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양식 도입해 개축한 창덕궁
일제의 개축으로 권위 잃고 응접실 변모 인정전
자동차, 샹들리에 등 고가품 궁에 들어왔지만…
장식품과 함께 구경거리 돼버린 왕실과 왕궁
‘달빛기행’은 창덕궁 야간개방 행사로 2010년부터 매해 이어지고 있다. [동아DB]
인정전에 샹들리에가 매달리게 된 것은 1909년 봄. 순종 때다. 조선시대 궁궐에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이국적이고 신기하다. 어찌 보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좀 달라진다. 무언가 쓸쓸함이 몰려온다.
개축으로 서양 문물 들여온 창덕궁
조선의 마지막 왕 그러니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 그는 황제로 즉위하고 4개월 지난 1907년 11월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移御)를 한 달 앞둔 1907년 10월, 순종은 창덕궁의 수리를 명했다. 고종이 창덕궁을 떠난 이후 줄곧 방치돼 왔기 때문에 여기저기 손을 볼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08년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됐다. 창덕궁뿐만 아니라 창경궁의 개조 작업도 함께 이뤄졌다.순종이 명했다고 하지만 실제 작업은 일제가 맡았다. 당시 궁내부(宮內府)의 일본인 세력이 이 공사를 주도했다. 배후는 당연히 통감부(統監府)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들은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여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며 순종의 외로움을 달래고 순종의 여가 생활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리하여 궁전 곳곳에 근대식 설비를 도입하고 건물 실내를 서양식으로 고쳤다. 이에 그치지 않고 창경궁엔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까지 만들었다. 창덕궁의 개축 공사는 1909년 봄 마무리됐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궁궐에는 다양한 서양 요소가 도입됐다.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이나 정관헌(靜觀軒) 같은 서양 건축물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전통 건축물 인테리어를 서양식으로 꾸미고 서양식 가구를 배치하는 식이었다. 인정전도 크게 바뀌었다. 인정전을 감싸고 있는 행각(行閣)이 바뀌었다. 기존의 행각을 철거하고 전과 다른 모양의 행각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그 용도도 바뀌었으며 당구대, 커튼박스, 난로, 카펫 등 행각 내부 또한 서양식 설비가 들어섰다.
인정전, 의례 공간에서 응접실로 전락
인정전 마루는 개축을 거치며 전돌(벽돌의 일종)에서 일본식 나무마루로 바뀌었다. [동아DB]
일제는 인정전의 바닥을 일본식 나무마루로 바꾸었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바닥은 늘 벽돌의 일종인 ‘전돌’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 건물 정면의 창호(窓戶)를 완전 개방해 중요한 의례를 거행했다. 창호를 활짝 열어젖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고 의례 공간으로 활용했다. 건물의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면서 인정전 건물은 장중함을 연출했다. 전돌 바닥은 이러한 용도에 적합한 구조였다.
그런데 내부 바닥을 나무마루로 바꾸고 전면의 창호를 한가운데 칸만 개방하도록 고쳤다. 가운데칸 창호를 제외하고 그 좌우의 창호는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유리창을 덧댐으로써 활짝 열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인정전 정면은 모두 개방할 수 없게 됐고 결국 인정전의 내부와 외부는 단절되고 말았다.
언뜻 보면 이를 단순한 기능 변화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덕궁 정전으로서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일제는 개축을 통해 인정전에서 조선(대한제국)의 의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했다. 인정전은 본질적 기능 가운데 하나를 잃은 셈이다. 결국 인정전은 단순한 접견실 겸 연회 장소로 전락하게 됐다. 순종 부부가 이곳에서 맞이하는 사람은 주로 통감이거나 총독,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1909년 창덕궁의 현실이었다.
경복궁 헐어 만든 자재로 창덕궁 개축
왕의 집무실인 창덕궁 희정당 샹들리에는 3개씩 6세트가 매달려있다. [동아DB]
왕과 왕비의 침전인 창덕궁 대조전에는 6개의 등이 걸려있는 샹들리에가 매달려있다. [동아DB]
우선, 희정당 진입부에 돌출형 현관을 지었다. 차량이 진출입하는 공간으로, 일종의 캐노피 같은 형태이다. 일본 메이지궁전의 현관과 비슷한 모양이다. 1920년대 초 영친왕 부부가 승용차를 타고 희정당에 도착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이 돌출 현관의 용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순종 부부 또한 이곳에서 어차(御車)를 타고 내렸다.
최고급품으로 장식한 궁궐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어차. 국내 현존 차량 중 가장 오래된 차다. [동아DB]
희정당과 대조전 구역의 행각도 새로 만들었고 건물 내부에 욕실, 화장실, 이발실을 조성해 서양식 공간으로 꾸몄다. 실내에 전기·위생·훈증난방 설비를 도입했고, 유리·철물 등의 새로운 건축 재료를 사용했다. 실내에는 샹들리에와 전등, 커튼박스, 카펫, 서양식 의자와 탁자, 거울과 침대, 세면대와 욕조 등 서양식 가구를 들여놓았다. 모두 입식(立式) 생활공간으로 꾸민 것이다.
희정당 접견실의 가구들은 대체로 프랑스의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양식이었다. 의자 가운데에는 대한제국의 상징물인 이화(李花·오얏꽃) 무늬가 디자인된 것도 있다. 이는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다.
창덕궁의 여러 전각은 1908, 1909년을 거치며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 무렵이면 조선(대한제국)은 이미 주권국으로서의 위상을 대부분 잃어버린 때였다. 궁궐의 존재 의미도 상실한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조선의 궁궐을 마음 놓고 건드렸다. 인정전은 의례 공간에서 멀어졌고 희정당, 대조전과 함께 왕실의 접객 장소로 변해 버렸다. 일제는 “순종을 위한 공간 구성”이라고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없다. 그저 홍보용이었을 뿐이다.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궁궐을 개화한 공간으로 꾸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을 홍보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서양식 접견실이었다.
화려한 만큼 서글픈 샹들리에
접견실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장식은 샹들리에였다. 인정전 천장은 샹들리에로 가득하다. 인정전 샹들리에는 자못 화려하고 육중하다. 노란 천으로 휘감은 뽀얗고 큼지막한 전등들. 축구공보다 더 큰 전등들이 7개씩 짝을 이뤄 천장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 틀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무늬를 돌아가면서 디자인해 넣었다.지금이야 전기도 흔하고 샹들리에도 친숙하지만 110여 년 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는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전기가 도입된 것은 1887년.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에 처음 전깃불이 들어왔다. 에디슨이 전구를 활용한 이후 불과 8년 만이었다. 그 전깃불이 20여 년 뒤 창덕궁에도 들어왔고 샹들리에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샹들리에 전깃불은 첨단 서양 문물이었고 근대의 상징이었다.
인정전 샹들리에가 육중하면서도 고풍스럽다면 희정당과 대조전의 샹들리에는 단출하고 간명하다. 희정당 접견실의 샹들리에는 3개씩 6세트가 매달려 있다. 대조전 샹들리에는 천장 한가운데에 6개의 등이 걸려 있는 모습이다.
희정당 접견실 샹들리에를 보면 그 뒤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대형 벽화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배경처럼 펼쳐져 있다. 희정당 접견실 벽에 대형 벽화를 붙인 것은 1920년 희정당, 대조전 구역을 재건할 때였다. 희정당뿐만 아니라 대조전에는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의 ‘백학도(白鶴圖),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의 합작 ‘봉황도(鳳凰圖)’를, 경훈각에는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의 ‘조일선관도(朝日仙館圖)’,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를 그려 벽에 붙였다. 당시 한국의 전통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그린 웅장하고 화려한 대형 작품들이다.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호방하고 화려하다. 이를 두고 우리의 전통 요소와 서양의 건축 요소가 조화를 이룬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구경거리 돼버린 대한제국 왕실
하지만 희정당은 편전(便殿)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접견실로 바뀌었다. 나라가 망했으니, 편전은 필요 없는 장식이 돼버렸고, 그래서 샹들리에 뒤편으로 보이는 금강산 그림이 당당하고 우렁차면서도 한편으로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저 샹들리에와 금강산 그림을 배경으로 순종은 일본이 보낸 총독과 그 일행을 만나야 했을 것이다.인정전은 내부와 외부가 단절되면서 의례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희정당은 편전 기능을 잃고, 외부인을 접견하거나 그들과 식사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행하는 접견과 식사는 일제의 홍보 수단이기도 했다. 일제는 1908년 인전정 앞마당에서 품계석(品階石)과 박석(薄石)을 걷어내고 모란 같은 꽃을 심었다. 인정전 앞마당을 관광용 정원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창덕궁을 투명한 유리그릇 속에 담긴 물체처럼 누구나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내외의 손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하며 궁전이든 후원이든 그 희망에 따라 관람할 수 있게 개방하여 왕가의 근황을 직접 설명하기도 하면서 왕가의 현재를 알리려 힘을 기울인다. 이로써 이(李)왕가에 대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후하게 예우하고 있으며 이왕가가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외국인이 오해를 푸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곤도 시로스케,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7, 118쪽)
요즘엔 밤에도 고궁을 관람할 수 있다. 창덕궁 달빛기행 프로그램도 그중 하나다. 야간에 창덕궁을 둘러보는 것은 환상적인 경험이다. 달빛기행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인정전과 희정당의 샹들리에가 떠올랐다. 100여 년 전 샹들리에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창덕궁의 밤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순종과 순정효황후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 인정전 마루바닥을 거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당시엔 전기 공급이 원활치 않아 전구가 자주 깜박였고 그로 인해 수리비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전구가 제 역할을 못 한 것이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 모양이 마치 건달 같다고 해서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깜박깜박하는 전등. 당시 우리의 국운과 비슷했던 것일까. 20세기 초 신문명을 상징하던 창덕궁의 전깃불 샹들리에. 샹들리에가 설치되고 그다음 해인 1910년 창덕궁에서 조선의 오백 년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내전의 흥복헌(興福軒)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일주일 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인정전 샹들리에는 명멸하며 망국을 지켜보았다. 그 불빛에는 ‘제국의 황혼(黃昏)’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우리네 근대의 서글픈 두 얼굴이라고 할까. 그 서글픔까지 이제는 우리의 기억이 됐고 나아가 인정전의 미학이 됐다. 역설적이다.
현재 희정당과 대조전 보수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여러 전등과 샹들리에를 청소, 보수하고 점등 실험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희정당과 대조전의 내부를 공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창덕궁 곳곳의 샹들리에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확인되지 않았다. 어디서 만들었고 어떻게 들여왔는지. 어딘가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