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소설은 제목처럼 ‘야하지’ 않았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여주인공 ‘이분’은 이른바 ‘탈선 소녀’가 아니다. 처음 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세 살 때부터 제 딸을 출산하는 스물다섯 살까지 그려진 이분의 삶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을 둘러싼 죄의식, 도덕, 인습, 환상과의 치열한 갈등은 한 여성의 삶에서 특별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여성이라면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소녀에서 여인이 됐을 것이다.
소설 속 다양한 에피소드도 꽤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가슴이 큰 친구에게 질투를 느끼고, 은행에 가면 꼭 여성지 흑백 페이지를 찾아 읽으며, 밤에 걸려오는 ‘음란 폰팅’ 전화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무언가 모를 흥분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처음 ‘포르노’를 접했을 때의 경악과 밤길 ‘바바리맨’의 추억, 확 깨져버린 남자에 대한 ‘환상’까지.
기자 또한 작가의 후기처럼 ‘성에 대해서 풍선처럼 터질 듯한 호기심을 가진 소녀’를 지나 ‘죄의식과 갈등에 들끓고 있는 미혼여성’이 되어 ‘탄로나버린 비밀에 대한 허탈감과 모성이라는 세습된 굴레에 사로잡힌 기혼여성’을 앞두고 있었던 것 같다.
1993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김별아는 1995년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를 낸 이래 소설집 ‘꿈의 부족’, 장편소설 ‘개인적 체험’ ‘축구전쟁’,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식구’와 다수의 동화책을 선보였다. 그는 체험에 바탕을 둔 자전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외국의 문명사와 우리 역사로 시야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던 올초 큰 ‘사고’를 치고 만다. 국내 최대 규모의 1억원 고료가 걸린 세계문학상(세계일보사 주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수상작은 역사소설 ‘미실’. 미실은 화랑(花郞) 등 신라시대 중심인물들의 사생활을 기록한 ‘화랑세기’에 자주 등장하는 요희(妖姬)로, 신라의 ‘팜 파탈’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성욕과 역사의 만남
3월5일 오후 2시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김별아와 인터뷰하기로 약속했다. 1시간쯤 전 카페에 도착해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와 ‘미실’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두 소설은 닮은 듯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똑같이 여성과 성에 대해 다뤘지만 풀어내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아마 20대 중반이던 작가가 열 살을 더 먹으면서 나타난 변화일 것이다. 잠시후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책표지와 같은 화사한 주홍빛 아이섀도를 한 김별아가 환하게 웃으며 카페로 들어섰다.
-‘미실’의 세계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그동안 복권 한 장 당첨되지 않았을 만큼 횡재수가 없었는데 놀랍고 기쁘죠.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해요. 지금까지 그랬듯 죽을 때까지 꾸준히 책을 내는 이름 없는 소설가로 있고 싶었는데, 갑자기 큰 격려를 받으니 당황스럽죠. 그런 격려와 기대에 부흥하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네요. 다른 데는 ‘자신감’ 덩어리인데, 문학과 관련해서는 ‘열등감’ 덩어리거든요(웃음).”
-신라 여인 미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등단 이후 계속해서 개인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 글을 써온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한계를 느껴 몇 년 전부터 한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이를 바탕으로 고대사에서 현대에 이르는 연작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러다가 ‘화랑세기’의 미실을 만나게 된 거예요. 제가 꾸준히 탐구해온 여성의 성적 욕망과도 관련이 있고요.”
소설 ‘미실’은 신라 성덕왕 때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랑세기’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싣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성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근친혼, 통정, 사통은 물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 권력자에게 자신의 아내를 받치는 일종의 성 상납인 색공(色供) 등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