었다. 선대 회장과 도쿄에 갈 때마다 묵었던 곳이고 도쿄로 선을 보러온 아내 홍라희 여사와 장모를 묵게 한 곳도 이곳이었다. 꼭 10년 전인 1983년 2월 8일 신년 사업구상을 위해 도쿄에 머물던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훗날 삼성의 운명을 바꿀 대규모 반도체 투자에 나서기로 결심한 곳도 그곳이었다. 

    1993년 6월 이 호텔에서 삼성의 운명을 바꾸는 신경영 선언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벌어진다. ‘후쿠다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후쿠다 보고서는 삼성전자 일본인 디자인 고문이었던 후쿠다 다미오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1975년 교토(京都) 공예섬유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같은 해 NEC(일본전기) 디자인센터에 입사한 뒤 1989년 독립해 ‘오피스 후쿠다’를 설립하자마자 삼성전자에 영입됐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도쿄에서 후쿠다 고문을 비롯해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일본인 고문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들의 솔직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2015년 6월 4일 삼성 사내 매체 ‘미디어 삼성’은 신경영 22주년을 맞아 후쿠다 전 고문을 직접 만났다. 삼성에서 10년을 일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공예섬유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육성에는 후쿠다 보고서에 무슨 내용을 담았는지, 이 회장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이 회장의 디자인 철학은 무엇이었는지, 삼성 제품을 비롯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수준이 어땠는지 등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많다. 인터뷰 중 일부를 소개한다.

    “모방에만 급급한 삼성은 2류”

    -당신이 입사한 1989년 삼성 수준은 어땠나. 

    “다른 나라 제품을 모방한 것이 많아 컬처 쇼크(문화 충격)를 받았다. 소니가 1류라면 파나소닉은 1.2류, 샤프나 산요는 1.5류라고 할 때 삼성은 2류라는 느낌이 들었다. 삼성뿐 아니었다. 서울 시내 백화점에 가보면 일본이나 유럽 어딘가에서 본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 많이 보였다. 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어서 디자이너들에게 ‘절대 남의 것 흉내 내지 마라. 오리지널이 아니면 세계 시장에서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는 2004년 10월호 ‘니케이(日經) 디자인’과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삼성의 디자인부 상태는 한심했다. 30대 과장 1명, 1~2년차 젊은 디자이너 10명이 다였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도면(圖面) 그리는 법부터 가르쳐야 할 만큼 수준이 낮았다. 디자인에 대한 사고방식도 일본 것을 흉내 내는 걸 당연시해서 상품 기획서에 ‘소니 ○○의 디자인처럼’이라고 쓸 정도였다.” 

    -문제는 뭐였나. 

    “디자이너들은 구태의연한 교육을 받은 경우가 많아 최신 디자인 콘셉트나 프로세스 지식이 부족했다. TV 신제품을 고민한다고 할 때 설계자가 내부를 결정하고 외형을 디자인해 달라고 하면 디자이너는 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했다. 순서가 완전 반대여야 한다고 말했다. 소비자 편의성이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정하는 게 먼저라면서 말이다. 녹음기를 만든다고 할 때 책상 위에 놓고 녹음하기 괜찮은가, 버튼을 실수 없이 누르기 괜찮은가, 이런 걸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상품기획, 디자인, 설계 부서가 서로 연계되지 않으면 수준 높은 제품이 나오지 못하는데 삼성전자는 다 따로따로였다. 

    한국 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는 유교정신이 있는데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심해 상사 말은 모두 맞다고 여겼다. 부하 직원들이 좋은 디자인을 제안해도 좀처럼 채택되지 못했다. 디자인은 정답이 없다. 젊은 사람들 감성이 맞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 상대가 부장이든 임원이든 설득해야만 한다. 나는 디자이너들에게 ‘싸워도 괜찮다’고 했다. 

    실제로 정보통신 부문에서 설계파트와 디자인실이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설계 파트 쪽은 원가를 10원이라도 낮춰야 한다고 했고 디자이너는 그렇게 하면 이미지 손실이 커 그걸 돈으로 따지면 1000만 원도 넘는다고 맞섰다. 결국 화가 난 디자이너가 자기가 만든 모형을 밟아버리고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후쿠다 고문은 입사 후 첫 3년간 보고서를 매달 만들어 제출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1993년 6월 이 회장이 직접 중요한 내용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후쿠다 보고서’를 만들고 회장을 만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서 파장이 대단했다.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와 다른 일본인 고문이 만든 두 개의 보고서를 읽고 크게 화를 냈다고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임원들을 차례차례 불러들였고 이어 굉장한 회의가 시작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당시 나는 일본에 있었는데 재팬삼성 직원으로부터 ‘앞으로 한두 달간 서울에 가지 않는 게 좋겠다. 자칫 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두 달 뒤 한국에 갔을 때 분위기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임원 대상 강연 요청도 늘었고 잘 모르는 임원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기점으로 위기감이 단번에 조성되면서 삼성 내부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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