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옥선, 노잡이·전투원 공간 분리한 본격적 군선
물 먹으면 팽창, 선체 내구도 높이는 나무못 이용
쌍돛대·평평한 배 바닥 갖춰 한반도 해역에 최적화
도망가는 척하다 90° 회전해 화포 발사
화포 발사 반동에 부서진 대형 왜선 ‘아타케부네(安宅船)’
조선 승자총통 사거리 1km vs 일본 조총 100m
영화 ‘명량’ 속 명량해전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왜구 침략의 트라우마
1392년 건국 직후 조선은 수군 양성에 힘썼다. 조선 전기 수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해 별도의 군종이 됐다. 고려 말 왜구 침략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조정은 주요 항구에 지휘관인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조선 초기 수군의 으뜸 벼슬)와 절제사(節制使)를 두었다. 이들 밑에 도만호(都萬戶·일반 만호보다 높은 직책), 만호 등을 배치해 수군을 지휘했다.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수군의 수는 약 5만 명이었다. 조선군 전체의 절반에 해당한다. 주로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 노 젓기에 익숙한 사람을 수군으로 뽑았다. 육군이 한 해 3개월씩 4교대 근무인 데 반해 수군은 2교대 근무였다. 수군은 해상 훈련 외에도 군선 수리와 축성은 물론 공물·진상품으로 쓸 해산물까지 채취해야 했다.
1485년 편찬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군도 육군처럼 ‘진관(鎭管)체제’에 따라 편성됐다. 진관체제는 지방군이 각 요충지를 중심으로 외침을 스스로 막는 체제다. 각 도의 요충지마다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이 설치됐다. 규모가 가장 큰 주진의 지휘관은 수군절도사였다. 거진과 제진은 각각 수군첨절제사와 수군만호가 지휘관이었다.
“육상에서 왜구 막자”
건국 후 시간이 지나며 조선 수군은 약화됐다. 수군은 진관체제에 맞춰 만호의 지휘 아래 군선에서 대기하며 해상 방어를 담당해야 했다. 대부분의 장정들은 해상근무가 어렵고 힘들어 수군 입대를 기피했다. 나라에 포(布·베)를 납부하고 합법적으로 군역을 면제받는 사람도 늘었다. 이에 성종 때부터 함상 근무 대신 진에 성보(城堡·적을 막기 위해 성 밖에 임시로 만든 소규모 요새)를 설치하고 수군도 육상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수군과 육군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중종 때 해전을 포기하고 육상에서 왜구를 막자는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도 등장했다. 결국 수군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이것은 당시 운용한 군선의 숫자로도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와 ‘경국대전’(1485)을 비교해 보면 군선은 829척에서 737척으로 100척 가량 줄었다. 수군의 수는 5만177명에서 4만8800명으로 줄었다. 15세기 중반 무군선(無軍船·수군이 배치되지 않은 예비 군선)은 전체 군선 829척 중 단 57척이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전체 군선 737척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49척이 무군선이었다. 수군 병력과 군선의 수가 줄어든 반면, 무군선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수군 전력의 약화를 보여준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전용’ 판옥선
조선 초기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잠잠했으나 온전한 평화는 아니었다. 왜구는 삼포왜란(1510)과 을묘왜변(1555) 등 몇 차례 조선을 침략했다. 기존 진관체제가 왜구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에 선조는 임진왜란 발발 전,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를 도입했다. 제승방략은 유사시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이 지방군을 이끌고 적침에 맞서는 체제다. 적의 국지 도발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임진왜란처럼 정규군과 벌이는 전면전에서 한계를 보였다. 특히 지휘관이 전장 지형과 부하들의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약점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육지에서 연전연승한 이유다.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수군의 경우도 유사시 중앙에서 달려온 지휘관이 지휘를 맡아야 했다. 수군은 작전 지역의 해로(海路)에 능통해야 한다. 각 군선을 운용하는 노하우도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없다. 이런 특성 때문에 수군은 제승방략하에서도 개별 함대·군선 지휘관의 재량권이 강조됐다. 그 덕에 수군은 임진왜란 개전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에 맞설 수 있었다.
대비 태세는 해이해졌지만 강력한 주력함이 조선 수군을 지탱했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주력함은 1555년(명종 10년)에 개발된 판옥선이었다. 오늘날 조선 수군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거북선은 임진왜란 중 가장 많이 보유했을 때도 7척 내외에 불과했다. 반면 판옥선은 임진왜란 발발 2년차에 그 수가 200여 척에 달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대선(大船)·중대선(中大船)·중선(中船)·쾌선(快船)·맹선(孟船)·별선(別船) 등 총 13종의 군선을 829척 보유했다. 숫자는 많았지만 명확한 규격에 따라 건조하지 못했다. 전투력의 한계가 뚜렷했다. 이에 1461년(세조7년) 신숙주는 기존 군선을 개량해 전투와 조운(漕運)을 겸하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1465년 개발된 것이 병조선(兵漕船)이다. 이름 그대로 군사작전(兵)과 조운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배다. 유사시 전시체제로 재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획기적 방법이었다. 평소 선체 윗면의 상장(上粧·선체 최상층의 갑판)을 철거해 조운선으로 활용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상장을 설치해 군용으로 썼다.
1485년(성종16년) ‘경국대전’에서 병조선은 맹선(猛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맹선의 ‘맹(猛)’은 재빠르다는 뜻이다. 여전히 조세 운송과 전투 겸용이었다. 크기에 따라 대·중·소맹선으로 구분했다. 대맹선은 군사 80명이 탑승할 수 있었고, 조운선으로 사용할 때 곡물 약 800석(石·144㎏) 정도를 운반할 수 있었다. 맹선은 전투보다 조운에 더 많이 쓰였다. 그 와중에 삼포왜란(1510년) 등 왜구가 여러 차례 침입했다. 왜구와의 싸움에서 맹선이 전투 임무 수행에 부적합하다고 드러났다. 적선보다 느리고 둔했던 것이다.
명종 이후 왜구도 중국에서 화포를 일부 도입했다. 대형 군선을 만들고 선상에 방패를 설치해 중국·조선 정규군과의 싸움에 대비했다. 이에 맹선이 아닌 새로운 전투함이 개발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오늘날로 치면 새 무기체계에 대한 소요(所要)가 제기된 것이다.
1555년(명종10년) 조선은 덩치가 크고 화력을 대폭 보강한 전투 전용 선박을 개발했다. 바로 판옥선이다. 점점 대형화되는 왜구의 군선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판옥선을 선체 길이 20m 내외 크기에 100명 이상이 탑승할 수 있는 큰 싸움배로 규정했다. 판옥선을 일컬어 ‘작은 성이나 제방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넓어진 갑판에 화포 배치해 화력 증강
조선 수군 ‘판옥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배의 크기가 두 배 이상 커지며 화력도 강화됐다. 대맹선 정원은 80명이었으나 판옥선에는 125명 이상이 탑승했다. 격군이 없어 넓어진 상갑판에 대포를 더 많이 설치해 화력을 높였다. 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판과 여장(몸을 숨기고 활을 쏠 수 있도록 설치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그 높이가 상당히 높아 일본 수군의 장기인 백병전·창검술이 무력화됐다. 상갑판 위에 나무로 만든 2층 누각을 세워 지휘소로 활용했다.
한편 당시 일본 수군의 주력함은 세키부네(関船)였다.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安宅船)와 고바야부네(小早船) 사이의 중형 전함으로 약 70명이 승선했다. 아타케부네는 ‘집이 달린 배’라는 뜻의 대형 군선이었다. 일본에서 ‘해상의 성’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일본 전국시대 봉건 영주들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배였다. 실제 전투보다 장수들의 기함으로 쓰였다.
‘집 달린 배’ 아타케부네
일본 군선과 조선 군선은 중요한 구조적 차이를 보였다. 우선 선체를 만드는 목재가 달랐다. 일본 군선은 삼나무와 전나무를 썼다. 소나무에 비해 덜 단단한 데다 판재가 얇아 배를 제작하기 쉽다. 판재가 얇으면 배가 가벼워져 기동력이 향상된다. 반면 무거운 화포를 다량 실을 수 없고, 조선의 단단한 판옥선과 충돌하면 선체가 쉽게 깨졌다. 일본 수군의 주력 전선 세키부네와 기함으로 쓰인 아타케부네 모두 판옥선에 들이받히면 속수무책이었다.판옥선의 주재료는 단단하고 두꺼운 소나무 판재였다. 강도와 내구성이 높다. 소나무로 만든 판옥선은 속도가 느렸지만 대형 화포를 다량 적재해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목재를 결합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여러 장의 얇은 판재를 겹치는 데 쇠못을 이용했다. 조선은 나무못으로 두툼한 소나무 판재를 이어 붙여 배를 만들었다.
조선 특유의 군선 건조 방식이 잠시 ‘탈선’한 적도 있었다. 1430년(세종 12년) 조정은 나무못을 사용하던 기존 선박 건조 방식을 바꿀지 검토했다. 일부 신료가 군선에 단일 판재와 나무못을 사용하면 내구성이 낮아진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일본 배는 여러 장의 판재를 쇠못으로 결합해 튼튼하면서도 가볍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이에 따라 세종 때 얇은 판재 여러 장을 쇠못과 나무못으로 결속해 만든 군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군선의 속도가 빨라졌지만 내구력은 낮아졌다.
이런 문제점을 간파해 전통적 군선 건조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인물이 바로 신숙주였다. 1473년(성종 4년) 신숙주는 “왜선을 관찰하니 판자가 얇고 쇠못을 많이 썼다. 왕래하는데 경쾌하고 편하지만 배가 요동치면 못 구멍이 차츰 넓어져 물이 새기 때문에 배가 쉽게 썩는다”며 일본식 군선의 약점을 지적했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 25년) 서장관으로서 일본을 직접 방문했다. 현지 사회상을 관찰해 ‘해동제국기’를 저술했다. 그는 “일본에서 갑자기 해적의 기습을 받았으나 (타고 있던 조선식 배의) 돛을 달고 항해해 곧 따돌렸다”며 조선식 배의 기동력도 손색없다고 지적했다. ‘일본통’인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나무못을 이용한 군선 건조 방식으로 회귀했다. 판옥선 건조의 기본 틀이기도 하다.
판옥선은 나무의 접합 부위에 ㄱ자와 ㄴ자 모양의 홈을 판 후 나무못으로 잇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음새 부분은 외부 충격을 받을수록 더욱 견고하게 결합됐다. 나무못은 바닷물을 머금으면 부피가 팽창해 이음새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선박의 손상 없이 해체해 수리하기도 용이했다. 반면 쇠못을 사용한 일본은 군선은 못과 나무가 완전히 결합하지 못했다. 선체에 미세한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음새의 쇠못이 녹슬어 배의 전반적 내구도가 떨어졌다.
일본 수군, 대형 군선도 화포 3문 탑재가 한계
양국 군선은 배의 바닥 구조도 달랐다. 판옥선은 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었다. 물에 닿는 면적이 넓어 속도는 느리지만 안정적이었다. 한반도 서해·남해처럼 수심이 낮고 조수차가 큰 바다에서 운용이 용이하다. 전투 중 필요하면 제자리에서 360° 급선회도 가능했다. 조선 수군의 강점인 화포를 운용하기 유리한 조건이었다. 화포 발사에 따른 반동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 것도 평저선의 장점이었다.반면 세키부네는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이었다. 선체 바닥이 V자 형태로 좁다 보니 물의 저항을 덜 받아 속력이 빨랐다.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운용하거나 해협을 건너기에 유리했다. 다만 회전 반경이 커 방향 전환이 어려웠다. 조수 차가 크고 파도가 세게 치는 바다에서 기동하는 것이 불리했다.
두 나라 배의 돛도 달랐다. 조선과 일본의 군선은 기본적으로 노선과 범선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바람을 이용한 장거리 항해를 할 때는 돛을 이용했다. 전투에 돌입해 섬세한 기동이 필요하면 격군이 노를 저어 움직였다. 돛 하나로 움직이는 외돛배인 일본 군선은 순풍만 이용할 수 있었다. 반면 판옥선은 쌍돛대를 달아 역풍이 불어도 갈지(之)자 모양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며 섬·암초가 많은 조선 해역에 최적화된 배였다. 홈(home)경기에선 절대 질 수 없는 무적함이었다.
판옥선의 전투력을 극대화한 ‘화룡점정’은 화포였다. 조선은 고려 말의 화포 제작·운용 기술을 계승해 발전시켰다. 크고 튼튼한 선체가 장점인 판옥선은 포 발사에 따른 충격을 충분히 견뎠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에 천자총통(天字銃筒)·지자총통(地字銃筒) 등 다양한 화포 약 24문을 탑재했다. 승함한 전투원은 개인 화기인 승자총통(勝字銃筒)과 활로 무장했다.
반면 일본 수군은 선상에 화포를 거의 탑재하지 못했다. 세키부네는 크기가 너무 작아 화포를 탑재할 수 없었다. 아타케부네에 장착한 화포를 시험 발사하자 선체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된 일도 있었다. 결국 화포 3문 정도를 설치하는 것이 한계였다. 일본 수군 지휘부가 화포 탑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 수군은 조총과 칼을 앞세워 함상 백병전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조선 수군이 보유한 화포 중 가장 강력한 천자총통은 구경 13cm에 사거리가 900보(1.08㎞·1보는 1.2m)에 달했다. 일본 군선을 원거리에서 제압할 수 있었다.
조일 양국 수군의 무기체계는 판이했다. 그 차이는 전술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일본은 적함에 빠르게 접근해 조총을 쏘거나, 갈고리 달린 밧줄을 상대방 배에 걸고 올라타 백병전(白兵戰)을 치렀다. 일명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다.
조선 수군은 굳이 적함에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군 조총 사거리(100m)보다 멀리 떨어져 포를 발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격을 피해 도망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90° 회전해 현측(舷側·배의 좌우 측면)의 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또 수심이 얕은 곳으로 유인해 일본 군선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일본 군선은 함상 백병전을 시도하기 위해 접근하다 화포 세례에 침몰하거나 좌초하기 일쑤였다.
朝·日 해전, 포병과 보병의 싸움
일단 일본 수군이 판옥선에 접근하는 데 성공해도 난관이 있었다. 통상 판옥선의 선체 높이는 세키부네보다 높았다. 일본 수군이 백병전을 하려면 사다리를 타고 배 위로 올라가야 했다. 조선 수군은 높은 갑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승조원의 수는 아타케부네(노꾼 90명, 전투원 200명)가 판옥선(노꾼 110명, 전투원 50명)보다 많았다. 일본의 수군 병졸은 조총·활은 물론 칼과 창을 지닌 보병이었다. 적함 승조원보다 많은 머릿수가 중요했다. 반면 조선 수군의 병졸은 화포를 운용하는 포병에 가까웠다.이순신은 조선 수군·군선의 강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하고 구현해 냈다. 세계 해전사의 흐름을 보자. 유럽의 경우 1571년 노선 시대의 마지막 해전인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다. 1588년에는 범선 시대의 시작을 알린 칼레 해전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조선 수군은 유럽의 노선·범선의 결합 형태인 판옥선을 운용했다. 완전한 범선은 아니지만 전술 면에서 범선 시대의 함포전을 구사한 셈이다. 노선 시대의 백병전에 머문 일본 수군이 함포전을 구사한 조선 수군을 이기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