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집은 치킨을 시켜야 하는 이유가 열 가지가 넘는다. 프로야구 중계를 보면서, 한국 선수가 출전하는 프리미어리그나 분데스리가 경기를 보면서, 주말 점심이나 저녁거리가 마땅치 않아서, 기념일이어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입이 심심해서…. 어쩌다 한 주만 건너뛰어도 누군가의 입에서 “치킨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우리 집만 이런 게 아닐 거다. ‘대한민국은 치킨공화국’이라고 할 정도로 치킨은 가장 친숙한 먹을거리다. 1997년 이후 한 번도 외식 메뉴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시장 규모가 연 4조 원으로 추정된다. 치킨 프랜차이즈 회사만 250여 개, 가맹점이 3만 개에 달한다. 독립점포, 노점까지 합하면 4만 개가 넘는다. 1등 브랜드로 꼽히는 BBQ의 시장점유율이 10%에 불과할 정도로 춘추전국시대가 이어진다.
치느님, 치덕후, 치믈리에
기자가 사는 성북구 정릉동만 해도 반경 1.2km 안에 40개가 넘는 치킨점이 경쟁을 벌인다. 프라이드치킨, 양념치킨, 간장치킨, 오븐구이치킨, 마늘치킨, 고추치킨, 화덕구이치킨, 파닭, 두마리치킨 등 종류도 다양하다. 같은 프라이드치킨, 양념치킨도 업소마다 모양과 맛이 다르다.
그저 술안주나 아이들 간식거리 수준이 아니다. 이색적이고 서구적인 음식점들로 가득한 홍익대 일대를 걷다보면 두세 집 건너 치킨점이다. 홍대입구역-상수역을 오가며 대충 세어보니 100개쯤 됐다.
이소미(20) 씨는 “맥주 마실 때 안주로 치킨을 많이 찾지만 평소 간식으로도 즐긴다. 다른 고기에 비해 부담이 덜하고, 가격 대비 영양가와 만족도도 최고다. 뭐 먹을까 할 때는 치킨이 정답”이라며 엄지를 세웠다. 이곳 치킨점 중에는 손으로 들고 뜯기보다는 양식처럼 나이프와 포크가 딸려 나오는,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업소가 여럿 눈에 띈다. 이런 곳엔 예외 없이 젊은 여성들끼리 온 손님이 많았다.
젊은이들 사이에 ‘치느님’(치킨+하느님의 합성어, 치킨의 극존칭)을 추종하는 ‘치덕후’(치킨마니아를 일컫는 인터넷 용어), 더 나아가 ‘치믈리에’(치킨+소믈리에의 합성어, 치킨 맛 감별사)를 자처하는 사람도 많다. 홍익대 인근 치킨전문점에서 만난 강정은(32) 씨도 ‘치믈리에’를 꿈꾸는 치덕후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물론 평소 혼자서도 치킨을 즐긴다는 그는 200여 개의 프랜차이즈 치킨은 물론 홍익대, 신천, 수원, 대구 등 지역별 유명 업소의 치킨은 다 찾아가며 먹어봤다고 했다. 그는 치킨의 가장 큰 매력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다양한 맛’을 꼽았다.
“다른 육류는 솔직히 부위별 맛 차이를 크게 못 느낀다. 생선회도 종류별 맛 차이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치킨은 브랜드마다 맛이 확연히 달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저마다 스타일이 달라 자주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명동영양센터, 켄터키치킨센터
영화 ‘집으로’에서 치킨이 먹고 싶다는 손자를 위해 할머니가 백숙을 해주자 어린 유승호가 이건 치킨이 아니라며 엉엉 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닭’과 ‘치킨’은 같은 단어이지만, 우리는 굽거나 튀긴 닭을 치킨이라 하지 삼계탕, 백숙, 찜닭을 치킨이라 하지 않는다. ‘치킨’은 ‘닭’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닭은 으레 물에 삶거나 조려서 먹던 우리나라에 ‘치킨’이 처음 나타난 건 1961년 ‘명동영양센터’가 생기면서부터다. 지금도 아파트 단지나 시장 어귀 1t 트럭에서 파는 전기구이 통닭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전기구이 통닭의 시조가 명동영양센터다.
가장 기억나는 유년 시절 풍경 중 하나가 시장 튀김통닭집이다. 밀가루반죽 옷을 입힌 닭을 펄펄 끓는 기름가마솥에 넣어 바삭하게 튀겨낸 통닭이 대나무발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걸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40~50대라면 대개 누런 각대봉투에 담긴 튀김통닭, 전기구이통닭의 살살 녹는 그 맛을 기억할 것이다.