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호

[노정태의 뷰파인더⑲] 문재인 팬덤에서 보이는 친박연대의 그림자

‘부족주의’에 끌려 다니는 한국정치

  •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입력2021-01-31 10: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우상호·박영선의 ‘文대통령 생일축하’

    • 애착·동일시·모방·투사로 이어지는 팬덤

    • 21세기는 다시금 ‘부족의 시대’

    • 아이돌 팬클럽 닮은 정치인 팬클럽

    •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 敵이 필요

    • 투표용지와 스마트폰 통한 패싸움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2017년 4월 27일 경기 성남시 야탑역 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집중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문 후보의 연설에 호응하고 있다. [동아DB]

    2017년 4월 27일 경기 성남시 야탑역 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집중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문 후보의 연설에 호응하고 있다. [동아DB]

    1월 24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라디오에 출연해 “오늘은 문 대통령님의 69번째 생신”이라며 “축하드린다”고 했다. 같은 날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오늘 문재인 대통령님 생신. 많이 많이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입니다!!! 벌써 대통령님과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논하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라고 썼다. 

    두 사람 모두 여당 내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생일 축하를 주고받는 사적 친분이 있지는 않다. 그들은 왜 이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경선 때문이다. 일반 유권자 50%와 권리당원 투표 50%를 합쳐 후보를 결정하는데, 투표에 나설 만큼 적극적인 당원들은 문 대통령의 열혈 팬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문재인 팬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 당선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을 타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라가 눈치를 보는 나라보다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민주당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경선에 임하는 정치인이 문 대통령 팬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 않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집단을 조율하는 정치 제도다. 유권자는 연령, 지역, 학력, 소득, 성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된다. 정치인은 자신이 중요시하는 의제와 유권자가 원하는 의제를 조율해 선거의 승리를 꾀한다. 하지만 팬덤 정치는 이와 같은 통상적 기준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듯 하지만,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느슨한 애착에서 완전한 몰입까지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1월 27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에서 열린 ‘민주당 정책엑스포 in 서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1월 27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에서 열린 ‘민주당 정책엑스포 in 서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필자는 세상 속 온갖 주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팬의 심리가 그 중 하나다. 

    스포츠가 주는 즐거움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손흥민이 멋진 골을 넣는 모습을 보면 즐겁고 흥분된다. 하지만 손흥민의 소속팀인 토트넘 핫스퍼를 응원하며 승패에 일희일비하고, 라이벌 팀인 아스날에 분노하며 적개심까지 드러내는 행태는 잘 이해하지 못 하는 편이다. 

    스포츠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수 팬, 영화 팬, 드라마 팬, 수많은 팬이 뭉쳐 서로 화를 내고 공격한다. 왜 사람들은 자신과 거의 무관한 집단에 가상의 소속감을 느낄까? 본인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고, 정서적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때로는 폭행이나 그보다 더 심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걸까? 

    영국의 사회학자 앤드류 튜더(Andrew Tudor)는 팬덤이라는 대중문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1969년 학술지 ‘스크린’(Screen)에 ‘영화와 그 영향의 측정’(Film and the Measurement of its Effect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대중문화 소비자가 팬으로서 받는 영향을 네 가지 모델로 정리했다. 

    첫째, 정서적 애착(emotional affinity). 대중은 특정한 스타를 향해 느슨한 애착을 느낀다. 둘째, 자기 동일시(self-identification). 영화의 관객이 스스로를 영화 속 등장인물과 동일시한다. 셋째, 모방(imitation). 영화 밖 현실에서도 영화의 등장인물을 모방한다. 넷째, 투사(projection). 영화 속 등장인물의 외모와 행동을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심리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몰입한다. 

    이러한 고전적 분석틀은 20세기 중후반까지 상당히 큰 설득력을 발휘했다. 가령 엘비스 프레슬리가 스타가 되자 젊은 남자들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른바 ‘군함머리’를 흉내 냈다거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본 후 오드리 햅번처럼 검은 스커트에 진주목걸이를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들이 대거 출현했다거나 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요긴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커는 그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제임스 딘이 주연한 ‘이유 없는 반항’의 흥행 이후 청소년 사이에 칼싸움과 난폭운전이 늘어났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내의 경우에도 비슷한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지금도 연예인 누가 입었다는 옷이나 들고 행사장에 나타났다는 가방이 품절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다반사다. 애착, 동일시, 모방, 투사로 이어지는 팬덤의 고전적 해석 모델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래 예견한 1988년作 ‘부족의 시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세기까지는 저 모델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21세기의 팬덤 문화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같은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상시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있다. 이에 같은 ‘부족’을 형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앤드류 튜더의 설명은 스타와 팬의 1:1 관계를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팬덤 현상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팬덤 상호간의 관계를 눈여겨봐야 한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스타와 팬의 관계보다 팬덤과 팬덤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 작품이 ‘응답하라 1997’이다. 주인공 성시원(정은지 분)은 고등학교 2학년이자 H.O.T의 열혈 팬이다. 당연히 H.O.T 팬클럽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가 H.O.T, 그 중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토니 안과 맺는 정신적 관계는 앤드류 튜더의 설명처럼 직선적이지 않다. 수많은 다른 H.O.T 팬, 그리고 젝스키스 팬클럽과의 관계 속에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두 아이돌 그룹의 팬들은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끝나지 않는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이에 따른 감정의 앙금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아 있다. 대체 팬이 뭐라고, 팬클럽 활동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한 집단에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다른 집단을 적대시한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은 거대한 현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근본을 이루는 바탕은 150명 내외의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가 쓴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21세기의 우리는 다시금 ‘부족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88년 발행된 ‘부족의 시대’는 미래를 예견한 책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국민국가라는 추상적이면서 공식적인 정치 기구와,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경험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근대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마페졸리는 그런 근대적 구도가 곧 허물어지고 대신 감성을 공유하는 소집단, 즉 ‘부족’으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인은 사라지고 대신 ‘부족원’만 남는 셈이다. 

    과거의 부족은 씨족과 혈통을 중심으로 구분됐다. 오늘날의 부족은 문화, 스포츠, 성별과 성적 정체성, 종교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또 원한다면 (고통스럽겠지만) 탈출해 다른 부족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마페졸리는 개인주의가 쇠퇴하고 “다원주의, 수평적 네트워크, 감성적 연대, 촉각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신부족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어른의 짐을 벗어던진 어린아이가 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그의 ‘포스트모던’한 입장이었던 셈이다.


    ‘바보 노무현’에서 ‘친박연대’까지

     2008년 3월 31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서청원 당시 친박연대 대표와 총선 출마자들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사진을 넣은 유세차량을 세워놓고 합동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DB]

    2008년 3월 31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서청원 당시 친박연대 대표와 총선 출마자들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사진을 넣은 유세차량을 세워놓고 합동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DB]

    문제는 팬클럽의 시대, 부족의 시대가 문화·예술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데 있다. 21세기가 되자 아이돌 팬클럽의 작동 방식을 참고해 만들어진 정치인 팬클럽의 시대가 열렸다. 그 주인공은 지역감정과 맞서 싸우며 낙선에 낙선을 거듭한 ‘바보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할 무렵, 갓 대학교에 들어갔던 필자 역시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노란색 돼지저금통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인터넷에 노무현에 대한 좋은 소식을 퍼다 나르며 글을 쓰는 등 ‘노무현 부족’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당시는 언론 뿐 아니라 기성 정치권 모두가 그 파급력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수없이 많은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쓰며 대통령이 됐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대중 동원과 조직 모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팬덤에 서 꽃을 피웠다. 박근혜의 팬덤 정치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가 탄핵당한 지금은 실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가 거둔 성과를 돌이켜보자. 정당득표율 13%, 지역구 6석을 당선시켜 총 14석의 의석을 얻었다. 정작 박근혜 본인은 당시 한나라당에 적을 두고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바깥에서 박근혜의 이름을 걸고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당선될 정도로 강력한 팬덤 정치가 작동했다. 

    팬클럽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달리 표현하면 오늘날의 한국 정치는 공적 조직인 정당, 그리고 개인으로서 판단하고 투표하는 유권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누구 팬의 숫자가 가장 많은지, 누구 팬이 가장 극성맞은지, 누구 팬클럽 간에 싸움이 붙었는지 말았는지 같은 요소가 가장 중요해져버렸다. 우상호와 박영선이 문재인 팬클럽의 눈치를 보며 ‘대통령 생신 축하’를 크게 외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부족주의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는 가장 공적인 영역이자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드러나고 조율돼야만 하는 분야다. 정치가 부족주의에 끌려 다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보며 충격을 받은 미국의 지성계가 치열한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서문을 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그래서 클럽, 팀, 동아리, 가족을 사랑한다. 완전히 은둔자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사도 수사도 교단에 속해 있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다. 부족 본능에는 필연적으로 ‘우리’와 ‘저들’을 갈라놓는 세계관이 반영돼있다. 그러므로 토트넘 핫스퍼의 팬과 아스날의 팬은 서로 반목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적’을 필요로 한다. 

    부족주의의 작동 방식은 나치를 옹호했던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칼 슈미트는 그의 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란 적과 친구를 나누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칼 슈미트의 세계관 속에서 정치에는 상위의 목적이 없다. 너는 내 편이냐 아니면 적이냐, 이 질문을 던지며 편을 갈라 싸우는 게 정치의 본질이고 그것이 전부다. 정치를 현실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치 허무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돌멩이와 곤봉 대신 투표용지와 스마트폰

    팬덤에 의해 유지되고 작동하며 끌려가는 정치가 위험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것을 보고 즐기기 위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현실의 안건이 있다. 설령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의견이라 해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또 소수자, 아니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보호받아야 할 인권을 갖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법치주의와 다원주의가 필요하다. 선거에서 졌든 이겼든 누구에게나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이 있다. 또 모든 정치 행위는 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파괴하려 들 것이다. 온갖 폭력과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민주적으로 집권한 나치가 적에게는 민주주의를 허락하지 않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누고, 선거를 통해 우리 편이 더 많다는 점을 확인하여, 이긴 쪽이 진 쪽의 의사를 완전히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것.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돌멩이와 곤봉 대신 투표용지와 스마트폰을 손에 쥔 부족주의자들의 패싸움일 뿐이다. 물론 모든 정치의 근간에는 적과 친구의 구분이 깔려 있다. 하지만 특히 우리는 북한이라는 안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으며 대외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정치는 여야를 막론하고 적용될 수 있는 공공선을 발견하고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자면 법치주의에 뿌리를 두고 다원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문 대통령 팬클럽의 환심을 끌기 위해 여당의 중진급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쏘아 보내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이유다. 한국 정당정치에 팬덤 문화와 부족주의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